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스코프]
[cine scope] 세상을 찌르는 칼처럼
2009-11-02
글 : 이영진
사진 : 이혜정
이준익 감독의 신작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촬영현장

“식사하고 갑니다!” 제작부장의 말이 떨어지자 창 든 엑스트라들이 우르르 일어선다. 오전 11시가 조금 넘었는데 벌써 점심이라니. 꼭두새벽부터 촬영에 들어가서인가. 듣고 보니 관광객을 위한 농악대 공연 때문에 촬영을 더이상 진행할 수 없어서란다. 촬영장 바깥에선 한국민속촌을 찾은 외국 관광객이 셔터를 누르느라 정신없다. 연기 피어오르는 관아와 조선 의상을 입은 100여명의 엑스트라들은 그들에겐 더없는 진경이다.

정오부터 다시 시작된 34회차 촬영.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공동제작사인 타이거픽쳐스의 조철현 대표는 “왜란이 일어난 것이 1592년 4월인데 겨울에 찍게 생겼다”고 웃는다. 비행기 굉음, 가을 소풍 온 아이들의 비명, 공사 트럭 소음 때문에 이날 오후 촬영은 여러 번 중단됐다. 후시녹음을 해야겠다는 이준익 감독의 말에 황정민이 “그럼 이번엔 전라도 사투리 하지 말고 경상도 사투리로 해볼까” 한다. “나도 표준어 말고 사투리 해야겄구먼.” 차승원도 농을 농으로 받는다. 전체 촬영일정의 절반을 소화해서인지, 새카만 분장에 누더기 옷을 걸친 황정민과 핏자국 선연한 도포를 두른 차승원의 대화에는 긴장만큼 여유도 배어났다.

<왕의 남자> 이후 4년 만에 사극으로 돌아온 이준익 감독의 <구르믈…>은 혼란의 시기에 “세상을 향해 칼을 뽑아든 네 남녀의 이야기”로, 박흥용 화백의 동명 만화가 원작이다. 혼탁한 세상을 베어버리겠다며 반란을 꾀하는 대동계의 수장 이몽학(차승원), 한때 뜻을 같이했으나 왕이 되겠다는 이몽학의 야심을 알아차린 뒤 그를 뒤쫓는 봉사 검객 황정학(황정민), 서자로 태어난 한을 삭이지 못해 스스로 ‘개새끼’라 자조하지만 아버지를 위해 이몽학에게 복수하려는 견자(백성현), 이몽학을 가슴에 담았으나 그의 마음을 뺏지 못한 기생 백지(한지혜) 등이 국란의 시기에 뒤얽힌다.

이준익 감독은 “견자의 성장을 주제로 한 원작과 달리 영화는 이몽학을 중심으로 전체 이야기를 구성했다”고 설명한다. 그렇다고 <구르믈…>이 이몽학을 난세의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건 아니다. “지금이 사회적 영웅을 바라는 시대는 아니다. 소시민적 영웅을 원할지는 몰라도. 시나리오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영화에선 이몽학의 혁명이 왜 실패했는지 드러날 거다. 이몽학의 결함만큼 황정학의 한계도 묘사할 것이고.” 액션사극을 표방했지만, 이몽학의 ‘큰길’과 황정학의 ‘샛길’ 사이에서 이준익 감독의 진짜 관심은 ‘역사’와 ‘인간’이다. 12월 초까지 촬영을 끝낸 뒤 내년 설에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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