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과 안개> Night and Fog
허안화 | 홍콩 | 2009년 | 122분 | 아시아영화의 창
‘두기봉 특별전’을 통해서만 임달화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허안화의 ‘천수위’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인 <밤과 안개>에서도 그의 정신분열적인 연기를 볼 수 있다. 전편인 <천수위의 낮과 밤>은 올해 홍콩금상장영화제에서 최우수감독상(허안화), 여우주연상(포기정), 여우조연상(진려운)을 수상하며 허안화의 명성을 다시금 확인시켜줬는데, 속편인 <천수위의 밤과 안개>(원제)는 1편과 무관한 내용으로 시작한다. 중국에서 온 웡히우링(장정초)과 리삼(임달화) 부부는 홍콩의 재개발 지역인 천수위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살고 있다. 의처증이 심한 리삼은 사사건건 아내를 들볶고 때린다. 참다 못 한 웡히우링은 결국 두 딸과 여성복지시설에 몸을 의탁하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찾아와서 마치 다른 사람처럼 금방 사과하며 마음을 고쳐먹은 듯하다가도 발작적으로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 홍콩 남자와 사랑에 빠져 홍콩에서의 아름다운 날을 그리며 건너왔건만 팍팍한 일상만이 그녀를 옥죄어온다.
이동승 감독의 <문도>(2007)에서 삶의 나락으로 떨어진 마약중독자 연기를 펼쳤던 장정초가 이번에도 임달화 못지않은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천수위의 낮과 밤>이 두 여자의 애틋한 우정을 그렸다면 <밤과 안개>는 한 가족의 끔찍한 파멸의 드라마다. 영화는 그들의 비극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나를 거슬러 올라간다. 천수위 지역은 최근 유국창의 <위성> 등 홍콩영화계의 새로운 무대로 자주 등장하고 있다. 관광 책자에 소개된 습지공원만 있는 게 아니라 마치 어린 갱들이 날뛰던 80년대 홍콩 누아르의 몽콕 지역처럼 그려지기도 하는데, <밤과 안개>는 홍콩에 정착하고자 했던 한 중국 대륙 여인의 슬픈 꿈을 따라간다.
홍콩 남자와 중국 여자, 어느덧 홍콩과 중국이 하나가 됐다지만 영화 속에서 그 두 공간은 철저히 분리돼 있다. 여전히 그들 사이에는 북경어와 광동어의 차이만큼이나 높은 벽이 자리하고 있다. 천수위 지역은 그러한 중국과의 관계, 홍콩의 정체성 등에 대한 모순이 집약된 곳이다. <천수위의 낮과 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허안화 감독 특유의 사회파 감독으로서의 날카로운 비판적 시선이 살아있다. 중국 처가의 집도 고쳐주고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던 임달화가 놀고먹는 백수가 된 뒤 마치 <팔선반점의 인육만두>의 황추생처럼 사이코로 변해가는 모습은, 이 두 사람이 현재 두기봉 영화의 멋진 남자들이라는 점에서 묘한 비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