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봄이다. 중국 쓰촨의 청두. 두보초당에서 가이드로 일하는 메이는 유학 시절 친구였던 한국 남자 동하(정우성)와 우연히 만난다. 부서지는 햇살과 싱싱한 대나무 숲, 공기에 홍조를 더하는 가랑비 사이로 과거 무르익지 못한 로맨스의 풋내가 다시 피어오른다. 메이는 <호우시절>을 포함해 허진호 감독의 멜로드라마 사상 행복과 가장 가까운 감정에 빠져드는 여인이다. 정우성의 새로운 연인으로 이 해사한 5월의 사랑을 연기한 이는 중국 배우 고원원. 최근 루추안 감독의 전쟁서사극 <난징! 난징!>으로 새롭게 주목받은 대륙의 떠오르는 별이다. 중국 문화에 관심이 많다면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왕 샤오솨이 감독의 <상하이 드림>부터 <북경자전거>, 성룡과 협연한 <BB프로젝트> 등은 물론 다수의 드라마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 그 얼굴을 분명 기억할 것이다. <호우시절> 언론시사를 하루 앞둔 9월21일, 한국을 찾은 고원원을 효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좋은 비는 내릴 때를 알고 있다’는 두보 시의 구절처럼 그날따라 오랜만에 비가 내렸다.
-캐스팅 제의를 수락한 이유는. 허진호 감독의 영화들을 좋아한다고 해도 직접 출연하는 건 다른 일일 텐데.
=어떤 감독을 더 잘 이해하려면 그와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기보다 그 사람의 작품을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허진호 감독님을 만나기 전에 그의 작품을 보면서 내가 이분을 굉장히 많이 이해하고 있구나 싶더라. 그런 사람과 함께 일한다니 걱정이 없었다.
-허진호 감독은 현장 상황을 통해 영화의 방향을 잡는 연출가로 알려져 있다. 다소 즉흥적인 그의 연출 스타일이 생소하지 않았나.
=현장의 즉흥성엔 이미 익숙하다. (웃음) 예를 들어 전작인 <난징! 난징!> 역시 시나리오가 없다고 생각하고 찍었다. 두꺼운 스토리보드가 있었는데, 현장에서 다 바뀌었다. 정신이 붕괴될 정도로 힘들었다. (웃음) <호우시절>은 그에 비해 너무나 편안한 상황이었다.
-모국어가 아니라 영어로 연기해야 했다. 현장에서 바뀌는 대사가 워낙 많아 애를 먹었을 것 같다.
=정말 난제였다. 영어 연기는 처음이고. 초반엔 걱정을 많이 했는데, 그렇게 큰 문제라면 오히려 생각 안 하는 게 편할 것 같아서 나중엔 그런 생각 자체를 버렸다. 감정에 충실하자, 언어에 너무 신경쓰지 말자, 라고 생각했다. 감독님도 그러시더라. 대사가 아니라 감정 표현이 중요하다고. 초반엔 영어 대사가 머릿속을 맴돌아서 거의 연기를 할 수 없었다. 컷하고 나면 헤드폰을 끼고 영어 대사를 듣는 선생님들 표정만 살피고.
-가장 NG가 많이 났다거나 어려웠던 장면은.
=키스신. (웃음) 호텔방에서 키스하는 장면을 가장 오래 찍었다. 감독님은 관객이 이 여자가 굉장히 오랜만에 남자와 입술이 닿았구나 느낄 정도로 격정적인 마음이 드러나야 한다고 하시더라. 거의 하루 종일 그 장면을 찍었는데, 다음날 감독님이 햇빛을 보시더니 갑자기 이 빛이 너무 좋다, 다시 한번 가보자, 그래서 또 찍고.
-정우성의 출연작 중 <내 머리 속의 지우개>를 가장 좋아한다고 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가.
=여자라면 누구나 그런 사랑 원하지 않을까. (웃음) 주인공들이 현실에서 맞닥뜨리기 어려운 꿈 같은 사랑을 하니까.
-<상하이 드림> <난징! 난징!>에서 어두운 시대에도 의지를 가진 인물들을 연기했다. 다른 전작에서도 그리 연약하지만은 않은 캐릭터를 많은 듯 한데.
=중국 관객은 고원원을 정반대의 이미지로 기억한다. (웃음) 좀 단순하고, 생활적인. <상하이 드림>의 여주인공은 영화의 분위기 때문에 그렇게 느낄 수도 있지만 사실 강인하거나 센 여자는 아니다. <난징! 난징!>의 캐릭터만큼은 독립적이고, 자기 생각이 정확하지만. 얼마 전에 별자리 성격을 봤는데, 천칭자리 여자 안에는 남자가 자리잡고 있다더라. 외모만 보고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연약한 역할을 많이 주는데 (웃음), 스스로는 남성적인 성향의 강한 여자라고 느낀다. 내 실제 성격을 정확히 말해줘서 기쁘다.
-<난징! 난징!>이 중국에서 큰 반향을 얻었다고 들었다. 배우 경력에서도 터닝 포인트가 될 만한 작품이 아닐까 싶은데.
=왕샤오솨이 감독 이후 이만큼 나를 잘 표현해주는 분을 만난 적이 없다. 루추안 감독님과 만난 이후로 모든 게 다 깨졌다. 처음에 나는 감독님한테 굉장히 부정적인 사람이었다. 뭔가를 할 수 없다고만 하는. 그런데 감독님은 계속 그걸 깨려고 하시더라. 그전까진 순탄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면 되니까. <난징! 난징!>으로 내게도 이런 모습이 있구나, 많이 느꼈다. 배우로서 굉장히 중요하고 의미있는 작업이었다.
-<호우시절>의 시간적 배경은 봄이다. 메이라는 이름 역시 영어로 5월을 뜻한다. 혹시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뭔가. 봄인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은 여름이 오기 직전이다. 여름을 너무 싫어한다. (웃음) 식물에서 여름의 향기가 나기 시작하는 딱 그 시기가 좋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