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마드를 발라 반질반질하게 빗어 넘긴 짧은 머리의 조니 뎁. 치렁치렁한 액세서리를 주렁주렁 달던 익숙한 모습 대신 이번엔 완벽한 클래식 슈트 차림이다. 첫 등장부터 칼라가 긴 롱포인트 셔츠에 실크 타이를 매고 베스트까지 갖춘 스리피스 스트라이프 슈트를 입었다. 마무리는 어깨가 넓은 헤링본 더블 브레스티드 롱코트. 와인색 리본 디테일이 있는 울 페도라와 손에 딱 맞는 얇은 가죽 장갑도 잊지 않았다. 이렇게 말쑥하게 차려입고는, 은행을 턴다.
그는 경제공황기 시절 미국의 거물급 은행 강도 존 딜린저다. 정부의 입장에서는 공공의 적이고 시민의 입장에서는 공공의 친구. 말하자면 활 대신 총을 든 로빈 후드랄까. 남김없이 은행을 싹쓸이하고 여자 손님들에겐 모자 챙을 살짝 들어올려 인사를 한 뒤, 최고급 차를 몰고 골목 밖으로 사라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 1분40초. 게다가 잘생기고 옷 잘 입고 매너 좋고, 호송되어가는 차 안에서도 팬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스타적 기질까지. 이쯤되면 전설이 되고도 남는다. 그는 누군가에게 스스로를 소개할 때 빠른 차와 고급 위스키, 좋은 옷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상류계급의 식당에서 송아지고기 스테이크를 썰고 처음 본 여자에게 밍크 코트를 선물하는 유유자적한 생활에 패션이 빠질 수는 없어서, 딜린저가 인질에게 벗어주고 간 코트를 두고 경찰서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32온스 양모, 상단봉합방식의 윈드프루프 코트. 이 코트는 그저 존 딜린저의 하고 많은 옷 중 한벌일 뿐. 그의 옷차림은 1930년대 남자옷의 전통적인 기품과 고고한 격식을 접이식 부채를 펴듯이 슬슬 보여준다. 회색 플란넬 슈트와 갈색 울 슈트, 스트라이프와 윈도페인 체크, 하늘색 타이와 자주색 타이, 걸을 때마다 밑단이 활처럼 휘는 아름다운 코트들. 어떤 재킷은 어깨가 팽팽하게 펴지도록 딱 맞고 어떤 코트는 어깨선이 슬쩍 처지게 넉넉하다. 라펠의 크기와 팬츠 턴업의 길이를 따지는 ‘슈트의 원칙주의’, 소재와 패턴에 따라 어깨치수가 리드미컬하게 달라지는 ‘슈트의 낭만주의’가 존 딜린저의 옷장 안에 골고루 담겨 있다.
그리고 액세서리의 제왕 조니 뎁답게 딜린저의 슈트에는 독특한 프레임의 선글라스와 자수정 반지, 크고 눈에 띄는 커프링크스가 더해진다. 모스콧풍의 모던한 선글라스도 예쁘지만 특히 눈에 띄는 건 커프링크스다. 그도 그럴 것이 딜린저가 총을 쏠 때, 그것이 윈체스터건 톰슨이건 간에 딜린저의 손목에는 보석 커프링크스가 채워져 있다. 그 네모난 커프링크스는 “물론 난 은행을 털어. 하지만 그 누구보다 신사지”라는 딜린저의 선포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