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곡의 <고갈>을 보고 이 영화가 과연 혁신적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이 영화의 보도자료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영화제 집행위원장이 “<고갈>을 보고 영화에 미래가 있다고 생각했다. <고갈>은 영화가 아니다. <고갈>은 영화폭탄이다”라고 했다는 호평이 자랑스레 소개돼 있다. 뉴호라이즌영화제에서는 이 영화가 ‘관습에 대항하는 호러’라는 평이 있었다고도 전하고 있다. 마케팅 수사로 쓰이는 허풍보다 더한 이 상찬에는 전혀 공감이 가지 않는다. 아울러 이 영화를 아름다운 충격 운운하며 ‘뷰티풀 호러’라고 선전하는 포스터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나는 이 영화가 매우 관습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아무리 반어적인 의미라고 하더라도 ‘아름다운’이라는 형용사를 쓰는 것은 정직하지 못한 전략이라고 본다.
군데군데 잔혹극의 이미지를 끼워넣은 구성
<씨네21> 기자 정한석은 이 영화가 새롭지 않다는 것을 다소 완곡한 표현으로 지적했다. “이야기의 강력함으로 잔혹극을 만드는 영화는 도처에 허다하다. 이 점에서는 <고갈>이 특별하지 않다.” 대신 그는 감독의 말을 빌려 ‘불안의 이미지를 캐스팅한’ 이 영화가 불쾌의 실체를 마주보고자 나름의 방식으로 탐구하는 영화라고 했다. “<고갈>에 쟁점이 없다고 말할 순 없다.… 이번 영화 역시 표현의 수위가 아니라 표현된 이미지의 전략이라는 측면에서 쟁점이 남을 듯이 보인다. 일례로 어느 면에서는 도전적인 사고를 과시하는데 때로는 조악한 결론을 미리 내정하고 있다.” ‘기분이 나빠져도 질문과 논쟁거리를 안고 더 남아 있고 싶은 사람들’이 이 영화의 관객이 될 것이라고, 정한석은 영화 소개글 특유의 관대한 권유로 결론을 내린다.
앞서 말한 대로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의 불쾌감이 그렇게 강력한 여진을 남겨주진 않았다. 어딘가 모자란 듯한 말 못하는 여자와 그녀를 창녀로 부려먹는 남자의 삶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별다른 내용이 없다. 황폐한 공장지대에서 남녀는 서로 티격태격 싸우며 놀고 웅덩이에 돌을 던지거나 ‘여자있음’이라고 쓴 전단지를 붙이는 것으로 하루를 보낸다. 밤에는 기거하는 모텔에 찾아오는 고객들, 주로 이주민 노동자들을 상대로 매춘영업을 한다. 여자가 고객의 몸을 받는 동안 남자는 TV로 포르노를 본다. 영화 중반에 중국음식점 배달원 여자가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약간 탄력을 받긴 하지만 대체로 이런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8mm필름으로 찍어 블로업했다는 이미지는 확실히 인상적이기는 하다. 감독 말대로 불안의 이미지를 캐스팅한 것 같다.
단편이나 중편이라면 모르겠지만 이런 내용으로 128분을 보면서 군데군데 잔혹극의 이미지를 끼워넣은 구성이라면 생각이 달라진다. 이런 커플이라면 이렇게 될 것이라는 예상대로 줄거리가 펼쳐진다. 중국음식점 배달원이 등장했을 때 어떻게 이야기에 끼어드는가 궁금했지만 클라이맥스에 그녀가 벌이는 잔혹극은 관객의 예상을 억지로 비틀어 공격하기 위한 위악으로 비친다. 그 위악은 상투적이며 주인공 남녀간의 주고받는 관계에서도 그런 게 느껴진다. 현실의 상투형이 영화 속의 상투형으로 옮겨져온 것이라는 따위의 주장도 이제는 식상하다. 첫 장면과 대구를 이루며 마지막 장면에 벌어지는 경악스런 이미지도 얼마간 예상할 수 있었다. 이런 것들에 대해 한없이 감상을 쓸 수도 있다. 불모의 땅에서 살아가는 불모의 커플, 생산하는 대신 소진하는 육체들, 마모된 육체를 통해 거듭 확인하는 섹슈얼리티에의 공포, 짐승처럼 살아가야 하는 유일한 표식으로서의 식욕, 자기들의 육체를 통해 뭔가 생식한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 퇴행한 세상에서 퇴행적인 놀이로써의 싸움박질을 즐기며 확인하는 생의 희미한 감각 따위를 거론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남다은은 흥미롭게도 이 영화가 ‘타락을 타락으로 의미화하는 체계나 질서를 소멸시키는 것’이 이 영화의 독자성이라고 본다. 멋진 표현이지만 ‘저항과 구원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의미를 상실해서 끔찍해진 세계의 순간’이라고 그가 쓸 때 표현의 인플레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종의 실어증의 예술로서 이것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남는 여진의 덩어리는 크지 않다.
<고갈>은 실어증의 예술이자 자기 도취의 예술이며 그것들을 품고 침잠한다기보다는 관객에게 우악스럽게 떠먹이려는 잔혹극의 외피를 두르고 있다. 나는 이것들이 서로 공존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뭔가 으쓱거리는 절망의 분위기가 나기 때문이다. 공장지대에서 서서히 미쳐가는 여인의 정신을 그린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붉은 사막>은 물론이고 비교적 근작인, 재현의 영점지대를 조준한 레오스 카락스의 <폴라 X>와 같은 영화가 나온 지도 이미 한참 지났다. 화가의 태도로 특정한 이미지를 카메라로 그리면서 관객에게 그 정서와 의미가 흡입될 때까지 지속시키는 것이 안토니오니의 미학이다. 거기선 고통조차도 아름다움으로 채색된다. 여주인공이 서서히 미쳐가는 것과는 별개로 안토니오니는 공장의 연기가 아름다웠다고 훗날 말했다. 아름답다고 느끼는 풍경과 그 풍경이 존재하는 환경에서 미쳐가는 것이 포개질 수 있는 세상에 대해 안토니오니가 보여줄 때 그 중의성은 납득될 수 있었다.
속이 다 드러나 보이는 미학적 제스처들
그런 것도 이제는 낡은 방식이다. <고갈>의 김곡 감독은 거기에서 좀더 나아가는 듯한 태도를 취하며 남다은의 말대로 풍경과 대상의 표현 불능성의 지대에까지 도달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심하게 말해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짐승과 같은 존재들이다. 그게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는 것이다. 때로 그들은 아름답게 보이기도 한다. 회색 풍경도 마찬가지다. 이쯤해서 일관되게 밀고나갔다면 그런 지점이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 성취가 얼마나 받아들이기에 굉장한 것인가라는 것은 차치하고 말이다.
정작 문제는 무심한 척하면서 영화는 속이 다 드러나 보이는 미학적 제스처를 심하게 쓴다는 것이다. 틀림없이 알레고리가 아니라고 하겠지만 뭔가 있는 체를 거리낌없이 드러낸다. 이를테면, 여자에게 찾아와 성교하려는 남자들은 어김없이 방독면을 쓰고 행위를 한다. 남녀 주인공은 살아가는 몸짓으로 짐승처럼 싸운다. 그리고 두 여자는 자신들의 육체를, 자신들의 욕망에 대한 방어적인 몸짓으로 훼손한다. 성기를 찌르고 유두를 자른다. 여자는 꺼억꺼억 트림하고 토악질을 한다 등등. 잔혹극적 요소로 도입된 이런 표현들이 영화의 형식에 깊이 삼투돼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포착된 현실이라기보다는 자극적으로 도입된 장치들이다. 그런데 외형적인 자극 이상은 주지 못한다. 이제 찌를 테니 준비하라는 식으로 예견된 장치들이다. 이래서는 비관습적인 도발이라고 하기 곤란하다.
나는 이 영화의 자연주의적 접근을 문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적 쇼크의 내용과 형식을 이루는 것들이 서로 모순되는 지점에서 골절상태로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의심하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재현의 불능지점까지 가닿으려는 듯 보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재현의 자명성을 드러내는 것들이 어색하다. 전자의 경우에는 앞서 인용한 두 평자의 말에 부분적으로 동의할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라면 전자의 미학적 태도를 뒤엎는 것으로, 모든 걸 헛되게 만든다고 말하고 싶다. 쇼크의 배열이 예상 가능한 관습적 수준이었으며 영화의 미래이긴커녕 과거로부터 더 배울 것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이 영화에 대해 논쟁할 게 있다면 바로 그 지점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새로운 것을 발명하기는 어렵고 솔직해지기는 더 어렵다. 최소한 솔직해지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