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립주택 <파라다이스 빌라>는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속은 그렇지가 않다. 이웃집 여자와 불륜에 빠진 펀드 매니저, 어른들에게 몸을 파는 소녀, 이웃에게 정수기를 팔기 위해 옥상 물탱크에 흙을 퍼넣는 주부, 몰래카메라를 곳곳에 설치하고 테이프를 파는 학생들…. 서로 이웃에게 친절한 척하지만 그 안에는 선을 가장한 공격성이 도사리고 있다. 2002년 월드컵 축구 한일전이 생중계되는 날, 이 빌라에 이방인이 들어온다. 온라인 게임에서 무기를 도둑맞고 분노에 사로잡힌 재수생이 무기를 훔쳐간 다른 학생을 찾아왔다가 살인을 저지른다. 불륜을 은폐하려는, 물탱크에 흙을 넣으려는, 몰래카메라를 감추려는, 빌라 구성원 저마다의 음험한 계산이 도화선이 돼 한번의 살인이 연쇄살인으로 이어진다. 축구를 보며 내지르는 고함소리로 빌라가 떠나갈 듯한 가운데 가운데 7명이 죽어나간다.
7일 개봉하는 박종원(43) 감독의 5번째 영화 <파라다이스 빌라>는 전작 <송어> 처럼 소시민 사회에 대한 음울한 소묘다. 다만 소시민의 나약하고 비열한 모습을 클로스업했던 <송어>와 달리 이번에는 그 사회에 잠복해 있는 광기에 주목한다. “온라인 세상이 커지면서 사회는 더 개인화하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도 나온다. 사이버머니가 실제 화폐의 기능을 하고 온라인에서 오프라인 같은 일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 같은 일이 벌어진다. 그걸 다루려 했다. 월드컵이 열리면 마치 나라가 곧 바뀔 것 같은 우리사회의 이상열기 내지 광기는 인터넷과 맞아떨어지는 면이 있다.”
<파라다이스…>는 공포스릴러의 장치를 빌어 디테일들이 입체화된, 짜임새있는 연출을 보이지만 인간에게 차가운 태도는 <송어>와 궤를 같이 한다. 도무지 구제불능일 것 같은 인간 군상의 모습을 관객이 불편해할 때까지 보여주는 뚝심이 놀랍지만, 그게 너무 적나라하고 위악적이어서 그들을 구제할 방법으로 또다른 권력적 힘을 기대하는 건 아닌지 의심을 살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영원한 제국>을 통해 권력과 사회의 부조리함을 다루고 나서 개인적인 얘기를 하고 싶어졌다. 사람들이 세기말을 얘기하는데 본질을 말하지 않고 그림자만 지적하는 것 같았다. 나는 나 자신을 포함해 우리가 이것 밖에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 아름답지 못한 본질을 껴안고 가야 하는 게 아닌지. 권력적 힘 같은 걸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영화를 찍을 때 힘들지 않았을까, 앞으로도 같은 길을 갈 것인가. “힘들다. 카메라 앵글을 다듬고 화면을 잘 잡아도 얘기의 방향이 좋은 게 아니니까…. 앞으로는 다른 걸 계획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통일에 관심이 많아졌고, 또 6·25에 참전했던 아버님이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 더 늦기 전에 6·25에 대한 영화를 만들려고 한다. 다시 역사적인 이야기로 돌아오는 거고, 스케일이 큰 영화여서 개인적인 시각이 전면에 나서지 않을 것이다. 또 나이가 드는데 차갑고 냉소적인 시선이 더 강해지긴 어렵지 않겠는가.” “나이 들면서 시각이 유순해지는 감독이 많은데, 바람직하지 않은 것 아닌가”라는 질문에 그는 “폭이 넓어진다는 뜻이지 유순해진다는 건 아니다, 자기만의 문제의식이 없다면 이미 죽은 감독과 마찬가지”라고 대답했다.
임범 기자isman@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js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