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ENE#000. 1986년. 홍콩. 빌딩 주차장>
세차원으로 보이는 허름한 차림의 한 남자(소마, 35살), 다리를 절며 지하주차장으로 걸어들어간다. 오래전 다친 듯한 다리에 끼워진 의료용 보조장치에선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철컥… 철컥…’ 처량한 소리가 구슬픈 음악과 함께 울려퍼진다.
이내 주차장 한구석에 털썩 주저앉는 소마, 도시락으로 보이는 무언가를 꺼내 뚜껑을 연다. 볶음밥으로 보이는 내용물… 아니, 덮밥인가? 뭐지? 어찌됐건 소마, 숟가락을 집어든다. 숟가락의 모양새가 일본라멘 같은 것 먹을 때나 사용하는 움푹 팬 형태의 것이다. 저걸로 밥을 퍼먹으려면 구강구조상 상당히 불편할 텐데…. 맞다, 홍콩이지? 여하튼 일회용 플라스틱 숟가락을 움켜쥐고 내용물을 대충 휘저은 다음 숟갈 한가득 내용물을 삽질하듯 퍼서 입에 우겨넣는다(아주 성의없이…). 소마, 단지 살기 위한 행위로서의 섭취를 연거푸 반복한다. 커다란 상처를 받고 와신상담의 독한 결의를 품은 남자에게 맛을 느낀다거나 음미한다는 것은 수치일 듯. 이런 장면에서까지 클리셰를 파괴하고 싶다거나 상황을 뒤틀고 싶은 의도는 전혀 없다. 비장하고 고독한 누아르영화의 주인공이 음식의 맛에 탐닉하며 겉절이김치 찢은 손 ‘쪽쪽’ 빨아가며 게걸스럽게 밥을 먹다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그 궁상맞은 느낌이란…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난다. 아니다… 그건 아니다. 최대한 맛없게 먹는 거다. 넌 모래알을 씹고 있다.
어찌되었건 볶음밥인지 덮밥인지 모를 정체불명의 도시락을 최대한 무성의하게 먹는 소마의 앞에 한 남자가 다가와 선다(송자호, 37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남자를 보는 소마, 남자의 난데없는 출현에 감격을 한 듯 눈가가 젖어오며 무언가 말을 하고 싶지만, 입속 한가득 우겨넣은 정체 모를 음식을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고 입을 우물거린다. 소마가 입속의 음식 때문에 말을 하지 못하는 상황임을 파악한 남자, 자신이 먼저 소마의 이름을 부르며 무슨 대사를 하지만, 남자의 등장이라든지 대사의 내용 같은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남자가 소마의 이름을 부르며 대사를 했을 때 입속의 음식물이 목에 걸려 씹지도 뱉어내지도 못한 채 당황하던 소마는, 남자의 기막힌 출현 타이밍에 대한 당황과 원망 섞인 표정을 상봉의 감격스런 표정과 식도에 음식이 걸려 눈가에 맺혔을 눈물로 얼버무려버린다. 그리고 자신도 무언가 감격스러운 대사를 한마디 날리기 위해 목에 걸린 것인지 이 사이에 낀 것인지 모를 큼지막한 음식의 내용물을 손가락으로 뽑아낸다. 그래, 이 부분이 포인트다! 손가락으로 뽑아낸 왕건이를 확인하면 주윤발이 <영웅본색>에서 무성의하게 먹어대던 점심 도시락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잠깐… 저 뜨끈뜨끈한 피자의 모차렐라 치즈처럼 길게 늘어지는 재료의 정체는 뭐란 말인가? 설마 ‘피자치즈볶음밥’ 이란 말인가? 아니면 ‘해물피자치즈필라프?’ 주윤발이 테이크아웃 식당에서 ‘해물피자치즈필라프’를 구입해 지하주차장에서 처량하게 퍼먹으며 남자(적룡)를 기다렸단 말인가? ‘필라프’ 따위가 땀냄새 나는 남자들의 진한 의리의 상징인 홍콩 누아르에? 우삼이 형이 독특한 취향을 가진 감독이란 걸 알고는 있었지만, 22년째 궁금증은 더욱 증폭된다. 대체 뭔 거야?
신정원
영화감독. 사회적 풍자정신과 냉소적인 웃음으로 가득한 <시실리 2km>와 <차우>를 만들었다. 얄팍한 코미디가 아니라 찰리 채플린처럼 ‘진정한 희극’을 만드는 것이 그의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