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spot] “끝까지 콘텐츠로 승부 보겠다”
2009-11-12
글 : 이영진
사진 : 최성열
KPIF 2009 ’프라임초이스’ 수상한 김영진 프로듀서

김영진(35) 프로듀서도 한때 그렇게 여겼다. 유능한 프로듀서의 조건은 뛰어난 ‘머리’가 아니라 부지런한 ‘발’이라고. 그래서 제작부 막내 때부터 부지런히 뛰었고, 그토록 원하던 프로듀서가 됐다. 10년 가까이 일했던 싸이더스FNH에서 나와 1년 전 로케트필름을 차리기도 했다. 독립 선언을 했지만, 그러나 설 자리가 없었다. 공들여 매만진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시나리오는 ‘프로듀서가 기획했다는 이유로’ 투자사의 관심 대상에도 오르지 못했다. 현실은 여전히 프로듀서의 ‘머리’보다 ‘발’을 원했다.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이하 PGK)과 부산국제영화제가 공동으로 마련한 ‘KPIF(Korean Producers in Focus) 2009’에 지원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 <블루문>(권선국), <좋은 친구들>(최은화), <잃을 것도 없다>(신철), <천도>(윤준형) 등과 함께 ‘KPIF 2009’에 선정되어 해운대를 찾은 투자자들과 뒤늦게 미팅을 가진 그를 만났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는 ‘KPIF 2009’에서 1등 격인 ‘프라임초이스’도 수상했다.
=시놉시스 단계에서 인정받은 거니까. 앞으로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현장에서 프로듀서가 시나리오 썼다고 하면 관심을 안 갖는다. 프로듀서들이 무슨 기획을 해, 하지. 유명 감독, 유명 작가가 썼다고 하면 그 자체만으로 ‘어, 재밌겠는데’ 하겠지만. 적어도 KPIF 행사가 프로듀서들에게 큰 격려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행사를 후원해준 프라임엔터테인먼트의 용기도 고맙고.

-심사 총평 중 ‘저예산’을 장점으로 내세운 프로젝트들이 많아서 씁쓸했다는 지적이 눈에 띄더라.
=나는 반대로 했다. 예산 제대로 들여서 찍고 싶다고 했더니 다들 좋아했다. (웃음) <잠시 다녀오겠습니다>는 개성공단을 배경으로 한 남북 청년들의 사랑 이야기다. 예선 피칭 때 북한의 미사일 발사, 박지성-정대세 선수의 악수 등을 담은 영상을 준비했는데, 너무 구린 것 아니냐는 반응도 있었다. 실제 시나리오는 예쁘고 슬픈 정통 멜로다. 다만 너무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보일까봐 시의성있는 영상을 붙였는데, 통일에 대한 도덕적, 의무적 강요를 떼고 가는 게 어떻겠냐는 조언도 나왔다.

-오랫동안 준비한 프로젝트였나.
=지난해 봄에 <1724 기방난동사건> 끝내고 오랜만에 사무실에 갔다가 최종현(<어린왕자>) 감독을 만났다. 10년 넘게 알고 지낸 형이다. 88만원 세대에 관한 아이템 이야기를 하기에 재미없어, 했다. 그랬더니 내놓은 것이 개성공단 통근버스 안내양 이야기였다. 나도 <스펀지>에서 버스 안내양이 있다는 이야길 들은 적이 있다. 더듬이가 쫑긋했다. 개성공단을 지키는 북쪽 군인과 개성공단 통근버스 안내양의 사랑 이야기라. 그 다음날 아예 조효민 작가를 불러서 셋이서 술집에서 대부분의 이야기를 짰다. 버스 짐칸에 타고 내려오면 <로마의 휴일> 같은 데이트도 가능할 테고. 그 뒤로 사무실에서 모여 매일 치고받고 싸우는 형태로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일반적인 분업 형태는 아니었던 것 같다.
=큰 제작사에서 오랫동안 머물면서 내가 마니커 닭고기 같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웃음) 사료 먹고 알 낳는. 설계도 받아서 물건 만드는 게 오래 하니까 지겹더라. 아이템 한줄로 시작해서 같이 디벨로핑하는 것이 재밌어 보이고. 그래서 로케트필름을 차린 거다. 대표라고 해서 책상을 따로 놓고 일하지 않는다. 같이 머리 맞대고 만들어내는 거지.

-한때 한국영화의 중심에 프로듀서가 있었다. 프로듀서가 존재감을 잃어버린 이유가 뭐라고 보나.
=방만했다. 젊은 프로듀서들의 경우, 나를 포함해서 예산 잘 짜고 스탭들에게 욕 안 먹고, 촬영만 무사히 끝나면 된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새 판을 만들어갈 것인지에 대한 전략이 없었다. 스스로를 ‘뉴스트림’이라고 부르면서도 정작 흐름을 이끌 힘은 갖지 못했다.

-선배 제작자들에 대한 불만은 없나.
=KPIF 행사에 참여하기 전만 해도 기성 세대들은 꼰대라는 생각을 했다. 올해 부산에서 행사하면서도 몇몇 제작자들로부터 ‘어, 쟤들 봐라’ 하는 식의 눈총도 받았다. 하지만 선배들 때문에 설 자리가 없었다고 여기진 않는다. 피칭 준비하면서 심사하던 선배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다. 특히 꼬맹이들 뒤풀이까지 챙기셨던 신철 대표님께 감사한다. 그동안 일한다고 자식들 못 챙겼는데, 이제라도 좀 챙겨줘야겠다는 눈빛을 여러 차례 읽었다.

-한국영화의 위기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어떤 프로듀서가 필요하다고 보나.
=모든 영화를 프로듀서가 기획할 순 없다. 감독 중심, 작가 중심의 영화도 있어야 한다. 다만 그 비율만큼 프로듀서 중심의 영화도 나와야 한다. 합리적인 제작과정이 가능하려면 프로듀서가 크리에이티브한 사고를 가져야 하고, 그걸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필요하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성공 모델이 필요하다. 피칭 행사만으로는 안되고.

-그동안 <서울> <히어로> 같은 합작영화에 참여했다. 외국어에도 능하다고 들었다. 불어, 영어, 일어까지 한다면서.
=언어 능력이 합작 프로젝트 성사와 진행에서 열쇠는 아니다. 서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면 된다. 프로듀서가 박쥐처럼 날아다녀야 싸움이 안 난다. 합작영화는 아직도 콘텐츠보다 네임 밸류 중심이다. 로케트필름에선 박은영 프로듀서가 준비 중인 <굿바이 레슬리>라는 합작 프로젝트가 있다. 장국영을 소재로 한·중·일 3국이 참여하는 형태의 프로젝트다. 다만 신생 영화사라는 점 때문에 협의 과정에서는 다들 아이템에 흥미를 보이면서도 갸우뚱한다. 센 감독을 붙일 수 있는지, 한류 파워가 있는 배우가 붙어야 한다는 등의 조건이 따라붙는다. 다들 간만 보는 거다. 하지만 콘텐츠로 끝까지 승부해서 이런 상황을 헤쳐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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