[스페셜2]
허우샤오시엔과 지아장커의 음악적 페르소나
2009-09-03
글 : 강병진
사진 : 최성열
대만의 가수·작곡가이자 영화음악감독인 임강에 관한 특별한 이야기

<남국재견>을 공개한 허우샤오시엔은 이렇게 말했다. “<호남호녀>의 잭 카오, 임강, 애니 시즈카의 어울림 그 자체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으면서 동시에 모든 것인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세 사람의 움직임 자체를 영화로 찍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제5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가 이 세 사람 중 한명인 임강을 심사위원으로 초대했다. 임강은 <희몽인생>으로 허우샤오시엔과 첫 만남을 가진 배우이자, <남국재견>과 <밀레니엄 맘보>의 영화음악을 맡았던 뮤지션이다. 또한 지아장커의 <세계> <스틸 라이프> <무용> <24시티>의 음악을 만들기도 했다. 허우샤오시엔과 지아장커가 동시에 음악과 연기를 제의하는 남자 임강은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다. 제천의 청풍호반을 찾아 그의 음악세계, 그리고 두 감독과의 만남에 대해 물었다.

“가을을 상상해보게. 언덕 위에 큰 나무가 한 그루 있어. 바람이 불고 무수히 많은 나뭇잎들이 떨어지고 있지. 나는 그중에서 잎사귀 하나를 골라 찍을 걸세. 나무에서 떨어진 순간부터 땅에 닿을 때까지.” <밀레니엄 맘보>의 첫 장면을 설명하는 허우샤오시엔의 말이다. 새 천년을 앞둔 대만 청춘의 불안과 방황을 그린 이 작품은 끝없는 터널이 열리고 비키(서기)가 담배를 피우며 걷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때 머리를 찰랑이며 걷는 서기의 뒷모습, 그리고 간간이 뒤를 돌아보는 그녀의 얼굴 위로 반복되는 리듬에 실린 몽환적인 목소리가 흐른다. <밀레니엄 맘보> O.S.T의 메인 테마인 <A Pure Person>이다.

개봉 당시 영화를 본 중국의 지아장커는 이 음악의 작곡가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나는 지금 <세계>란 영화를 준비 중입니다. 이 영화의 음악을 맡아주세요.” <세계>는 자본주의로의 격변을 맞은 중국인의 소외를 그린 작품이다. 21세기를 앞둔 대만과 급격한 체제 변화에 놓인 중국은 그처럼 닮아 있었을 것이다. 지아장커가 누군지도 몰랐던 이 작곡가는 그의 전작들을 본 뒤, 극중 세계공원의 무용수인 따오(자오타오)가 공연하는 장면에 흐르는 음악을 만들었다. 허우샤오시엔과 지아장커를 잇는 흥미로운 삼각관계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허우샤오시엔이 가을의 나무를 예로 들며 자신의 느낌을 설명한 남자, 지아장커가 자신이 만든 모든 영화의 DVD를 보내 음악을 부탁한 남자. 그는 대만의 가수이자 작곡가, DJ, 배우, 음반프로듀서인 임강이다. 린창(林强), 혹은 림기옹(Lim Giong)으로도 불린다.

“진심을 드러내면 돈을 벌기 힘들다”

임강의 과거사를 들으면 이들의 삼각관계는 더욱 그럴싸해 보인다. 속된 말로 끼리끼리 만났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자신만의 영화세계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허우샤오시엔이나 중국 정부의 개봉금지령에도 꿋꿋이 중국의 이면을 파헤치는 지아장커처럼 임강 역시 고집 센 음악인이다. 1990년에 발표한 첫 앨범의 타이틀곡 <향전주>(向前走)는 가족을 그리워하는 한 남자의 마음을 따뜻한 멜로디에 담은 음악이었다. 당시 대만에서만 4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인기있는 대중음악을 한 게 뭐가 고집이냐 할지 모른다. 그런데 이 노래가 한때 대만에서 사용을 금지한 ‘민남어’로 부른 대중가요라면 어떨까. 노래는 물론이고 출판, 연설에도 허용되지 않았던 언어다. 공공장소에서 사용했다가 운이 나쁘면 처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 임강은 “일본어 사용을 강요당하던 일제식민지 시대의 한국과 비슷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향전주>는 금지령이 해제된 직후에 나온 첫 민남어 노래였다.

그가 앨범을 낸 이유도 가수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민남어는 내 어머니의 언어다. 그런데 어디서도 쓸 수 없다는 게 화가 났기 때문에 민남어로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그래서 가수로서의 앨범도 3장밖에 만들지 않았다.” 3집 <오락세계>(娛樂世界)는 아예 대중과의 이별을 선언한 앨범이다. 강한 데시벨의 전자음과 끝없이 반복되는 리듬으로 가득한 이 앨범의 가사들은 당시 대만의 현실을 과격하게 비판한다. 수록곡 중 하나인 <당병호>(當兵好)의 가사는 이렇다. “총을 잡고, 대포를 장전해. 반공과 나라를 수복하는 것은 우리 동포의 국교지. 우리 민족을 위해, 종교를 위해, 전쟁하고 살인을 하는 것은 감옥에 갈 일이 아냐. 삼민주의, 세계대동은 우리나라의 목표야. 다만 세계 평화가 언제 올지는 하늘만이 알고 있겠지.”

대만의 징병제를 비판하는 이 노래는 급기야 ‘Fuck!’이란 외침으로 끝난다. 당연히 <향전주>에 열광했던 대중은 크게 실망했다. 반품사례가 늘어났다. 40만장이었던 판매기록은 3만장 이하로 떨어졌다. 임강은 다시 예전과 같은 음악을 하라는 소속사의 요청을 무시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찾은 게 이유라면 이유였다. “그때 깨달았다. 진심을 드러내면 돈을 벌기 힘들다는 사실을 말이다.(웃음)” 왜 하필 전자음악을 선택했냐고 묻자 역시나 싶은 대답이 돌아왔다. “컴퓨터로 혼자 만들 수 있으니까. 밴드를 하면 다른 사람과 잘 지내야 하는데, 나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로커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웃음)”

영화 보지 않고 만든 <A Pure Person>

사랑을 노래하는 대신, 대만의 현실을 바라보던 임강에게 허우샤오시엔은 우상 같은 존재였다. 한때는 허우샤오시엔의 영화사에 들어가고 싶었을 정도다. “허우샤오시엔 이전의 대만영화는 사랑 이야기거나, 무협, 아니면 정치적인 세뇌를 목적으로 한 영화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나의 삶을 아름답게 그리는 영화를 본 것이다. 눈물을 흘리며 그의 영화를 봤다.”

이후 가수로 데뷔한 임강은 자신의 뮤직비디오에 대만 전통 인형극의 장인인 리티엔루를 출연시켰다. 리티엔루는 허우샤오시엔의 <비정성시>와 <연연풍진>에도 나온 배우다. 당시 리티엔루의 일생을 담은 <희몽인생>을 준비 중이던 허우샤오시엔이 촬영현장을 찾았고,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은 처음 만났다.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그냥 악수만 하면서 인사했다. 그런데 다음날 회사로 전화가 왔다. <희몽인생>에 출연해 달라더라.” 임강은 왜 자신을 캐스팅했냐고 묻지 않았다. 그냥 기분이 좋았다. 허우샤오시엔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호남호녀>
<남국재견>

<희몽인생> 이후 임강은 <호남호녀>와 <남국재견>에 연달아 캐스팅됐다. <호남호녀>에서는 항일청년 종하오동을, <남국재견>에서는 극중 잭 카오와 짝패인 티엔을 연기했다. <남국재견>은 임강이 영화음악가로 참여한 첫 작품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은 철길을 달리는 기차 안의 모습이다. 잭 카오의 얼굴이 보이고 그 뒤로 애니 시즈카와 임강의 모습이 보인다. 그 위로 임강의 음악이 흐른다. 감독 스스로도 “예전 영화들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내려 애썼다”고 했던 <남국재견>은 임강의 빠르고 강렬한 비트 덕분에 허우의 이전 영화와 전혀 다른 심상을 부여받는다.

사실 임강은 음악을 해달라는 허우의 요청을 거절하기도 했다. 허우가 “네가 어떤 음악을 하든 상관없다”고 하지 않았다면 임강도 자신감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나온 이 노래의 제목은 <자아훼멸>(自我毁滅)이다. “가수 데뷔 이후 나는 거의 자폐아였다. 거의 집 안에만 있었고 밖에 나가지 않았다. 외출을 할 때도 사람이 많은 곳은 피해다녔다. 모든 게 싫고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자아훼멸>은 그렇게 살았던 나를 모조리 담아내 없애버리려는 생각으로 만들었던 음악이다.”

<남국재견>을 끝낸 뒤, 허우샤오시엔은 임강에게 “음악을 그만두고 이제 배우를 하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다. 임강은 거절했다. “나는 감독님을 알고 싶어서 영화를 한 거지, 영화가 좋아서 한 게 아니다.” 결국 허우샤오시엔은 그에게 영화음악을 맡기는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두 남자는 <밀레니엄 맘보>에서 다시 만난다. 임강은 극중 비키의 연인인 하오하오(투안 춘하오)에게 공감했다. “항상 음악을 듣고 클럽을 다니는 모습이 나랑 비슷하더라. 허우샤오시엔도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내가 열었던 클럽파티를 자주 찾곤 했다.” 임강은 당시 자신이 대만의 젊은이들에게 느꼈던 감정을 음악에 담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휴대폰이나 자동차를 구입하고 일을 하는 것에 매몰된 사람들. “현재만 있고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전세계의 젊은이들이 다 그렇지 않을까? 자신이 뭐가 될지 모르니까 허무감만 짙은 거다. 내가 음악을 통해 해야 할 일은 그중 한명에게 의미를 만드는 거였다.” 임강은 영화를 보지 않은 채 <A Pure Person>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서기나 비키의 캐릭터도, 전체적인 영화의 분위기도 고려하지 않았다. 단지 허우가 말한 ‘떨어지는 나뭇잎 하나’의 느낌만을 가지고 있었다. 허우의 이야기는 첫 장면을 설명한 것이지만, <밀레니엄 맘보>의 모든 것을 설명한 말이기 때문이었다.

지아장커 통해 인간의 위대함 느껴

<밀레니엄 맘보> 이후, 지아장커와의 만남은 임강 본인에게도 신기한 인연이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중국과 대만의 관계를 생각할 때 신기하고, 듣도 보도 못한 감독의 작품에 음악을 하게 된 것도 신기하다. 두 사람은 <세계>의 최종편집본이 나올 때까지 만나지 않았다. 지아장커가 DVD를 보냈고 영화를 본 임강은 허우샤오시엔의 영화에서 경험한 감동을 그의 영화에서도 느꼈다. “현실을 세밀하게 담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에 대한 따뜻한 묘사가 마음에 들었다.” 이번에도 임강은 왜 자신을 선택했냐고 지아장커에게 묻지 않았다. 다만 스스로 <밀레니엄 맘보>와 <세계>의 공통점을 생각해봤을 뿐이다. “<밀레니엄 맘보>는 격변의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다. <세계>도 급변하는 중국이 배경인 영화다. 지아장커는 <밀레니엄 맘보>에서 현대적인 불안과 허무를 본 게 아니었을까? 무엇보다 전자음악을 쓰고 싶었기 때문에 나를 선택했을 것 같다. 피아노나 바이올린이 필요했다면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을 테니까.”

<밀레니엄 맘보>
<세계>

사실 임강은 지아장커와의 작업에서 많은 에피소드를 갖고 있지 않다. 이메일로만 소통할 수밖에 없는 게 가장 큰 이유라면 지아장커가 거의 음악을 쓰지 않는 영화감독이란 이유도 있다. <스틸 라이프>에는 중국의 전통무대극인 사천극의 가락과 전자음을 융합한 멜로디가 첫 장면에 흐를 뿐이다. <무용>에서 들리는 <정인>과 <사랑의 노동>은 지아장커가 선곡한 노래였다. “그의 영화에서 내 역할은 간간이 들리는 미세한 전자음을 만드는 거였다. (웃음) 그렇다고 서운한 건 없다. 오히려 지아장커의 영화는 음악이 없는 장면들이 더 좋을 때가 많다.”

임강은 지아장커와의 작업을 통해 중국의 현실, 그리고 인간의 위대함에 대해 느낄 수 있는 기회였다고 말했다. “<세계>에 나오는 세계공원에 대한 이야기는 대만에서도 많이 들었다. 대륙이 문화적 베이스가 약한 상태임에도 자신들의 발전을 세계에 알리고 싶어 만들었다더라. 지아장커의 영화들이 왜 중국에서 금지되는지도 이해가 됐다. <스틸 라이프>를 통해 본 싼샤란 곳에서는 인간의 무력함을 느꼈다. 시대가 바뀌면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휩쓸릴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싶더라. 흥미로웠던 건 그럼에도 <스틸 라이프>는 살아남기 위해 강해지는 사람을 보여준다는 점이었다.”

영화로 생각하는 대만과 중국의 차이

지아장커 또한 임강에게 연기를 제안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치구도를 그린 영화였고, 임강은 국민당 군인 역을 제의받았다. 임강은 거절했다. 역시 자신은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는 게 이유였다. 만약 그때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아마도 임강은 두 감독의 영화세계를 동시에 들여다보는 창문이 됐을지도 모른다. 과연 이들의 삼각관계는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임강은 지아장커와 허우샤오시엔의 영화가 이제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는 점을 흥미로워했다. “지금의 대만과 중국의 차이인 것 같기도 하다. 지아장커는 환경의 변화를 그리는데, 이미 예전에 변화를 그렸던 허우샤오시엔은 이제 본인만의 예술을 추구한다. 중국은 멈추지 않고 변화하는 중이지만, 대만은 이제 안정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허우샤오시엔이 바라본 청춘을 대변했던 한 남자가 이제는 지아장커가 사는 중국의 변화를 같은 눈으로 본다. 허우샤오시엔과 지아장커는 차기작에서도 임강에게 음악을 부탁할 예정이다. 더이상 두 감독의 영화에 출연한 임강을 볼 수는 없겠지만, 임강이 그들에게 새로운 의미의 페르소나인 건 분명한 듯 보였다.

임강의 음악을 듣고 싶다면

가장 쉽게 들을 수 있는 음악은 <밀레니엄 맘보>의 O.S.T다. 국내 포털 사이트에서 유료결제로 들을 수 있다. 메인 테마곡인 <A Pure Person>은 블로거들이 퍼담기를 주저하지 않는 곡이기도 하다. 그외의 음악은 검색의 수고가 필요하다. 대만의 음악 사이트인 ‘music.yiqilai.com’에 접속한 뒤, ‘林强’으로 검색하자. 임강이 가수로서 낸 앨범과 DJ로 참여한 앨범을 다 들을 수 있다. ‘mp3.baidu.com’도 유용한 사이트다. 역시 ‘林强’으로 검색하면 된다. 아직 중화권에서는 유료 MP3의 개념이 없는지, 마우스 왼쪽버튼으로 다운받는 것도 가능하고 가사도 서비스된다. 임강의 디제잉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곳도 있다. ‘www.acidplanet.com’에 접속한 뒤 ‘lim going’으로 검색하자(giong이 아니라 going이다). 약 20개의 곡을 스트리밍으로 들을 수 있다.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