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조선희] 제2수장고예산, 후임이 해결하길
2009-10-30
글 : 김혜리
사진 : 오계옥
<클래식중독> 내고 다시 전업소설가로 돌아온 조선희 전 영상자료원장

근원적으로 세상에 대해 낙관하는 사람만이 저토록 끈질길 수 있다. 과거 <씨네21>의 조선희 편집장을 지척에서 바라보며 품었던 생각이다. 그녀는 예민하고 눈물도 많지만, 권태나 침체가 자신을 지배하는 것을 결코 허용치 않는다. 지난 2000년 잡지 데스크를 훌쩍 떠나 오랫동안 소원한 대로 전업 소설가가 됐고, 책상 앞에 홀로 되어 장편 <열정과 불안>(2002)과 소설집 <햇빛 찬란한 나날>(2006)을 써냈다. 2006년 여름 역사소설을 준비하며 숨을 고르던 그는 영상자료원장 재공모에 응하라는 권유를 받았고 사람들 사이로 돌아가 활력을 얻을 때라는 판단을 내렸다. 조선희 전 원장의 재임 중 영상자료원은 상암동 DMC 이전과 그에 따른 재편이라는 중요한 문턱을 넘었다. 아카이브 전용 건물에 둥지를 틀었고 확장된 하드웨어에 발맞추어 예산과 보유 영화편수가 획기적으로 늘었다. 대중과 만나는 온·오프라인 프로그램도 크게 다양해졌다. “가장 생산적 단계에 원장을 맡아 굉장히 뿌듯하고 흥이 났다. 조직이란 에너지 레벨을 어느 정도 띄워놓으면 모든 세포가 알아서 움직이는 단계가 오는 것 같다.” 그 에너지를 불어넣은 기관사이자 방향을 부여한 항해사였던 조선희는 자신의 퇴임을 한국 고전영화 에세이집 <클래식 중독>으로 정리했다. 이 즐거운 발견의 기록은, 그녀가 묵직한 일더미 한쪽에서 얼마나 알뜰히 저널리스트/작가로서 ‘사리사욕’을 채웠는지 일러준다.

-영상자료원장 임기를 마치고 한달이 지났다. 퇴임에 즈음해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가 많았을 텐데 대체로 어떤 분위기였나.
=“만기 제대 축하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시작할 때부터 스스로 딱 3년이라고 생각한 일이라 미련이 없다. 중학교나 고등학교 졸업한 것처럼 인생의 한 시기를 매듭짓고 졸업했다는 기분이다.

-3년 전 소설쓰기를 중단하고 공직에 부임했을 때 조직생활을 통해 다시 원기를 얻겠다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안 쓰던 근육을 많이 단련했는지.
=조직생활 실컷 했다. 그것도 굉장히 강도가 세고 강제가 강한 일종의 공조직 아닌가. 정서적, 심리적 ‘유산소 운동’으로 산소공급은 확실히 한 것 같다. 장편소설 한편 쓸 정도 산소는 얻었다. 창고에 넣어두었던 역사소설 자료를 다시 책상에 꺼내놓았는데 기분이 들뜨더라.

-임기 중에 영상자료원이 비로소 수집, 발굴, 복원, 활용에 걸쳐 영상 아카이브로서 온전히 기능하는 시기에 접어들었다. 이를 위해 예산확보가 무엇보다 긴요했을 텐데 자평한다면 만족스러운가.
=스스로 점수를 매기면 50점 이상은 되는 것 같은데, 결정적으로 마지막에 현안인 제2수장고 예산이 기획재정부 최종심사에서 떨어져 상처받았다. 후임 자료원장이 취임 직후 바로 해결해야 할 일이다. 파헤쳐놓고 수습 못한 일들이 있어 죄송스럽다.

-참여정권이 임명한 정부산하기관장 중에 임기를 채우고 그만둔 드문 케이스다. 항간에는 조선희 영상자료원장이 펼쳐놓은 사업이 워낙 다양하고 방대한 나머지 다른 사람이 수습할 도리가 없어 사퇴시키지 못했다는 말도 있었다.
=절대 그렇지 않다. 기관장들의 사표를 받은 이유도 유임시킨 이유도 모두 업무 외적인, 상당히 정치적인 것이었다고 본다. 내가 임기를 채운 데에는 영상자료원이 정치적으로 중요치 않은 기관이란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동시대 영화와 관객의 감수성을 뒤쫓는 저널리즘과 과거를 갈무리하는 영상자료원 업무는 기질적으로 상반된 일처럼 보이는데.
=기본적으로 아카이브의 특징은 망라성이다. 차별하지 않고 포괄적으로 다루고, 일단 다 보관한다. 차별하고 골라내는 일을 하는 저널리즘과 반대다. 그러나 보존이 아닌 활용 부문으로 넘어가면 아카이브도 저널처럼 선택과 집중을 적용한다. 예컨대 디지털 파일화한 1천 편의 영화 중 외부에 온라인 서비스할 200편은 어떻게 고를 것인지 어떤 사료를 어떤 비중으로 박물관에 전시하고 무엇을 수장고에 보관할지 판단해야 한다.

-부임 당시 자료원과 대중의 접점을 찾는 일에 상대적 강점을 발휘해보겠다는 각오를 밝힌 바 있다. 포켓북 시리즈 발간, 영화박물관 개관, 온라인 VOD사업 등이 여기 해당될 텐데 결과가 어땠나.
=격월간 기관지 <영화천국>이나 포켓북 시리즈 기획에서는 확실히 기존의 편집자적 감각을 동원한 면이 있을 거다. 과거에는 자료원 직원들이 폐쇄적이라는 비판도 받았는데 업무에서 대중과 접촉면이 넓어지면서 개방적 마인드를 갖게 된 것 같다. 자료원 모든 부서 직원들이 <영화천국>에 글을 썼는데 그 과정을 통해 아카이비스트로서 자부심과 정체성에 영향도 받은 듯하다.

-2008년 박정희 정권의 미디어 정치에 관한 심포지엄을 정부쪽 압력으로 취소한 일이 있었다. 그때 일에 대해 설명한다면.
=버티지 않고 내가 자리를 지키는 쪽을 택한 거다. 심포지엄이 취소된 뒤 영상자료원 노조로부터 공개질의서를 받아 답변했다. 내가 보기에도 그런 사안에 대해선 노조가 문제를 제기하는 게 당연하다.

-임기를 마치며 한국 고전영화에 관한 에세이집 <클래식 중독>을 냈다. 마치 그 시대 기자의 눈이 되어 감독론을 썼다는 느낌이다.
=학자가 아닌 저널리스트로서 영화사를 다룬 것이다. 이미 역사로 편입된 시대에 관해 쓰다보면 통상 저널리즘의 시선과는 다른 무엇이 생기는 것 같다. 저널은 아무래도 대중과 같이 영화를 봐야 하기 때문에 주력 관객층의 시선에 빙의하는 현상을 완전히 피할 수 없다. 그러나 10년, 20년의 거리를 두고 작품을 보니 훨씬 따뜻하게 그리고 또 냉철하게 볼 수 있었다. 가령 장선우 감독의 <거짓말>은 <씨네21> 편집장을 하는 동안 개봉했는데, 당시에는 우리가 센세이션에 편승한 점도 없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섹스의 정치학’이라는 차원에서 해외영화와 비교하며 바라볼 여유가 생겼다.

-자료원에 보관된 검열 서류, 삭제 필름을 통해 한 영화가 최종적 형태에 이르기까지 곡절을 추론한 대목이 재미있었다.
=어찌 보면 나는 특권적인 저자였다.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3천편이 넘는 영화의 심의자료를 자료원에서 데이터베이스화 중인데 나는 그것을 미리 보고 글을 썼다.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 시나리오 심의 서류 서두에 쓰인 첫줄은 “지적사항이 과다하므로 전면개작을 요망함”이었다.“이제 우리들의 시대가 올 거야” 하는 극히 평범하고 무난하며 상투적이기까지 한 대사조차 삭제 지시를 받았다. 하길종이 정녕 스트레스사(死)했구나 싶었다.

-<클래식 중독> 중 특히 장선우 감독을 재평가한 장은 필자의 절실하고 각별한 애정이 느껴지는데.
=장선우 감독은 내가 취재기자였던 때부터 영화저널에 종사했던 시기까지 활동기가 정확히 겹치는 인물이다. 직접 취재를 했다는 사실에서 나오는 스킨십이 있는 애정인 것 같다. <클래식 중독>을 보면 감독이 제대로 재능을 꽃피우지 못하고 졸하거나 한국적 상황에서 충분히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시들었다는 언급이 여러 차례 나오는데, 그중에서도 장선우 감독은 흥망성쇠를 옆에서 지켜보아 더 아쉬움이 간절하다.

-신상옥 감독이 <연산군> <폭군연산>의 프린트를 자료원에서 반출해갔다가 14분, 54분씩 삭제 재편집해서 반납했다는 일화를 읽으며 깜짝 놀랐다.
=설마 그러리라 아무도 상상 못했던 일이다. 게다가 <폭군연산>은 유일본이었다. 내가 부임하기 전 일화라 당시 대출을 담당한 직원들에게 정황을 물어 썼다.

-책에서 1960년대 한국영화를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던 저금통장에 비유하며 높이 평가했는데.
=한국영화사를 죽 훑어보면 전체적으로 기운이 세고 약한 요철이 있다. 1960년대는 영화들의 색깔이 어찌됐든 영화가 흥한 시절이었다. 1960년대에 많은 훌륭한 작가들이 전성기를 보냈고 그들의 작품은 현재 충무로가 생산하고 있는 장르영화의 미개한 버전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영화적 태도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그중 상당수는 굉장히 문학적이었다. 유현목 감독의 영화도 <오발탄>은 조금만 어두침침한 환경에서 보면 화면이 식별 안될 정도로 흑백대비가 심한데 60년대니까 가능했던 실험 같다. 삶 자체가 고됐던 시기라 영화관에서도 수준 높은 시청각적 쾌감보다는 실컷 울 수 있는 비극, 불편한 자극을 찾았던 게 아닐까.

-현대사 사료로서 영화가 갖는 기능에 대해서도 생각할 기회가 많았을 것 같다.
=사실 한국 고전영화를 보는 데에는 신파조, 연기스타일, 발성법 등의 장벽이 있다. 기회비용을 따져도 올해 칸에서 황금종려상 받은 신작을 젖혀두고 1960년대 유현목 영화를 본다는 건 쉽지 않다. 그럼에도 옛날 영화를 보는 2시간이 최신작 감상 2시간에 맞먹는 재미를 줄 수 있는 건 그 안에 우리 바로 앞 시대를 산 사람들의 모습과 표정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강만길, 송건호 선생이 쓴 한국현대사, 한국근대사를 열심히 읽었지만 <반도의 봄> <조선 해협> 같은 영화를 보면서야 식민 말기 지식인들의 생각과 정서를 유추할 수 있었다.

-이창동 감독과의 대담에서, 최소한 본인이 소설을 쓰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납득시켜야 하는데 그 이유가 생각이 안 날 때 가장 절망적이라고 토로한 적이 있다. 소설가로서 스스로 보는 약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친구인 최보은이 내게 너무 모범생이라서 저널리스트가 제격이지 소설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확실히 내겐 금도가 많다. 드라마작가 중에도 천재가 많은데 예를 들어 나는 <모래시계>에서 한 여자와 두 남자가 그런 결정적 순간에 만날 순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선덕여왕>이라면, 미실과 선덕이 시대적으로 꼭 맞아떨어지진 않지만 겹치게 하면 대박이 터질 거라고 누가 귀띔해줬다 해도 나는 그렇게 쓰지 못했을 것 같다. 무엇보다 나는 하루 써서 이튿날 신문에 내는 기자 습관이 배어서인지 뼛속까지 내려가서 쓰지를 못하는 것 같다. 기자생활 20년을 거치며 감수성이 한계지워진 게 아닐까. 너무 축축해지는 것도 질러나가는 것도 불안하다.

-현재의 <씨네21>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씨네21>은 14년 동안 품질을 유지해왔지만 매체환경 변화에 의해 난관에 봉착해 있는 것 같다. 개인적인 느낌으론 지면 개편이 너무 잦다. 영화잡지이면서도 영화지 범주를 넘어서는 상징적 꼭지였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가 폐지됐을 때는 농담 섞어 “누가 나한테 허락 안 받고 없앴냐?” 투덜거렸다. (웃음) 빨리빨리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이 새것에 끌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익숙한 것을 사랑하는 것도 사실이다.

-저널리스트, 잡지 편집자, 소설가, 정부산하기관장을 거쳐 왔다. 각각의 일들이 인생에 어떤 흔적을 남겼다고 보는가.
=내가 5년 편집장 생활을 마쳤을 무렵 <씨네21>은 성공적인 매체였는데 거기엔 운이 작용했다. 영상자료원에서도 주어진 문제를 잘 푼 편이었다. 나는 조직 속에서 일할 때 역량의 극대치가 나오는 것 같고 그런 성취들이 인생에 대해 낙관적 태도를 갖게 하는 면이 확실히 있다. 그것이 없었다면, 염세적이 되어 소설을 진즉에 포기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번에 서명숙(제주 올레 이사장)씨와 함께 제주도 길을 걸으며 그의 위인전을 써주겠다고 했다. (웃음) 그는 다 버리고 새 지평을 열 수 있는 사람이다. 반면 나는 누가 시키면 주어진 일을 죽으라고 열심히 해서 응분의 보상을 받는 사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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