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서 사는 법>은 안슬기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다. <다섯은 너무 많아>(2005)가 주변부 삶들이 새로운 유사 가족적 유대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영화였다면, <나의 노래는>(2007)은 빈곤한 가정의 20살 청년이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영화였다. 두 영화 모두 소외된 삶을 다루고 있었지만, 그 삶을 대하는 카메라의 시선은 더없이 따뜻했다. 그러한 삶 속에 깃들어 있는 작은 희망의 씨앗을 감지하고 믿게 만드는 것, 이것이 그 영화들이 지닌 힘이었다. <지구에서 사는 법>은 그 영화들과는 다른 영화다.
권력자들의 외계 vs 추방자들의 지구
영화는 스스로를 ‘범우주적 불륜드라마’라고 소개하고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불륜이라는 파격적인 소재에 SF적 상상력이 더해진 매우 독특하고 낯선 영화’다. 이런 메인 카피를 보고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은, <다섯은 너무 많아>에서 인상 깊게 보았던 감독의 ‘장르적 스타일’에 대한 취향이었다. 안슬기 감독은 <다섯은 너무 많아>에서 장르적 스타일을 멋지게 활용한다. 가난한 집 소년의 가출 동기(생계를 위해 고생하는 엄마에게 느끼는 심리적 부담감)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첫 장면의 ‘좀비영화 스타일’, 그리고 영화의 중간 부분과 마지막 부분에서 ‘소박하고 귀여운 복수’를 표현하고 있는 ‘액션영화(혹은 코미디영화) 스타일’. ‘소박하고 귀엽다’는 것은, 비록 복수일망정 인물들 사이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열려 있다는 것이고, 장르적 스타일은 이러한 삶에 대한 태도를 유쾌하고 멋지게 표현하는 도구가 된다. 때론 의미심장하고, 때론 기발한 재치가 엿보였던 그 장면들을 떠올리며, 호기심과 기대를 품고 영화관에 들어갔다. ‘저예산’으로 ‘SF적 상상력’이 어떻게 구현되었을까 궁금하기도 했고, <다섯은 너무 많아>에서 감지되었던 그 재치의 본격적인 확장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기대되기도 했다.
<지구에서 사는 법>을 본 첫 느낌은 일종의 ‘당혹’이었다. 화면분할과 자막으로 ‘외계인들’ 사이의 텔레파시를 표현한 장면은 정말 멋진 ‘저예산 SF’의 진수였지만, 끝내 그들이 왜 굳이 ‘외계인’으로 설정되어야 했는지를 납득할 수가 없어서 당황스러웠다. 그 당황스러움은 곧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질문이 되었다. 과연 이 영화는 ‘SF적 상상력’이라는 장치를 통해 ‘불륜’이라는 소재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보여준다는 자신의 미션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는가? 이 영화는 SF라는 형식을 빌린 불륜에 대한 새로운 탐구인가, 아니면 불륜에 대한 탐구라는 알리바이를 갖고 펼쳐지는 진부한 장르적 유희인가?
이 영화를 ‘SF적 상상력’을 걷어내고 순수한 ‘불륜드라마’로 볼 경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시인인 남편 연우(박병은)가 있다. 그에게는 안정된 직장(가령, 공무원)에 다니는 아내 혜린(조시내)이 있다. 요즘 그들은 대화가 잘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두 사람 사이에는 현실에 대한 태도의 차이, 즉 삶에 대한 코드의 차이가 있다. 가령, 혜린은 지방 전문대 강의 자리라도 얻을 수 있도록 대학원에 진학하라고 연우를 설득하려 하지만, 연우는 ‘자신이 없다’며 거절한다. 한편, 아내는 이미 직장 상사인 한 실장(선우)과 불륜 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그 불륜은 열정에서 시작된 것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거래로 시작되었다. 특히 혜린쪽은 마지못해 그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며, 속으로는 여전히 남편인 연우를 사랑하고 있다. 어느 날 연우는 시인 모임에서 세아(장소연)라는 여자를 만난다. 말없이 눈빛만으로도 소통이 이루어질 만큼 삶의 코드가 같은 그들은 작은 일탈을 시도한다. 연우와 세아의 관계를 알게 된 한 실장은 업무 지시를 빙자해서 혜린이 둘 사이의 관계를 목격하도록 만든다. 연우와 혜린은 격렬한 갈등을 겪지만, 결국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고 화해한다.
결국, ‘불륜드라마’로서의 <지구에서 사는 법>은 삶의 코드는 다르지만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있는 부부의 일탈과 갈등과 화해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불륜’에 대한 다소 통속적인 설정을 바탕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구에서 사는 법>에서 SF적 상상력은 일단 그 통속적인 설정을 더 도식화하고 강화하는 기능을 한다. 연우가 ‘지구라는 감옥’에 수감된 ‘외계인’이라는 SF적 설정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시인에 대한 일종의 알레고리다. 남편인 연우는 지구에 살면서 ‘지구에서 사는 법’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시인이기 때문에 스스로 지구에서 추방된 자이고, 그렇기 때문에 결국 ‘외계인’이다. 아내인 혜린은 그 ‘법’에 따라 살아남으려고 직장 상사와 내키지 않는 불륜까지 감행하면서 애를 쓰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지구인’이다. 이때 이 영화는 <지구를 지켜라!>의 그것과는 정반대로 설정된 ‘지구’와 ‘외계’를 대립 구도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지구를 지켜라!>에서 ‘외계’가 체제의 권력과 논리가 작동하는 공간이라면, <지구에서 사는 법>에서 ‘외계’는 그 체제의 권력과 논리에 적응하지 못하는 추방된 자들의 공간인 것이다. 전자에서의 ‘지구’가 체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켜야 할’ 공간이라면, 후자에서의 ‘지구’는 삶을 위해 ‘벗어나야 하는’ 공간이다.
장르적 스타일, 정서적 몰입을 방해하다
그러나 <지구에서 사는 법>은 이런 단순한 기본설정에 만족하지 않는다. 연우뿐만 아니라 연우와 대척점에 있는 한 실장 역시 ‘외계인’이기 때문이다. 이때 ‘외계’는 추방된 자들의 공간이 아니라 지배자들의 공간이 되고, 역으로 ‘지구’는 지배자들의 공간이 아니라 추방된 자들의 저항의 공간이 된다.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지구인’에도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이다. 먼저 순수 지구인이 있고, 외계에서 추방된 외계인인 지구인이 있다. 먼저 저항을 시도하는 것은 순수 지구인들(한 실장에게 이유없이 모욕당하고 구타당하는 젊은 남자와 그의 여자친구)이다. 그러나 그들의 저항은 처절하게 응징된다. 이 순수 지구인들이 허망한 저항을 시도할 때, 추방된 외계인인 연우와 그를 감시하도록 고용된 지구인인 혜린 커플은 오히려 저항이 아니라 순응을 선택한다. 세아와의 일탈에서 돌아온 연우는 혜린의 요구대로 ‘대학원에 진학’하겠다고 선언하고, 둘은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체제의 수호자(지구라는 유배지의 간수, 죄수들로 하여금 외계로의 탈출에 대한 꿈을 포기하고 지구라는 현실에 순응하도록 만들 책임이 있는 관리자)인 한 실장이 이 커플의 순응 노력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한 실장은 체제의 억압성을 가시적으로 나타내는 기능적 인물이면서, 스스로 체제의 논리에서 벗어나는 문제적 인물이 되는 것이다. <지구에서 사는 법>에서 ‘지구’와 ‘외계’라는 이분법(SF적 설정)은, 이렇듯 순간순간 그 의미를 역전시키면서 온통 자기모순과 자가당착에 빠져든다.
물론 이런 ‘논리적’인 모순과 자가당착이 그 자체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때로 지배적인 통념을 넘어서기 위한 질문과 탐색의 도구, 즉 일종의 ‘화두’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구에서 사는 법>에서의 그 ‘논리적 모순’은 ‘불륜’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질문과 탐색의 장치라기보다는 과도한 ‘장르적 스타일’에 대한 욕망의 결과로 머물고 만다. 이 영화에는 여러 번에 걸쳐 ‘장르적 스타일’이 등장한다. 검은색 코트와 검은 안경이라는 소도구와 슬로모션으로 양식화된 화법이 그것이다. 그것은 <다섯은 너무 많아>의 한 장면에서 등장했던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섯은 너무 많아>에서의 그것이 영화가 견지하고 있는 삶에 대한 질문을 유쾌한 정서로 표현해내고 있는 것이었다면, <지구에서 사는 법>에서의 그것은 질문의 전제를 교란시키면서 정서적 몰입을 오히려 방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것은 ‘스타일’에 대한 물신적 욕망의 징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SF라는 장르’의 과제는 ‘새로운 시공간’을 창조해내는 것이며, 그 새로운 시공간은 현재의 통념과 욕망을 투사하는 무대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질문을 던지고 문제화시키는 것이 될 때 빛이 난다. ‘저예산’ SF인 <지구에서 사는 법>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SF인 <써로게이트>와 <게이머>. 이 ‘극과 극’의 추석 시즌 SF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결국 빛을 발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