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까지만 해도 장동건은 비극이 탐내는 영웅이었다. 그를 주인공으로 택한 영화들은 대개 고난과 혼돈 속을 속절없이 뒹구는 대서사극이었고, 그들은 그의 소멸을 통해 절정으로 치달은 다음 묵념하듯 장대한 드라마의 막을 닫곤 했다. 무리의 우두머리가 아닌 시절에도 가장 격한 전투에 휘말리곤 했던 그의 페르소나들은 마지막까지 생존하지 않는 대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전설로 화했다. 그 유명한 사투리 대사로 죽음마저 농하듯 맞이한 <친구>의 동수로 각인된 이후, 비극은 장동건에게 운명이었다. <해안선>의 강 상병이 그랬고, <무극>의 쿤룬이 그랬으며, <태극기 휘날리며>의 진태가 그랬고, <태풍>의 씬이 그랬다. 반듯한 이목구비로 각인된 배우에게 그건 자신의 세계를 넓히기 위한 일종의 도전이었고, 영화는 완벽에 가까운 그의 육체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비극의 혈통을 계승한 존엄한 인물을 읽었다.
4년이 지난 2009년. 기다림은 지루했으나 헛되지 않았다. 돌아온 장동건은 변해 있었다. <굿모닝 프레지던트>에서 장동건이 처음 등장하는 순간 카메라가 먼저 잡는 건 그의 손가락이다. 피로 물들어 가물대는 자신의 두눈을 가릴 새도 없었던 그 손은 아이를 안고 있다. 기저귀를 고르고, 좋아하는 여인의 체온을 느끼면서도 망설인다. 차지욱은 아내와 사별하고 아들을 홀로 키우는 싱글남이다. 첫사랑 앞에서 어쩔 줄 몰라 쩔쩔매기까지 한다. 최연소 야당 총재에 최연소 대통령 당선 기록을 갈아치우는가 하면 일본과 미국의 도발에도 강건하고 노련하게 대처하는 걸출한 정치인이지만 한결 충격적인 건 웃음을 감춘 눈매와 소심한 그 태도다. 차지욱 대통령은 마침내 행복의 파랑새를 찾고, 장동건 역시 진정 오랜만에 헤피엔딩에 키스한다. 전장을 헤매다 장진의 코미디 월드에 입성한 그에게 물었다. 굿모닝 장동건, 간밤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연기 복귀작으로 치면 <태풍> 이후 4년 만이다. 그동안 뭘 하면서 지냈나. 다큐멘터리 <지구>의 내레이션을 맡고, 한동안 ‘런드리 워리어’라고 알려진 영화 <더 위리어스 웨이>를 찍은 것 외엔.
=<더 워리어스 웨이>가 프리 프로덕션 기간을 합해 2년 정도 걸렸다. <더 워리어스 웨이>랑 맞물려서 마음에 들었으나 못했던 작품도 있고. 나는 좀 다른 걸 해보고 싶었는데, 좋은 시나리오들도 전에 하던 캐릭터들의 연상선상에 놓이는 게 대부분이더라.
-그래도 코미디를 선택하다니 의외라는 의견도 분명 있지 않을까 싶다. 그동안 작품을 고르는 기준이 바뀐 건가, 한번쯤 해보고 싶었으나 기회가 없었을 뿐인가.
=<태풍> 끝나고 인터뷰할 때도 그런 말을 많이 했다. 다음 작품은, 확신은 못하겠지만, 관객이 따뜻한 마음으로 극장을 나설 수 있는 영화였으면 한다고. 이번 작품이 그런 거지. 사실 한국 코미디하면 슬랩스틱이라는 식의 선입견이 있지 않나. 장진 감독님은 캐릭터을 희생시키면서 웃음을 유발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사적인 자리에서 영화에 대한 설명을 먼저 들었다. 너무 재미있어서 감독님에게 시나리오 나오면 꼭 한번 보여주세요, 그랬다. 지금까지 작업한 영화 중에서 가장 빨리 선택하지 않았나 싶다.
-처음 시도한 코미디 연기는 어땠나.
=재미있었다. 장동건이라는 배우의 코미디 연기에 대한 기대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캐릭터가 구축되면서부터 자신감도 꽤 생겼고.
-관객이 많이 웃으리라고 의식하면서 연기한 장면은 없나.
=가장 걱정을 많이 한 게 그런 점이었다. 현장에서 연기를 하면 스탭들이 웃잖나. 모니터링하면 또 웃음이 나오고. 그런데 관객이 이걸 보고 웃을까. 코미디를 찍은 경험이 없으니까. 장진 감독님은 걱정하지 말라고. 그래도 이 장면이라면 안 웃을 수 없겠다고 생각한 건 박해일씨와 같이 나오는 부분이다. 리허설할 때마다 웃음이 나더라.
-개인적으로 재미있었던 장면은 김정호 대통령(이순재)과 맥주 몇잔 기울인 뒤 얼굴이 시뻘게진 채 기자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재미있는 게 그 장면이 처음 시나리오에는 있었는데, 내가 캐스팅된 이후에 빠졌다. 리허설도 했지만, 장동건이라는 배우랑 안 맞는다고, 수위를 넘어선다고 생각하신 모양이더라. 수정된 시나리오에 빠져 있었는데, 그 앞장면을 찍고 나서 이걸 다시 찍어보는 쪽으로. 그날 현장 분위기, 정말 좋았다. 화기애애했고, 코미디와 농담과 개그가 난무했다. (웃음) 그 전 장면이 있으니까, 나도 그걸 받아들일 수가 있었다.
-마취주사를 맞으면서 짓는 표정은 어떻게 발굴했나.
=그 장면도 대본에는 없었다. 수술대에 눕는 차지욱이라는 설명밖에 없었는데, 촬영 들어가기 20분 전에 감독님이 장난으로 표정 하나를 딱 짓고 지나가시더라.
-그럼 장진 감독의 표정인가.
=우리끼리 장난을 많이 친다. 이걸 꼭 쓰겠다가 아니라 떠오르는 대로 막 던진다. 그중에서 뭔가 걸리는 거지. 그 표정이 너무 재미있어서 내가 큰소리로 웃었더니, 진짜 해보자 그러시더라고. (웃음)
-예전 작품에선 눈이 부각되는 장면이 많았는데, 이번엔 표정이 다양해서 여유로워 보이더라.
=눈에서 힘도 빼고 평소의 얼굴이 많이 들어가 있다.
-친구들이 보면 “자기 모습을 그대로 넣었다”고 할 만한 부분들도 있다고.
=일상적인 장면에선 시나리오와 다른 말투를 많이 썼다. 예를 들면 (김)이연(한채영)이 TV에 나오는 걸 발견하고 참모 중 하나에게 꽃이라도 보내라고 말하는 장면. 그건 대본이랑 내용만 같지, 완전히 다르다. 내 말투다. 보내 어떡해, 이런 것. 수술하기 전에도, 요즘 마취는 어떡해, 뭐 약을 먹나 어떡해.
-말끝을 흐리는 편인가 보다.
=단정적으로 말을 잘 안 하는 스타일이다.
-촬영 전 “로딩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라면서 걱정한 걸로 아는데, 장진 감독은 어떤 조언을 건네던가.
=우리말로 연기한 지 너무 오래돼서 아마 시간이 좀 걸릴 거라고, 내가 미리 이야기했다. 2주 정도 준비 운동하는 시간이 있었다. 대본 가지고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처음엔 유연한 차지욱이 아니었다. 굉장히 전형적이고, 장르영화 속에서 강성외교를 펼치는 대통령의 모습에 더 가까웠다. 리허설하면서 점점 유연한 캐릭터로 변해갔다.
-차지욱은 정치적으로 가장 민감한 시기에 대통령을 지내는 인물이다. 특히 일본 대사 앞에서 호통치는 장면은 연기하기 까다롭지 않았을까 싶던데.
=나도 그 장면을 우려했다. 감독님도 처음엔 걱정하시더라. 예를 들어 일본에 팬을 보유한 한류스타가 이런 장면을 찍으니까. 그래서 오히려 그 장면을 조금 희화화한 부분도 있고. 이 영화의 풍자나 정치적인 수위의 수준은 국민적인 공감대에 맞춰져 있다고 본다. 거기 그런 대사도 나오는데.
-‘굴욕의 역사는 가지고 있지만 굴욕의 정치는 하지 않습니다.’
=한국 관객 입장에서 통쾌해할 만한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뭐, 이것저것 다 따지면 연기하기 더 힘들고 위축될 것 같아서 그 장면의 의도에 최대한 초점을 맞추려고 했다.
-일종의 기싸움이라고 할까. 김정호 대통령부터 시장에서 급습을 감행한 괴청년, 미국 대통령, 방북 대표 등 상대 배역들이 계속 바뀐다. 그런 면에서 캐릭터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데 신경써야 했다고.
=이번 역할을 하면서 그게 가장 어려웠다. 캐릭터가 구축된 상태에선 중심이 흔들리지 않기가 더 쉬운데, 촬영하면서 잡혀가는 경우가 많거든. 두명의 주인공이 계속 부딪치는 영화라면 두 장면, 세 장면, 다섯 장면 찍으면서 서로 캐릭터가 잡히는 데 반해 이 사람이랑 찍었더니 또 다른 사람이 오고. 그러면서 대하는 방식 또한 달라져야 하니까.
-여배우들은 더 그렇겠지만, 배우들은 나이듦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있지 않나. 데뷔한 지 20년이 다 됐는데.
=17년 정도 됐다. 일단 배우로서 나이 드는 건 좋다. 한 남자로서 나이가 드는 것에 대한 초조함은 있다. (웃음) 그냥 뭐, 남들 느끼는 수준인 것 같고. 좋은 점이 더 많다. 불혹이라 그러잖나. 의심이 없다고. 물론 앞으로 어떤 일들이 닥칠지 모르겠지만 웬만한 일상적인 감정은 한번씩 느껴봤으니 연기할 때 선택의 폭이 넓어졌달까. 예전엔 한 가지만 생각나서 그걸 잘하려고 노력했다면 지금은 서너 가지 중에서 고를 수 있다는 것. 젊을 때보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많이 줄어들었지. 대신 초조함이 생기지. (웃음) 아버지께서 얼마 전에 그런 이야기를 하시더라. 네가 나보다 더 재미있는 것 같니. (웃음) 그 나이가 되면 거기에 맞는 재미와 즐거움과 또 다른 가치가 생긴다는 뜻이 아닐까. 그걸 아니까 나이 먹는 게 두렵지 않다.
-원래 너무 예의 바르달까 반듯한 느낌이었는데, 여자 앞에서 설레고 물 안 갖다준다고 짜증도 내니까 도리어 신선하더라.
=어제 영화를 처음 제대로 봐서 아직 감독님하고도 이야기를 안 한 부분인데(웃음), 연기하면서 나는 굉장히 까칠하게 한다고 했다. 영화에도 그런 장면이 있긴 하지만, 내가 생각한 캐릭터보다 훨씬 유하더라. 시장에서 사람들과 악수하는 장면에서도 나는 최대한 가식적으로 보이도록 연기했는데….
-그렇게 안 보이던데.
=내 의도는 그랬다. (웃음) 그래서 보는 사람들이 좀더 웃을 수 있었으면 했는데, 전혀 그렇게 안 보더라고. 아무도 눈치를 못 채서 다행이다. 아, 평소에 좀더 까칠하게 살아야겠구나. 그래야겠구나. (웃음)
-<더 워리어스 웨이>는 내년 상반기쯤 개봉하나. 아무래도 빨리 개봉했으면 하는 마음일 텐데.
=3, 4월이 유력하다고. 내년은 안 넘기겠지.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