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회 야심차게 발표했던 ‘그래프로 보는 영화’에 비난이 폭주했다. 시대를 앞서가는 나의 실험정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원고 분량을 줄이려는 얄팍한 속셈이 빚어낸 결과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았는데, 다른 분들이야 뭐 그렇다고 치더라도 함께 연재를 하는 연수군마저 그런 오해를 한다는 데 심한 모멸감을 느끼는 바다. 그래프 몇개 넣는다고 원고 분량이 줄어들지 않는다. 게다가 난 늘 지면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경태 편집장님! 이 꼭지 4페이지로 늘려주시면 안될까요!). 오해받는 김에 이번에도 그래프나 그려야겠다. 연수군의 지적을 듣고 나니 예전에 그렸던 그래프가 떠올랐다. 할 일 없던 시절 방바닥에 멍하니 누워서 ‘인간의 삶을 그래프로 그린다면 어떤 모습일까’라는 생각을 하다가 그려본 것이었는데, 내가 붙인 공식 이름은 ‘人生史 모기향’이다.
A는 인간이 태어난 지점이다. 연수군의 지적이 이 그래프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연수군은 ‘한 바퀴를 돌고 나면 같은 자리로 돌아오지만 그 자리는 예전에 내가 서 있던 자리보다는 조금 더 위쪽에 있게 되는 그런 길’이라고 표현했는데, 나는 ‘같은 자리로 돌아오지만 예전보다 조금 넓어진 곳’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다. 우리의 삶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일 뿐이다. 같은 자리를 맴돌긴 하지만 그 자리는 조금씩 넓어진다. 많이 배우고 익히는 사람은 큰 원을 그릴 것이다. 소극적이고 폐쇄적인 사람은 더 적고 촘촘한 원을 그릴 것이다. 어떤 게 더 좋고 나쁜 건 없다. 넓은 모기향과 좁은 모기향은 삶의 취향일 뿐이다. B는 인간이 죽는 지점이다. A와 B를 잇는 점선은 선택사항이다. 만약 윤회를 믿는다면 A와 B를 잇는 점선은 실선이 될 것이다. B에서 A로 돌아와 새로운 모기향을 만들어낼 것이다. 혹은 B 지점에서 새로운 모기향이 시작될 것이다. 나는 윤회를 믿지 않는다. 내세도 믿지 않는다. 내가 아는 B는 허공에서 조용히 사라진다. 인간의 소멸. 아, 아등바등 살아봤자 인생사 모기향이다.
쓴맛 제대로 못본 내 피는 너무 달구나
연수군은 지난 15년 동안 어떻게 하면 소설을 잘 쓸 수 있을까 고민하다 그런 심오한 결론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나는 지난 15년 동안 어떻게 하면 삶의 비밀을 한장의 그림 혹은 그래프로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됐다. 연수군은 그렇게 오랫동안 소설에 대해 고민하면서 수많은 소설책을 출간했지만 나는 15년 동안 연구해서 얻은 게 고작 모기향 모양의 그래프뿐이니, 파릇파릇하고 단단하던 녹색의 모기향은 어느덧 하얗게 부서지는 재로 변하였고, 내 나이 어느덧 마흔이니, 아, 정말 인생사 모기향이로다.
평생 한 가지 일에 매달리다 보면 깨달음을 얻는다는 말이 있는데, 나는 그 말을 믿는 편이다. 사람의 흔적이 거의 없는 첩첩산중의 마을에서 평생 바깥 구경을 하지 않고 농사를 지은 사람이 죽기 직전에 얻은 깨달음이나 서울의 도시 한복판에서 누군가에게 속고, 때로는 누군가를 속이고, 부자가 되었다가 다시 전 재산을 날렸다가 다섯번쯤 자살을 시도한 다음 결국 성공하고야 만 사람이 죽기 직전에 얻은 깨달음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 역시 이 모기향 그림을 더욱 발전시켜 죽기 직전까지 그리다보면 깨달음까지는 아니더라도 모기에게 더이상 물리지 않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그랬으면 좋겠다. 아직까지 세상의 쓴맛을 제대로 보지 못하여 내 피는 너무 달다.
셰인 액커의 영화 <9: 나인>(<이하 <9>)에도 평생 하나의 그림을 계속 그려대는 인물이 등장한다. 아니, 인물은 아니다. 한 과학자가 만들어낸 생명체다. 생명체의 수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모두 아홉이며 그중 미친 듯 그림을 그려대는 것은 ‘6’인데, ‘6’이 그리는 그림의 정체는 세계를 파멸하는 도구이기도 하고 세계를 구원하는 도구이기도 한다. 역시 한 가지 일에 집중하다보면 이렇게 세계의 미래까지 예측하는 능력을 얻게 되는 모양이다. 영화 속 생명체들은 운동선수들처럼 등번호를 달고 다니는데, 영화가 끝날 때쯤 숫자의 비밀을 (내 맘대로) 깨닫고 말았다. 영화 속 생명체들의 숫자는 인간을 9가지 유형으로 구분했던 에니어그램의 숫자였다(<씨네21> 714호 참조). 각 유형의 특징이 9명의 생명체들에게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매력적인 이야기란 균열에서 시작하는 것
1번은 매사에 완벽을 기하는 사람이어서 영화 속에서도 섣부른 모험은 하지 않는다. 2번은 남을 돕고자 하는 사람이어서 9번을 도와주러 나가며, 3번은 성취하는 사람이고 4번은 호기심이 많아서 영화에서 함께 쌍둥이 학자로 등장한다. 5번은 사려 깊고 관찰력이 뛰어나 경비를 서거나 9번의 파트너가 되며, 6번은 공동체에 헌신하기 때문에 세계를 구원하는 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7번은 밝고 명랑하여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8번은 강한 자이기 때문에 공동체를 지키는 역할을 맡고, 9번은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므로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애쓴다(이렇게 1번부터 9번까지 쭉 써놓은 것을 두고 또 연수군은 원고 분량을 줄일 속셈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아무리 봐도 에니어그램의 유형별 특징과 캐릭터의 성격이 똑같다. 이 영화는 장편 이전에 단편으로 만들어졌는데 9명의 생명체가 원을 이루며 서 있는 모습은 에니어그램의 그림과 완벽하게 똑같다. <9>의 한계가 딱 거기까지다.
매력적인 이야기란 균열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1번부터 9번까지의 인물이 둥그런 원을 그리고 평형상태를 이루고 있을 때가 아니라 번호와 번호 사이 어딘가에 흠집이 나고 구멍이 뚫리고 뭔가 줄줄 새고 있을 때 매력적인 이야기가 생겨날 수 있다. 영화 <9>은 모범생 같은 영화다. 영화 <9>은 동그라미 같은 영화다. 15년 동안 삶의 비밀을 연구하다보니 닫힌 동그라미보다는 불완전하지만 바깥으로 뻗어나가는 모기향 같은 형태에 훨씬 큰 매력을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