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친구 그의영화]
[나의 친구 그의 영화] 당신은 진짜 남자였죠
2009-09-10
글 : 김연수 (작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추억하며 <그랜 토리노>의 마지막 장면을 하염없이 보다
<그랜 토리노>

나는 <그랜 토리노>의 마지막 장면, 그러니까 타오가 1972년식 그랜 토리노에 개를 태우고 바닷가 도로를 지나간 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노랫소리가 나오는 장면을 무척 좋아한다. 그랜 토리노가 지나간 뒤에 카메라는 바다와 도로를 보여준다. 나뭇잎은 흔들리고 물결은 출렁이고, 도로 위로는 자동차가 지나간다. 그건 마치 죽은 월터 코월스키의 눈으로 보는 이 세상의 풍경 같다. 언젠가 나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스물일곱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라디오로 교통상황을 전하는 방송을 듣고 있었는데, 문득 내가 죽은 다음날 아침에도 달래내고개나 군자교는 여전히 정체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시절에는 우울한 일들이 꽤 많았다. 극중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주먹으로 벽을 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죽은 뒤에도 여전히 교통이 정체될 달래내고개나 군자교를 생각하면, 그건 정말 부질없는 일처럼 여겨졌다.

무시무시한 느낌이었던 그의 이름

어린 시절, 그러니까 1970년대 후반에 이소룡과 함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내 영웅이었다. 그 시절, 김천에서 나처럼 어린 학생이 신작 영화를 보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내 또래의 아이들은 모두 일요일 아침에 싼값에 상영하는 문화교실의 멤버였다. 문화교실에는 해마다 같은 영화가 반복 상영됐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들도 그 문화교실을 통해서 봤다. <황야의 무법자> <석양의 건맨> <석양의 무법자>. 그 레퍼토리에는 <장고> <무숙자> 같은 다른 마카로니 웨스턴과 <정무문> <사망유희> <용쟁호투> 같은 이소룡의 영화들도 포함돼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본 개봉영화는 성룡의 <취권>이었다. <취권>을 보기 전까지 우리는 해마다 같은 영화를 보고 또 봤던 셈이다. 그러니 내 유년의 무의식에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동작들은 틀림없이 각인돼 있을 것이다.

처음 <그랜 토리노>를 봤을 때가 생각난다. 극중의 월터 코월스키가 몽족 갱들을 찾아가서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달라고 하는 장면에 이르렀다. 그 장면에서 나는 조금의 불안도 느끼지 않았다. 미리 총을 겨누고 마주선 일당들은 물론이거니와 이층에도 총을 든 놈들이 있다는 걸 카메라는 보여줬지만, 마카로니 웨스턴에서 그런 불가능한 대결장면을 보여주는 건 일상적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라이터(기관총도 아니고!)를 꺼낸 뒤에 일어난 일들을 보는데 갑자기 긴장이 풀리면서 눈에 눈물이 맺혔다. 나의 영웅이 그렇게 맥없이 죽을 줄 몰랐다기보다는 무방비 상태로, 대략 일곱살 정도의 정신연령으로 뭔가 화려한 복수를 기대하고 있다가 “맞아.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지”라는 마흔살의 늙은이로 귀환할 때의 멀미 같은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요즘 친구들에게는 고리짝 같은 소리겠지만, 그 시절에는 지방 극장에서 정치 행사를 여는 일이 많았다. 김천에는 아카데미극장과 김천극장, 이렇게 두개의 극장이 있었는데 지구당 창당대회 같은 행사는 김천극장에서 자주 열렸다. 그런 곳에서 야당 행사가 열리면 곧잘 폭력사태가 벌어졌다. 지금도 내 기억에는 대구에서 김영삼 총재가 반대파 행동대원들에게 감금된 일을 두고 어른들이 주고받던 말들이 남아 있다. 그런 일들이 아니면 야당은 신문이나 방송에 나오지 않던 시절이었다. 우리 연배 이상의 사람들이 미디어법에 대해서 알레르기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는 까닭은 그 때문일 것이다. 한때 우리는 실제로 언론에 의해 세뇌당한 적이 있었으니까. ‘야당 행사에는 폭력사태’라는 것도 반복된 주입학습의 결과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무시무시한 집단은 재야였다. 그리고 그 재야의 핵심에 모란봉 같은 간첩의 암호를 연상시키는 DJ가 있었다. 내 고향 사람들은 실제로 DJ를 증오했다. YS라고 하면 그래도 점잖게 말하던 어른들도 DJ라면 쌍욕을 내뱉었다. DJ가 그들에게 끼친 피해는 전혀 없었다. 아마 경상도 소도시에서 살아가던 그 어른들에게도 승자독식 사회를 살아가는 고통은 존재했을 것이다. 그 어른들은 반칙을 일삼는 사람들이 성공하는 사회를 바로잡기보다는 더 간편한 방법을 택했다. 그들처럼 무조건 돈을 벌어 출세하는 일. 내가 태어난 동네에서 DJ는 빨갱이와 동의어였는데, 그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우리가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그가 그들을 설득했기 때문이었다. 말이 많으면 빨갱이. 양심을 자극하면 빨갱이. 국가폭력으로 간신히 유지되는 승자독식 사회가 아니어도 우리는 충분히 잘살 수 있다고 말하면 빨갱이.

고향 사람을 대신해 사과하고 싶습니다

부질없는 일인 줄 알지만, 할 수만 있다면 나는 그 모든 경상도 사람들을 대신해서 김대중 대통령에게 사과하고 싶다. 힘을 합치자고 내민 손을 물어뜯어버린 그 모든 이빨들에 대해서. 무임승차를 하고도 돈을 대신 내준 사람을 걷어찬 그 뻔뻔한 무지에 대해서. 고등학생이 되면서 나는 김대중 대통령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럼에도’ 그는 내가 아는 한 가장 멋있는 남자였으니까. 그 당시, 내 주위의 남자들은 모두 <그랜 토리노>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타오에게 말하듯 ‘기생오래비’(pussycat) 같았다. 힘센 사람들 앞에서는 슬금슬금 눈치나 보다가 그들을 대신해서 자기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폭력을 가하는 남자들. 아마도 내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을 좋아한 데에는 그 이유가 가장 큰 것 같다. 그들은 진짜 남자였기 때문에. 비겁하지 않았고, 겁쟁이도 아니었기 때문에. 마치 어린 시절, 아카데미극장 문화교실에서 본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이소룡처럼.

그런 남자들을 다시 만나기는 힘들 것이다. 1970년대 후반의 어느 날, 이소룡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을 때, 나는 이 세계가 얼마나 현실적이고 구체적인지 깨닫게 됐다. 현실은 영화와는 다르다는 걸. 잃어버린 십년이란 것도 그런 의미일 것 같다. 현실감을 잃어버렸던 지난 십년. 다시 <그랜 토리노>를 보면서 현실에 대해서 생각한다. 평생 꿈을 말하며 살았던 사람이 어느 날 현실적으로 죽는 일에 대해서. 역설적이게도 그 현실적인 죽음은 우리에게 다시 꿈에 대해서 서로 얘기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다만 나는 <그랜 토리노>의 마지막 장면만을 하염없이 보는 것이다. 나뭇잎은 흔들리고 물결은 출렁이고. 어떻게든 삶은 계속 이어진다는 게 좀 놀라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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