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니게임 U.S.>는 1997년의 동명 작품을 동일하게 반복한다. 이는 미카엘 하네케가 1997년의 <퍼니게임>을 연출했을 무렵의 문제의식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니 새로운 버전이라고 해도 1997년 이후 꾸준하게 이뤄진 비평에 추가할 만한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나는 이미 충분히 언급된 <퍼니게임>의 오프닝 시퀀스를 ‘봉합’의 관점에서 다시 읽으면서, 그것이 지닌 영화적 함의를 영화 전체로 확장해보고 싶었다.
두 청년은 도대체 누구일까
<퍼니게임>에 대해 말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오프닝 장면이다. 클래식이 흐르는 고상한 분위기를 일거에 삼켜버리는 시끄러운 록음악이 이후 한 가족의 몰살을 암시하는 것으로 언급되는 오프닝 장면 말이다. 하지만 이 오프닝은 단지 이 정도로 축소될 만큼 만만한 장면이 아니다. 먼저 이 오프닝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동일한 상황이 다르게 반복된다는 점이다. 영화는 한적한 고속도로를 달리는 누군가의 차를 버즈 아이 뷰로 담으며 시작한다. 화면 위로는 클래식 음악이 울려퍼지는데, 이어지는 장면에서 조지(팀 로스)와 앤(나오미 왓츠)이 그 음악의 제목과 작곡가 이름을 맞히는 ‘고상한 게임’을 즐기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그렇게 디제시스 외부의 음악은 디제시스 내부로 매끈하게 ‘봉합’된다.
이후 휴가를 떠나는 가족의 평온한 분위기는 갑작스레 등장한 록음악으로 일거에 무너지고 마는데, 흥미로운 것은 디제시스 외부에서 등장한 클래식 음악이 디제시스 공간 내부로 봉합되었던 것과 달리, 이 록음악은 봉합되지 않고 그 외부에 머무른다는 점이다. 이 오프닝과 관련하여 생각해봐야 하는 것은 클래식 음악이 부르주아 가족의 평온함을, 록음악이 가족을 파국으로 몰고 갈 두 청년을 상징화한다는 단순한 차원이 아니라, 왜 클래식 음악과 록음악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처리했는가, 하는 것이다.
록음악이 멈추는 시점은 가족의 차가 어느 집 정문 앞에 멈췄을 때다. 앤은 멀리서 골프연습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부부에게 말을 건넨다. 하지만 그들은 골프 연습을 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 부부는 이후 조지와 앤을 방문할 사이코 청년들에게 인질로 잡혀 있다. 즉 록음악은 자신과 등가적 기능을 수행할 두 청년과 조우했을 때 자신의 자리를 양보한다. 이처럼 봉합되지 않은 록음악과 두 청년이 동일한 위상을 갖는다고 할 때, 우리는 두 청년 역시 봉합의 실패, 또는 균열의 흔적으로서 어떤 지위를 갖고 있지 않은지 의심해보아야 한다.
봉합에 실패한 엔딩
우리가 <퍼니게임>을 보며 가장 궁금한 부분은 폴(마이클 피트)과 피터(브래디 코벳)가 가족을 파국으로 몰아넣은 이유에 대해서이다. 이는 <히든>에서 누가 비디오테이프를 보낸 것인가, 라는 질문이나 <늑대의 시간>에서 유럽에 휘몰아친 재앙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에 대해 궁금증을 느끼는 것과 동일하다. 물론 하네케의 영화적 의도를 생각해볼 때 이러한 질문은 우문에 가깝겠지만, 그래도 궁금한 건 궁금한 거다. 우리는 여기서 하네케가 부르주아 계급의 예민한 신경증, 그러니까 겉으로는 평온하지만, 실제로는 그 삶을 둘러싼 껍질이 너무 연약해서 조그마한 충격만 가해도 쉽사리 깨져버리는 계란 같은 부르주아적 삶을 묘사하는 데 뛰어난 감독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두 청년이 계란을 빌려달라며 가족에게 접근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네케는 폴과 피터를 설명하기를 포기하는 대신 순수하게 ‘도구적 역할’로 한정한다. 즉, 두 청년은 조지 가족에게 평온한 삶이 악몽으로 전환되는 경험을 강제함으로써 자신들을 떠받치는 지반의 취약성을 자각하도록 유도하는 ‘기능상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다(이는 <히든>의 비디오테이프와 <늑대의 시간>의 대재앙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이러한 면에서 <퍼니게임>은 그의 극영화 데뷔작이었던 <일곱 번째 대륙>의 스릴러 버전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물론 <일곱 번째 대륙>은 일가족의 집단자살을 이끈 동기가 부르주아 가족 내부의 무기력감과 단절감에 있었던 반면(또는 그렇다고 유추할 수 있는 반면), <퍼니게임>은 외부로부터 침입한 두 청년에 의해 가족이 절멸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하지만 두 청년이 부르주아적 가족의 불가능성, 달리 말하면 부르주아적 신경증을 잉태하는 가족 내부의 균열, 결핍, 단절이 물질화된 일종의 유령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즉, 폴과 피터가 부르주아적 삶이 봉합하는 데 실패한 균열의 흔적이라면, 그와 동일한 위상을 지닌 록음악 역시 디제시스 내부로 봉합되지 않아야 한다. 달리 말해, 부르주아적 질서에 대해 두 청년이 그러했듯이, 록음악은 디제시스 내부의 불안정성, 봉합될 수 없음의 징표인 것이다.
하네케는 영화의 엔딩에서 또 다른 먹이를 찾아 나선 폴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보여준다. 흔히 열린 결말이라고 부르지만, <퍼니게임>에 한정하자면 ‘봉합에 실패한 엔딩’으로 부르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하네케는 영화 엔딩의 폴의 얼굴 위로 오프닝의 시끄러운 록음악을 되살려냄으로써 디제시스 내부로 봉합될 수 없는 그 외부의 존재를 다시금 환기시킨다. 히네케가 보기에 디제시스 내부 역시 매끈하게 봉합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영화 텍스트가 균질할 것이라는 믿음은 하나의 환영에 불과하다. 물론 이러한 환영은 영화적 관습에 의한 효과다. 하네케의 다른 작품이 아닌 <퍼니게임>이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할리우드 스릴러의 관습과 그 ‘믿음-환영’을 뒤집는 패러디의 전술을 구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 무뎌진 자기 반영성
하네케가 텍스트적 봉합이 실패할 때 발생하는 불안을 관객에게 전이하려는 시도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영화에서 두 청년이 제안하는 퍼니게임은 단지 인물들간의 놀이가 아니다. 부르주아적 삶이 두 청년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관객과 벌이는 게임은 영화적 관습의 체계로 봉합될 수 없는 텍스트의 찢김이다. 하네케가 원하는 것은 이 관습의 체계를 믿고 있는 관객에게 시비를 걸고는, 그들로 하여금 관음자의 자리에서 이탈해 게임의 일부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폴이 리모컨을 들고 리와인드 버튼을 눌러 이미 벌어진 사건을 되돌릴 때, 관객은 선택의 여지없이 ‘잔혹한 퍼니게임’의 참여자가 되어야 했던 조지 가족과 유사한 위치로 전락한다. 이 장면은 <퍼니게임>이라는 개별 텍스트의 경험을 해체하는 것만이 아니라, 스릴러 장르가 갖는 영화적 관습의 허구성과 그 불안정성을 폭로한다. 그러고는 그 관습의 체계에 기대어 환영 속에 빠져 있던 관객을 비웃는다.
2007년 버전의 <퍼니게임> 역시 불쾌하기 짝이 없다. 또한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그러한 감정을 안겨준 이들을 어떻게 할 수 없는 무력감도 1997년이나 지금이나 동일한 방식으로 체험된다. 그렇다고 그 체험의 강렬함이 동일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아니다, 쪽이다. 물론 나는 동일한 영화를 반복해서 봤고 그것이 체험의 강렬함을 감소시킨 것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퍼니게임>에서 영화의 환영성을 폭로하기 위해 사용된 자기 반영적 장치들이 이미 허구적 관습의 일부로 익숙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카메라를 보며 관객에게 말을 걸거나 영화가 인위적으로 구축된 세계임을 환기시키는 영화적 장치가 허구적 관습의 체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기교로 변해버린 시대에, 이들 장치가 과거만큼의 충격요법으로 작용할 수 있을까. 즉, 1997년이 영화적 허구의 세계가 계란 껍질에 비유될 수 있다면, 지금의 허구적 세계는 타조알만큼이나 견고해져버린 것이다. 하지만 하네케는 10년 전에 느낄 수 있었던 것과 같은 불쾌감을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동일한 장면을 동일한 숏으로 찍으려 할 뿐이다. 동일한 것의 반복이라 하더라도, 시간은 그것을 미학적 실패로 만들기도 하는 법이다. <퍼니게임>이 걸작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반복인 <퍼니게임 U.S.>는 걸작에 기댄 태작일 뿐이다.
(1997년작 <퍼니게임>과 구분하기 위해 2009년작 <퍼니게임>은 본문에서 <퍼니게임 U.S.>로 표기했다.-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