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연식 감독은 지난 2005년, 자신의 첫 번째 장편영화인 <좋은 배우>로 부산영화제를 찾았다. 연기의 본질에 대한 고민을 담은 이 영화는 175분이란 긴 상영시간이 무색하게 치밀한 연출과 구성으로 호평을 받았다. 좋은 배우의 길을 모르는 영화 속 배우들은 자신의 불안을 방향 없는 행동으로 발산한다. 결국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 온갖 위악을 부렸던 배우들의 깨달음은 체념이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게 편해요. 어떤 인생을 살든 버리는 게 있는 거죠.” 우연 때문에 인생을 즐기는 사람인 척 했던 그들은 사실 우연으로 가득 찬 인생을 두려워했다. 신연식 감독의 상업영화 데뷔작인 <페어러브>는 <좋은 배우>의 마지막 체념에서 다시 시작한다. 이상의 욕망을 체념하며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살던 50대의 남자에게 사랑이란 우연히 찾아온다. <페어러브>는 이 남자의 성장담을 유쾌한 화법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바티칸 교황청 사진사의 삶에서 출발한 영화
<페어러브>의 모티브는 바티칸 교황청의 사진사였다. 대를 이어 교황의 삶을 담아온 그에게 신연식 감독은 “자기의 삶을 살지만, 다른 사람의 세상에 갇혀 있는” 남자의 모습을 봤다. <페어러브>의 형만(안성기) 또한 박제된 남자다. 작업실에 놓인 침대와 작업대만을 오가며 살던 어느 날, 8년 전 사기를 치고 도망간 친구가 암으로 죽으며 딸 남은(이하나)을 돌봐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아버지를 읽고, 키우던 고양이마저 죽은 남은은 지금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여자다. 조카와 삼촌 같은 사이로 만난 이들은 점점 자신의 사랑을 합리화시키려 사랑의 정의를 찾아 나선다. 그러나 결국 우연은 두려움을 드러낸다. 매사 제 역할에 충실한 부품처럼 살던 형만은 순식간에 엇도는 부품이 되어버린다. 작업실을 드나들던 남은은 형만까지 밖으로 끄집어내려든다. 이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페어러브>는 “뭐가 돼도 50 대 50”이라고 답한다.
올해 서른네 살인 신연식 감독은 지난해 결혼식을 올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한 여자가 아내였다. 남들에 비해 뒤늦게 찾아온 사랑은 뜻밖의 변화를 가져왔다. “스무 살 때부터 영화 일만 했는데, 사랑을 하기 전까지는 내가 살던 범주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아내를 만나면서 달라졌다. 예전에 내가 보고 경험한 것들이 사랑을 통해 정립됐다고 할까. <좋은 배우>도 그래서 만들 수 있었다. 내가 왜 영화를 해야 하는지도 확실해졌다.”
‘섹시하다’는 말이 낯 뜨겁지 않은 이유
당연히 극중의 형만은 감독 본인의 모습을 담아낸 캐릭터다. “어떤 기계든 관계만 알면 못 고칠 게 없다”는 그의 말은 언제나 자기 자리에서 적절한 역할만 맡으면 된다는 인생관을 대변한다. 그런 형만에게 20대의 여자, 그것도 친구의 딸인 남은이 다가온다. <페어러브>는 이들의 사랑을 중년 남성의 로망으로 그리지 않는다. 사실상 50살까지 못해 본 남자와 어디로 튈지 모르는 20대 여자의 만남은 연애에 서툰 남자와 호기심으로 가득한 여자의 로맨틱코미디와 다르지 않다. 작업은 남은이 먼저다. “저 빨래 잘해요.” 여자의 작업멘트를 받는 남자의 대답이 가관이다. “그래, 좋겠구나.” 사랑을, 아니 변화를 거부하던 남자는 순식간에 돌아버린다.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남은의 모습이, 소개팅을 하고 있다는 그녀의 말이 신경 쓰인다. 영화는 형만의 감정적 변화를 섬세한 연출과 재치 있는 리듬으로 묘사한다. 특히 남은의 사랑을 고민하던 형만의 마음에 전화벨이 울리는 시퀀스는 가장 빛나는 장면이다. 결국 사랑을 시작한 형만은 왜 남은이 좋냐는 친구의 물음에 답한다. “남은이는 섹시해.” 더 이상의 욕망이 ‘노망’으로 치부될 남자의 솔직한 고백이 낯 뜨겁지 않은 이유 또한 감독이 차곡차곡 쌓은 감정 덕분이다.
내 영화에선 누구나 빛날 권리 있어
<페어러브>는 배우에 대한 섬세한 배려가 엿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많은 관객들이 익히 알고 있을 안성기의 연기스타일은 그 어떤 작품보다도 형만에게 가장 맞는 옷이다. 신연식 감독이 “안성기 선배님의 뺨을 손가락으로 찔러 볼 수 있는 유일한 배우일 것”이라고 말한 이하나의 연기도 마찬가지.
뿐만 아니라 형만의 작업실 식구들과 가족들, 친구들 등 거의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적어도 한 컷씩은 캐릭터를 각인시킬 수 있는 자리를 갖는다. “영화를 하면서 세운 원칙이다. 내 영화에 참여하는 배우들, 스탭들, 투자자까지 자기 영역에서 얻는 게 있어야 한다는 거다. 비전이 아니면 돈을 줘야 하는데, 난 돈을 못 주니까 내 능력에서 최선의 비전을 제시하려고 한다.”(웃음) <좋은 배우>에서는 연극연출가를, <페어러브>에서는 후반부에 등장하는 의사를 직접 연기한 것도 실속이 없는 배역을 남에게 맡기기가 민망하다는 이유였다. 그의 원칙은 “신앙적인 사명감으로 일을 한다”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마당에 내린 눈을 치우는 일 같다. 눈이 또 쌓일 수도 있지만, 일단 내 손에 빗자루가 있으니까 치우는 것처럼 영화를 대하고 싶다.” <페어러브>를 통해 자신의 영화적 세계와 상업영화의 균형점을 찾은 신연식 감독은 다음 작품에서도 중년의 사랑을 그려볼 예정이다. 사랑을 통해 유명한 건축가로 성장한 루이스 칸의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