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훈 회고록]
[박중훈 스토리 18] 이렇게 화려한데 완전히 망했다고?
2009-10-02
글 : 박중훈 (영화배우)
정리 : 주성철
<세이 예스>의 부진 딛고 <찰리의 진실>로 할리우드에 진출했으나…
<찰리의 진실>의 주연을 맡은 마크 월버그와 함께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해외영화제에 거의 30군데 정도 초청을 받았는데 바쁜 와중에도 10군데 이상 참석했던 것 같다. 유럽으로는 런던영화제와 도빌아시아영화제를 갔는데 도빌에서는 대상인 에르메스상도 받고 나는 남우주연상도 받았다. 정말 기뻤다. 미국으로는 샌프란시스코영화제, 팜스프링스영화제 등을 갔는데 공교롭게도 선댄스영화제를 못 갔다. 그런데 2000년 선댄스에서 <인정사정 볼 것 없다>가 난리가 났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가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면서 당시 나에게는 일정 부분 교만한 마음도 있었음을 인정해야겠다. 배우로서 큰 고민에 부딪힌 것이, 과거의 사회파 영화를 비롯해 코미디와 액션 등 나름 다양한 영화들을 해서 ‘이제 뭘 해야 하나’ 답답해진 거다. 지금 생각하면 그냥 좋은 작품 하면 되는 건데…. 그러던 와중에 심광진 감독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 사람이 참 순진하면서도 대단한 게, 내가 일본에 가기 전 <불후의 명작>을 하자고 한 적 있는데 그때 시기가 안 좋다며 재기를 한 뒤 다음에 다시 만나자고 한 적 있다. 바보처럼 그 말을 믿고 3년을 기다려 이젠 할 수 있겠냐고 물은 거다. 그동안 뭐하고 지냈냐니까 멸치 장사를 했다고 하더라. (웃음) 당연히 영화사도 못 잡고 있는 처지였다. 사람이 참 진정성이 있고 심성이 맑은 사람이라 그 느낌대로 좋은 영화 찍어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이제껏 보여준 모습 말고 내 속에 있는 차분한 정서와도 잘 맞겠다 싶었다. 강우석 형이 나에 대한 신뢰로라도 제작하겠다고 해서 시네마서비스에서 만들어질 수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만들어지고서 영화가 착한 건 알겠지만 그 이상의 뭔가 결정적인 힘이 없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영화나 내 연기에 대한 평가, 그리고 흥행 결과 모두 전체적으로 밋밋한 수준으로 마무리됐다.

코믹한 이미지가 방해가 됐을까

다음이 바로 문제적 작품인 <세이 예스>다. 김성홍 감독님은 대학 선배이기도 하고 <투캅스> 시나리오도 썼던 분이다. 늘 범상치 않은 재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처음 황기성사단에서 제작할 때는 <휘파람>이라는 제목의 시나리오였다. 모르겠다, 내 연기에 대한 혹평을 워낙 많이 들은 영화지만, 지금껏 충무로에서 받아본 시나리오 중 가장 좋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나로서도 최선을 다해서 했는데 관객이 몰입하는 데 있어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코믹한 이미지가 크게 방해가 된 것 같다. 그게 방해가 안됐다 하더라도 나에게서 사이코 살인마를 보고 싶어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세이 예스>는 오히려 나 때문에 힘을 잃은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불후의 명작>으로 새로운 시도를 했지만 별 반향을 얻지 못했고, 그렇다고 90년대 했던 코미디를 다시 하긴 싫어서 하게 된 게 <세이 예스>였는데 역시 결과에 대한 불안은 있었다. 어느 날 집에 돌아와 보니 조너선 드미 감독에게서 연락이 와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기억을 더듬어봤다. 전에 2000년 2월이던가 <씨네21>에서 지금은 미로비젼 대표인 채희승씨가 쓴 선댄스영화제 참관기를 본 적 있는데, 그때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시사회에 조너선 드미 감독이 참석했고 이명세 감독과 함께 찍은 사진도 실려 있었다. 그런데 그가 나를 캐스팅하고 싶다고 했다. 정말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조너선 드미, 우 형사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오래전 독립영화계의 대부 로저 코먼이 픽업한 조너선 드미는 할리우드의 입지전적 감독 중 하나다. <양들의 침묵>(1991)이나 <필라델피아>(1993)는 워낙 유명하고 최근작으로 <맨츄리안 켄디데이트>(2005)와 <레이첼, 결혼하다>(2009)가 있다. 친형이 인권목사인데다 이라크전 반대 운동에도 앞장선 진보적 지식인이다. 넬슨 만델라에 관한 다큐멘터리 <만델라>(1996)를 제작했고, 지미 카터 전 대통령에 관한 다큐멘터리 <지미 카터 맨 프럼 플레인스>(2007)는 직접 연출을 맡기도 했다. 베니스영화제에서 특별 상영된 <애그러노미스트>(2003) 같은 인권 다큐멘터리는 연출과 제작은 물론 촬영까지 했던 사람이다. 그런 조너선 드미가 <찰리의 진실> 프리 프로덕션차 프랑스 파리에 머물던 중이었다. 나 역시 바로 파리로 날아갔다. 호텔 로비에서 저 멀리 나를 보더니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우 형사’ 걸음으로 저벅저벅 걸어와 어린아이처럼 깡충깡충 뛰면서 나를 껴안으며 반가워했다. 그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웃음)

먼저 그가 어떻게 나를 알게 됐는가 하니, 선댄스영화제의 실질적 수장인 로버트 레드퍼드와 친해서 공식 스피치를 하러 선댄스를 찾았는데, 끝난 다음 집으로 돌아가려다 우연히 ‘코리안 액션 무비’라는 팸플릿을 봤다고 하더라. 한국에 대해서는 ‘핵’말고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고 또 상영시각도 자정이라 피곤하니까 그냥 돌아가려 했는데, 함께 있던 프로듀서 피터 새라프가 재밌을 거 같다며 함께 보자고 했단다. <찰리의 진실>을 함께 준비하고 있던 피터 새라프는 나중에 <어댑테이션>(2002)과 <미스 리틀 선샤인>(2006) 등을 제작한 유능한 할리우드 프로듀서다. 다행스럽게도 둘 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 매료됐고 나 또한 점찍었다고 했다. 파리에서 만난 날, 조너선 드미는 과거 캐리 그랜트가 주연한 <샤레이드>(1963)를 리메이크하는데 거기서 제임스 코번이 맡았던 역할을 제안했다. 주연배우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윌 스미스라고 했다. 그런데 미국영화배우협회(SAG)가 파업을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그가 출연할지는 미지수였다. 당시 윌 스미스는 <알리>를 찍고 있는 상태라 5월에야 합류할 수 있는데 그때부터 촬영을 시작하게 되면 파업을 고려할 때 너무 늦은 스케줄이라, 최종적으로는 마크 월버그로 주인공이 바뀌었다.

개런티는 줘도 계약서는 안 주는 이유

그때가 <세이 예스> 막바지 촬영 때라 아주 숨가쁜 일정이었다. 2000년 12월 파리에서 처음 만나 출연을 결정하고 2001년 3월 다시 파리로 가서 5개월여 촬영을 했다. 그런데 <세이 예스> 촬영이 파리로 떠나는 날 새벽까지 계속됐다. 밤새 찍고 아침에 귀가해 짐싸서 바로 파리로 날아가느라 시나리오를 다시 꼼꼼히 읽어볼 시간도 없었다.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의상과 헤어를 체크하고, 다음날 바로 시나리오에도 없던 파리 뒷골목을 배회하는 장면을 나만 촬영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지나고 생각해보니, 내가 영어에는 문제없는지, 그래서 촬영 자체에 지장이 없는지 ‘간’을 본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한 건 계약도 하고 개런티도 받았는데 정작 계약서 자체를 안 써주는 거다. <아메리칸 드래곤> 때는 계약서를 다 쓰고 했으니까 의아하게 생각했다. 나중에 알게 됐는데, 재밌는 게 미국에서는 스타급 배우들은 개봉 직전에 계약서에 사인한다고 하더라. 촬영 기간 중 많은 제약이 있기 때문에 미리 사인을 하면 자기가 다 뒤집어쓸까봐 미룬다고 했다. 물론 영화사에서는 빨리 해주길 바란다. 나 역시 촬영이 끝날 때쯤 사인을 했는데 그건 또 다른 의미였다. 나처럼 상업적으로 힘이 없고 검증이 안된 배우들은 언제든지 해고하기 위해서 계약서를 안 써주는 거다. 마크 월버그, 팀 로빈스 등이 출연하는 제작비가 1억달러가 넘는 영화였고 거기서 또 네 번째 비중으로 내가 나오는 거니 그렇게 여러 방식으로 테스트한 것 같다.

테스트 촬영 다음날 전체 리딩을 할 때 마크 월버그와 팀 로빈스 등을 다 봤다. <아메리칸 드래곤>의 경험도 있고 해서 할리우드 배우를 본다고 떨리는 건 없었지만 잘해야겠다는 마음, 그리고 낯선 환경에 정말 긴장했다. 영어 다이얼로크 코치가 옆에 있지만 처음에는 시나리오대로 읽어내기 바빴다. 감정 처리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들이 보기에 참 한심했을 거다. 첫 리딩이 끝나고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그 수많은 따가운 눈총들이 지금도 기억난다. 한국에서 데려간 내 매니저 역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영어가 원활하지 못했고 통역도 없었다. 둘이서 영화사에서 제공한 파리의 한 아파트에서 3월부터 7월까지 생활했는데, 영화사에서는 가족들을 고려해 방 5개에 월세가 만달러가 넘는 최고급 아파트를 제공해줬지만, 나중에 가족들이 와 합류하기 전까지는 둘이 있기에 너무 황량했다. 게다가 모든 것이 낯설었고 날씨마저 늦겨울의 음습한 파리 날씨라 적응하기가 정말 힘들었다. 아니, 힘든 것을 넘어 너무 외로웠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다이얼로그 코치랑 연습하면서 최선을 다했다. 촬영 막바지에 가족들이 파리로 왔는데, 조너선 드미가 자기 집(그 역시 파리에서 빌린 집)으로 우리 가족을 초청해서 식사를 대접했다. 수고 많았다고 어깨를 두드려주더니 “이번에 넌 홈런을 쳤어”라고 얘기해줬다. 좋아서 미칠 것 같은 기분이란 그런 걸 말하는 걸 거다.

<찰리의 진실>은 기분 좋은 경험으로 남아 있다. 촬영현장으로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이 놀러오기도 해서 함께 점심 먹으며 수다를 떨고, 당시 주윤발 등 아시아권 배우들에 대한 관심이 높을 때라 워너브러더스사의 사장이 현장을 찾은 김에 나를 개별 인터뷰하기도 했다. 촬영 막바지인 7월에는 마크 월버그가 생일이어서 샹젤리제에 있는 클럽 하나를 빌려서 파티를 열었는데 나오미 캠벨과 축구선수 지단 등 초청받아 온 사람들이 정말 화려했다. <본 아이덴티티> 촬영차 파리에 와 있던 맷 데이먼도 있었는데 둘 다 보스턴 출신이라 친하더라. 그렇게 들뜬 기분으로 작품을 끝내면서 또 하나 기쁜 제안이 있었다. 앞에서 말했던 피터 새라프가 정식으로 나와 다음 작품을 하자는 거다. 그게 바로 <비빔밥>이라는 작품으로 동양 남자와 서양 여자의 연애담이었다. 아, 이렇게 평소 내가 꿈에 그리던 할리우드에 안착하는 건가 하는 생각까지 들면서 정말 꿈에 부풀어 있었다.

장동건에게 초청장 대신 주차 티켓 준 사연

그런 상태다보니 재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할리우드라는 생각이 들어서 다른 좋은 한국영화들의 출연을 어쩔 수 없이 많이 거절하고 지냈다. 그 사이 <찰리의 진실>이 할리우드 코닥 극장에서 프리미어와 레드카펫 행사를 가졌고 나 또한 초청받아 갔다. 그때 우연히 LA에 있던 장동건과 신현준도 그곳에 들렀는데 10장 정도 내 이름 ‘Park’로 받아둔 티켓을 건네줬다. 당연히 내 이름이 ‘박’이니까 그게 초대장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주차 파킹 티켓이었다. (웃음) 정말 창피했고 또한 많이 웃었다. 누구 하나 경험했던 일도 아니고 조언해주는 사람도 없으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신인배우나 마찬가지였던 거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찰리의 진실>이 2002년 10월 전세계 개봉을 했는데 완전히 망했다는 거다. 조너선 드미라는 명감독에 화려한 배우들, 그 정도 규모의 영화면 당연히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감히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2001년 여름 촬영 종료 뒤 다른 한국영화들을 다 거절했으니 본의 아니게 1년 반 정도를 또 쉬게 됐다. <비빔밥>의 진척 상황을 기다리긴 했지만 그게 또 속 시원히 풀려가는 것도 아니라 또다시 답답한 시간들이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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