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집는 시나리오]
[뒤집는 시나리오] <오펀: 천사의 비밀>
2009-09-09
글 : 길윤형 (한겨레 기자)
문제의 핵심은 어쩌면…
<오펀: 천사의 비밀>

“여보, 난 순이가 무서워!”

케이트(베라 파미가)가 아홉살 순이와 처음 만난 것은 지난달 작은 고아원의 다락방에서였다. 그곳에서 순이는 하얀 화선지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화선지의 왼쪽 구석에는 봄을 맞는 매화가 움을 틔우고 있었고, 오른쪽으로 뻗친 여백은 끝과 깊이를 알 수 없이 영원처럼 이어져 있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된 순이는 옆모습이 단아하고 고운 아이었다.

아이의 얼굴을 보며, 케이트는 자신의 뱃속에서 죽어간 세 번째 아이를 생각했다. 그는 몇해 전 세 번째 아이를 잃고 난 뒤, 하루하루를 술에 기대 살았다. 알코올중독에 시달려야 했고, 소리를 들을 수 없는 딸 맥스를 사고로 잃을 뻔했다. 무서울 정도로 단아한 눈빛을 가진 순이를 보며, 케이트는 문득 ‘구원’을 느꼈다.

“저 아이와 있으면 어쩐지 마음이 편해.”

케이트는 순이라면 자신의 상처를 씻어줄 수도 있겠다는 확신을 가졌다. 일주일 뒤 남편 존(피터 사스가드)과 함께 고아원을 찾은 케이트는 순이의 손을 잡고 집으로 향했다.

순이는 품에 오래된 동양 고서적을 지니고 있었다. 미련할 정도로 한국의 전통 의상을 고집했고 목과 팔에 색동 문양이 담긴 끈을 풀지 않았다. 그 때문에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했지만, 결코 화내는 일은 없었다.

순이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느낀 것은 지난주부터였다. 순이는 방에서 종이 위에 이상한 기하학적인 문양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가끔씩 눈의 흰자위를 드러내며 케이트와 존이 이해할 수 없는 비트로 바닥을 두들겨댔다.

“순이야, 무슨 일이니. 정신 차리렴.”

제정신이 돌아온 순이는 자신이 벌인 소동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케이트는 순이를 입양한 고아원에 전화를 걸었다. “저는 아무래도 순이의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겠어요.” 케이트는 단호한 목소리로 고아원 원장을 닦달했다. 고아원쪽에서는 그제야 “순이의 이상행동 때문에 애초 입양됐던 집에서 파양된 뒤 고아원에 맡겨졌다”고 털어놨다.

며칠 뒤 케이트의 집을 방문한 고아원 원장은 순이가 내지르는 괴성을 녹음해 한국으로 보냈다. 한국의 입양기관에서는 순이의 어머니는 미군한테 성폭행을 당한 뒤 음독자살한 ‘무당’이라는 회신을 보내왔다. 한국의 입양기관은 무당을 어떻게 번역할지 몰라 공문에 그저 ‘mudang’이라 적어 보냈다.

“무당은 사람을 해치지 않아요. 오히려 그 반대죠. 사람들의 고통을 같이 받아안아 슬퍼하는 거랍니다.” 고아원 원장은 담담히 말했다.

집으로 돌아온 케이트는 순이를 다시 품에 안았다. 순이는 케이트의 손을 잡았다. 작은 손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모든 잘못은 우리 미국인들 안에 있는 게 아닐까?” 케이트는 자신의 국적을 떠올리며 바스라질 듯 아이를 감싸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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