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O Sangue
1989년 감독 페드로 코스타 상영시간 95분
화면포맷 1.33:1 스탠더드 음성포맷 DD 2.0 포르투갈어
자막 영어 출시사 세컨드런(영국)화질 ★★★★ 음질 ★★★☆ 부록 ★★★
대략 20년 전, 포르투갈 출신의 미지의 감독이 베니스영화제에 도착했다. 아버지 세계에 저항하는 아들이라는 주제를 담은, 스탠더드 화면비율로 찍힌 흑백영화(빔 벤더스의 동반자 마르틴 셰퍼가 촬영을 맡았다)는 시대를 잘못 찾아온 아트하우스처럼 보였지만(포르투갈의 뉴웨이브는 1960년대의 일이다), 영화를 본 한 미국 배우는 ‘20년 내에 나온 최고의 데뷔작’이라고 평했다. 그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뼈> <반다의 방> 등으로 줄곧 주목받던 페드로 코스타는 <행진하는 청춘>에 이르러 전세계 평단으로부터 만장일치에 가까운 환호를 받아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지금 <피>를 뒤늦게 보는 것은, 대단한 작가의 비범한 출발점을 역으로 목격하기 위함이다.
코스타 영화의 간결한 오프닝신은 관객을 인물의 현실로 급히 내던져 영화의 상황을 직시하도록 만든다(외딴 방의 침대 위에 앉아 뜻 모를 표정을 짓는 여자(<뼈>), 남루한 방에 마주 누워 마약하는 남녀(<반다의 방>), 주택의 뒤뜰에 널브러져 자는 노인(<토끼 사냥꾼들>)을 떠올려보라). 그중에서도 <피>의 그것은 유독 인상적이다. 먼 폭풍우 소리에 이어 소년이 등장하고, 곧 누군가의 손이 그의 뺨을 때리고, 카메라는 반대편에 선 중년 남자를 붙든다. 맘대로 해도 좋으니 떠나지만 말아달라는 아들의 부탁을 뿌리치는 건 아버지다. 그리고 아버지는 비뚤어진 나무 사이의 새벽길로 사라진다. 코스타는 놀랍도록 함축적이고 강렬하게 영화의 주제와 스토리와 느낌을 전달했다.
<피>는 화합할 수 없는 세계를 끝장낸, 혹은 그 세계와 결별한 두 형제 빈센트, 니노와 한 소녀 클라라의 불안과 변화에 관한 이야기다. 클라라에게 다가가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부탁한 뒤, 빈센트는 그녀와 함께 아버지의 시체를 묻는다. 밀매업자의 조무래기인 빈센트와 점차 거리의 소년으로 변하는 니노는 학교에서 급사로 일하는 클라라와 유사가족을 이뤄 일시적인 해방감을 맛보지만, 이내 결별했던 세계가 그들을 침범하고 만다. 아버지와 관계된 자들이 나타나 돈을 요구하고, 삼촌이 니노의 보호를 강요하면서 어설픈 해방은 감금상태로 돌변한다.
<피>의 악몽 같은 현실상황은 인물들이 꿈을 꾸거나 아예 죽은 듯이 보이면서 더 강화된다. 아이들은 지나치게 자주 잠을 자거나 누워 있고, 그들의 표정과 의식은 현실과 반쯤 떨어져 있으며, 꿈속의 일처럼 인물들이 스크린 안팎으로 문득 등장해 갑자기 사라진다. 그런데 자칫 인물의 생동감을 앗아갈 법한 이러한 설정은 오히려 그들의 목소리에 거부하지 못할 힘을 싣는다. 그들의 말 하나하나는 눈앞의 사자가 내뱉는 엄중하고 무시무시한 경고로 기능한다. 평자들은 코스타의 영화에 레이, 위예와 스트라우브, 무르나우, 투르뇌르, 가렐, 에리세의 이름을 붙이곤 하지만, 코스타 영화의 독창성을 이끌어내는 건 ‘버려진 자, 굶주린 자, 가난하고 힘없는 자’가 스스로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돕는 방식이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행진하는 청춘>의 ‘움직이는, 절규하는 정물화’, 즉, ‘영화적이지 않은 형식의 전대미문의 영화적 체험’은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유명세에 비해 코스타의 작품을 DVD로 구하기란 쉽지 않다(스페인에서 작품집이 나와 있으나 영어자막이 지원되지 않으며, 몇몇 프랑스판 DVD는 절판돼 고가로 거래되고 있다). 영국에서 출시된 <피>의 DVD가 소중한 건 그래서다. 감독이 인증한 판본을 담은 영상과 소리의 우수함은 말할 것도 없고, 얼마 전 사망한 ‘포르투갈 시네마테크’의 전 원장 조아오 베나르드 다 코스타의 ‘영화소개’(17분)와 두편의 비평을 수록한 책자가 영화의 이해를 충실하게 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