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그는 정글로 돌아간다
2009-09-24
글 : 이현경 (영화평론가)
아내를 잃은 한 남자를 그린 <조용한 혼돈>의 모호함 끝엔 무엇이 있나

만일 내가 다른 여자를 구하고 있던 바로 그 시간에 내 아내가 죽는다면? <조용한 혼돈>은 이처럼 극단적인 상황을 우리 앞에 던지면서 시작된다. 회사 중역 피에트로(난니 모레티)는 별장 근처 해변에서 동생과 한가롭게 공놀이를 하던 중 익사 직전의 여자들을 발견하고 구해준다. 피에트로와 동생은 자신들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여자들을 구조했지만 고맙다는 말은커녕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한다. 동생이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별장으로 돌아온 피에트로는 상상도 못한 상황에 직면한다. 그는 별장 앞마당에 널브러진 아내의 시신과 울고 있는 어린 딸을 발견한다. 시신 주위로 내팽개쳐진 메론 조각들은 이 비극적인 현장에 기이한 현실감을 부여한다.

그의 아내는 메론이 담긴 쟁반을 들고 느닷없이 이층에서 투신한 걸까? 누군가를 구하는 공덕을 쌓았지만 정작 아내 곁을 지키지 못한 남편의 형언할 수 없는 참담함이란 어느 정도일까? 짧은 순간 우리는 이런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런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질문을 떠올리게 하되 그 답을 알려주지 않는 영화가 <조용한 혼돈>이다. 관객이야말로 영화를 보는 내내 조용한 혼돈에 빠지게 된다. 피에트로와 아내의 관계, 아내의 사인, 아내의 죽음을 맞이한 피에트로의 감정을 모호함으로 남겨둔 것이 이 영화의 역설적인 힘이다. 결국, 관객으로 하여금 이 모호함을 견디면서 피에트로와 함께 혼돈의 중심을 헤쳐나가도록 만드는 것이 이 영화가 택한 방식이다.

영화는 졸지에 아내를 잃은 가장의 눈물겨운 아이 사랑, 이런 걸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다. 물론 아이에 대한 부성애가 바탕에 깔려 있지만 어쩌면 이것은 딸아이의 학교 앞이라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알리바이인지도 모른다. 엄마 잃은 어린 딸이 걱정되어 아이가 등교해서 하교할 때까지 몇 개월간 학교 앞을 지키는 아버지의 이야기라는 표면적인 설정을 주제로 받아들이면 영화는 너무 싱거워진다. 모호함은 삐딱한 시선도 포용하는 광대역이므로 이 남자의 내면을 다르게 읽어보자.

이미지의 반전이 주는 실체에 대한 의문

피에트로의 딸은 등교 첫날 ‘회문’(回文)에 대해 배운다. 회문은 앞으로 읽어도 뒤로 읽어도 뜻이 같은 문장인데 이 단어는 홍상수 영화에 언급된 ‘회전문’을 연상시킨다. 서울에서 춘천, 다시 경주로 향하는 방황하는 청춘의 로드무비인 <생활의 발견>에는 청평사 전설 속 회전문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이 두 영화에서 회문과 회전문의 의미작동 범위는 다르다. 춘천과 경주에서 다르지만 같은 두 여자를 만난 경수는 자신이 출구없이 제자리를 맴도는 회전문 앞에 서 있다는 깨달음을 얻으며 여정을 마치지만, 피에트로는 한 장소에 머물며 ‘돌이킬 수 있는’ 회문이라는 명제를 우회하여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인정하며 회문에서 벗어난다. 경수가 현실의 공간을 건너가는 여행객이라면 피에트로는 격동하는 내면세계를 탐사하는 정신적 유목민이라고 할 수 있다. 경수에게 회전문은 여정의 끝에 얻은 답이고, 피에트로에게 회문은 내면 탐사의 지도인 셈이다. 회문의 특징은 가역성이다. 거꾸로 읽을 수 있는 회문처럼 기억은 가역적이지만 인생 자체는 불가역적이다. 그는 태풍의 눈과 같은 장소인 학교 앞에서 잠시 불가역적 인생을 멈추고 기억이라는 회문을 더듬거린다. 매일 그곳을 통과하는 사람들과 눈인사를 나누고 간혹 찾아오는 지인을 맞이하는 단조롭고 반복적인 일상을 보내는 그의 모습에서 아내를 잃은 슬픔이나 자책감에 괴로워하는 표정은 엿보이지 않는다. 그가 과연 그런 고통 속에 있는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영화의 뒷부분에는 당혹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 정사신이 있다. 이 장면은 영화의 첫 장면과 맞물린다. 피에트로와 정사를 나누는 여인은 그가 해변에서 구해준 여인으로 알고 보니 피에트로가 다니는 회사를 합병하려는 스타이너의 애인이다. 꿈일 수도 있고 환상일 수도 있는 이 장면은 사실 생뚱맞다. 아이 학교 앞 벤치에 머무는 조용한 생활을 해온,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남자의 돌발적 행동은 그 이전까지 보여주었던 이미지에 대한 반전이다. 이 부분에 대한 공감이 이 영화를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될 수 있다. 전반부의 분위기를 깨는 이상한 연결이라고 본다면 실패한 반전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만일 우리가 앞에서 본 그를 오독한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돌이켜보면 이 돌연한 정사 이전에 그는 자신의 감정을 한번도 제대로 표현하지 않았다. 영화는 아내의 죽음 이전의 그에 대해 알려주지 않고 우리는 그의 실체를 모른다. 그가 과연 아내랑 만난 이후에 더이상 처제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지 않았는지 확신할 수 없으며 아내에게 어떤 정신적 고통을 주었는지도 알 수 없고 친구가 토사구팽당한 자리를 꿰차고 싶은 욕망이 들끓는 건 아닌지 정확히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피에트로가 학교 앞에서 능동적으로 한 일들은 섬세한 감정놀이다. 그 놀이의 첫 번째는 리스트를 떠올리는 것이고, 두 번째는 다운증후군 아이를 위해 자신의 차에 시동을 거는 것이다. 영화에서 그는 몇 차례 리스트를 만드는데 첫 번째 리스트는 그동안 자신이 이용했던 항공사 이름이다. 그가 읊어대는 끝없는 항공사 이름을 들으며 지나온 그의 생활을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그는 회사의 중역으로 매우 분주하게 일한 반면 가정에 충실하진 못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가 작성한 두 번째 리스트는 자신이 거주했던 곳 주소들인데 이 리스트에서부터 아내에 관련된 내용이 등장한다. 아내와 같이 살았던 집 주소를 중얼거리다 멈칫하는 그의 모습에는 그리움이라고 하기엔 석연치 않은 착잡한 심경이 느껴진다. 이런 느낌은 이후 리스트에도 계속 이어진다. 아내에 대해 몰랐던 것들의 리스트를 작성하며 아내의 컴퓨터에 저장된 이메일을 읽으려던 그는 파일들을 삭제해버린다. 그는 아내가 동화작가와 이메일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하지만 그 이상은 밝혀내지 않는다. 이런 행동은 죽은 아내에 대한 예의로 생각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는 아내를 몰랐고 새삼스레 아내를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런 가정은 그가, 아내의 죽음이 계기가 되어 학교 앞에서 시간을 보내고는 있지만 아내를 애도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다는 추측을 하게 한다. 이런 추측들을 쌓아놓았을 때 비로소 위에서 말한 갑작스런 정사신이 자연스러운 맥락 안에 자리잡게 된다.

조용한 혼돈의 내면을 떠나…

이 추측을 뒷받침할 객관적 증거로는 비록 그가 수동적인 자세로 경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그가 나눈 대화는 거의 다 회사 합병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회사 동료들이 찾아와서 전하는 회사 소식을 듣는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회사 사정에 대해 가장 발 빠르게 알게 되며 입지는 점차 유리해진다. 정사신 외에 생뚱맞게 느껴진 또 한 장면은 회사에서 제거될 위기에 처한 친구가 찾아와 베니스 회동 이야기를 할 때 등장한다. 굳이 베니스까지 가서 이 장면을 촬영하고 영화에 삽입할 이유가 있었을까 회의하게 만드는 짧은 신이다. 소설과 달리 인물의 내면을 스치는 생각과 감정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영화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굳이 감독이 이 짧은 장면을 집어넣은 까닭이 피에트로에게 회사 합병을 둘러싼 지형도를 그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 아닐까? 영화에서 아내와 관련된 회상장면은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에게 합병 건이 차지하는 비중을 설명하는 또 다른 증거는 다운증후군 소년을 위해 매일 아침 시동을 걸었던 규칙적 일상을 깬 장면이다. 그는 스타이너가 찾아온 날 시동을 걸지 못한다. 우연한 결과지만 의미심장한 일이다. 그가 머문 태풍의 눈 주위에 휘몰아치는 태풍의 정체는 그의 욕망이다. 합병으로 인해 그가 얻거나 잃게 될 지위, 관능적이면서 자신의 거취와도 연관되어 있는 여성, 이런 태풍을 피해 그는 학교 앞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태풍의 진로를 확인하고 예측할 수 있을 때 그는 태풍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조용한 혼돈의 내면 세상에서 나와 어지럽지만 엄연한 질서가 유지되는 약육강식의 정글도 돌아가는 것이다. 그 세상은 돌이킬 수 없는 질서가 지배하는 곳이다.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