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의 또 다른 이름은 붉은 꽃, 자영이다. 전자가 백성들의 지엄한 어미라면 후자는 금기의 사랑에 애달파했던 우리와 똑 같은 여염집 여인이다. <불꽃처럼 나비처럼>은 황후로 간택되는 순간 지워지고 만 ‘불꽃’ 민자영에게 왕관이 드리운 그늘만큼의 빛을 선사한 퓨전사극이다. 일본 무사의 칼날 앞에서도 허리를 굽히지 않았던 여장부의 마지막 숨은, 익히 들었던 그 문구에 그 이름 석자를 덧붙인 다소 이례적인 고백으로 화한다. “나는 조선의 국모 민자영이다”라는. 강수연, 최명길, 이미연 등의 대를 잇는 이 차기 황후는 우연찮게도 “한자로는 다스릴 수, 사랑 애”, 수애다.
“황후도 여자잖나. 여배우도 여자고. 양면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히려 너무 좋은 기회였다. 두 캐릭터 사이의 간극이 넓지만 그건 또 종이 한장 차이여야 했다. 너무 많은 변화를 추구해도 동질성이 없어지고. 현실성도 없어지고. 그게 아니라 같은 외면, 같은 내면의 캐릭터. 김용균 감독님은 이번 역할은 여성스러워야 하는데, 내가 그걸 잘 보여줄 수 있을지가 가장 의문이었다더라. 그때가 4년 전, 드라마 <해신>이 끝났을 무렵이었다. 이미지로는 잘 맞는데, 그전까지 맡은 역할이 여성스럽지만은 않아서.”
천하가 넓다 한들 황후의 자리를 마다할 여배우가 있었을까. “거두절미”하고 황제의 여자로 등극한 수애는 그러나 ‘잘 어울린다’는 반응이 도리어 걱정스러웠다. 수줍음보다 생존본능이 앞서는 여인들에게 끌렸던 그녀는 무엇보다 자신의 이미지 안에 갇히지 않는 명성황후를 원했다. 다행히도 그녀의 명성황후는 개방이냐 쇄국이냐를 놓고 치열하게 고민하던 당대, 누구보다 먼저 초콜릿을 맛보고 담대하게 담배까지 입에 무는 모던걸이다. 허리가 잘록한 붉은 드레스 차림의 모험심 충만한 여성. 호위무사 무명은 물론 우리의 눈마저 휘둥그레하게 만드는 명성황후의 자화상을 수애의 얼굴로 스케치한 건 이토록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맞다, 감정을 내면으로 표현해야 했다. 그래서 어려운 점, 분명히 있었다. 정말 눈에 하트를 그리고 싶었다니까. (웃음) 다 주고 싶었다, 내 마음을. 그런데 절제해야 했다. 촬영 끝나고 그런 말도 했다. 에너지가 너무 많아 남았다고. 어디다 해소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민자영과 가장 비슷했던 부분은 강인함? 글쎄, 내 안에 있는 건지, 내가 그런 캐릭터를 해서 그런 건지. <나의 결혼원정기> 때부터 그랬다. 내가 추구하는 건 강한 엄마가 아닐까 싶다. 그런 캐릭터를 보면 에너지가 막 솟고, 그런 시나리오에 애착이 가는 걸 보면.”
밖으로 조선이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휘둘리는 동안 안으로 명성황후와 고종, 무명은 잔인한 삼각관계에 빠져든다. 얇은 문풍지 너머 연인의 존재를 뻔히 알면서도 남편에게 처음으로 몸을 맡겨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 질투와 사랑, 죄책감이 뒤엉킨 고종과의 동침은 생애 첫 베드신이라서보다 “셋의 감정이 중요하”기에 가장 어려운 장면이었다. 물론 엇갈린 감정의 소용돌이, 그 중심에 선 수애는 홀로 분투할 수도 있었지만 그녀의 곁엔 황후의 그림자를 자처한 무명만큼 든든한 동갑내기 조승우가 있었다. 이준익 감독과의 작업을 거친 그녀에게 영화는 더이상 “틀”이 아니었다. “자유”였다.
“낯도 가리고, 쉽게 친해지지 못하는 걸 감독님이 아셨나 보다. 영화 들어가기 전에 같이 모여 술을 마실 때도 어떻게 둘이 친해질까, 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시더라. 나는 승우씨가 무척 편했다. 동갑인데다가 동질감 같은 게 있었다. 뜨거운 사람일 것 같더라, 나처럼. 그래서 연기하는 데서도 미묘한 감정들이 잘 살았던 것 같다. 원래 본능에 충실한 편이었는데, 지금은 본능과 이성을 겸비한 배우이고 싶다. 너무 동물적이면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하나라도 놓칠까봐. 현장을 즐기는 방법을 <님은 먼곳에>를 통해서도 배우고, 승우씨를 보면서도 배웠다.”
역사서의 비극에서 빠져나온 수애의 차기작은 이윤기 감독의 <티파니에서 아침을>이다. “맥주 많이 마시는 여자 컨셉이라던데…”라고 운을 떼자 “그래서 이렇게 됐다”면서 손을 펼쳐 보였다. 무려 다섯명의 사수들이 따개 없이 병맥주 따는 법을 전수 중인데, 얼마 전 회식 자리에서 드디어 성공해 다들 환호했단다. 하긴 전쟁이 한창인 베트남까지 남편을 찾아 나선 아름답고 강한 여인이 저어할 게 뭐 있을까. 액션 연기나 팜므파탈 역할에도 관심이 있다던 수애가 “액션 하면 먼저 장쯔이가 떠오르고, 아니면 <킬 빌>의 우마 서먼?”이라고 중얼거리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맥주 뚜껑을 날리고, 남편의 뺨을 올려붙이고, 불가능한 사랑의 땀을 쓸어내리려 하던 저 열정적인 손으로 액션을 선보이면 어떨까, 어서 빨리 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