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박예진] 비련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2009-11-16
글 : 문석
사진 : 최성열
<청담보살>의 박예진

기억이란 도통 믿을 만한 게 못 된다. 박예진의 인터뷰를 준비하기 위해 <씨네21> 데이터베이스를 뒤지다가 2001년 <광시곡> 이후 그녀를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에 적이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뒤 박예진이 출연한 영화는 <뚫어야 산다>와 <그녀는 예뻤다>같이 대중적 반향이 적은 영화들이었다. 그런데도 박예진을 드라마 연기자라기보다 영화배우로 느끼는 건 연기 데뷔작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1998)의 반향이 여전히 쟁쟁하기 때문이리라. “거의 10년 만에 큰 배역을 갖고 영화로 돌아오게 됐는데, 뭔가 시작 같은 느낌도 있다”는 그녀의 말은 그래서 이해가 된다.

박예진에게 ‘영화 두 번째 이야기’에 해당하는 첫 작품은 <청담보살>이다. 그녀는 여기서 신내린 점쟁이 태랑을 연기한다. 화려한 외모와 타고난 재능으로 청담동 일대에서 소문난 무녀인 태랑은 어머니(김수미)가 점지해준 남성과의 만남을 고대하고 있다. 하지만 어머니가 일러준 사주의 남성은 하필 지지리도 못 나가는 승원(임창정)이다. <청담보살>은 운명을 거스르지 못해 승원과 억지로 사귀어야 하는 태랑의 비애가 담긴 로맨틱코미디다.

<발리에서 생긴 일> <대조영> <선덕여왕> 등 드라마까지 포함해도 10년 넘는 연기경력 동안 코미디는 박예진이 접해보지 못한 장르다. <패밀리가 떴다>에서 콧소리를 작렬하며 애교와 쾌활함을 보여줬던 모습을 생각하면 의외지만, 그동안 그녀가 맡았던 역할은 비련과 애증의 비바람 속에 놓인 여성이었다. “그동안 몇 가지 이미지를 가진 캐릭터 사이에서 맴돈 것 같아 갈증이 있었죠. <청담보살> 시나리오를 받고 나에게 오기 힘든 장르와 캐릭터라는 생각이 들어서 선택했어요.”

첫 코미디영화라곤 해도 박예진이 슬랩스틱 연기나 개그를 펼친 것은 아니다. <청담보살> 속 태랑은 드라마의 중심에 자리하긴 하지만 승원을 비롯한 다른 인물들의 액션에 반응을 보임으로써 웃음을 주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첫 코미디 연기라는 부담보다는 오히려 기존 연기와 똑같이 보이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있었어요. 뭔가 변화를 꾀하려고 선택한 영화인데 그러면 안되잖아요. 촬영을 해나가면서 태랑에게 어떤 색깔과 매력을 입히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의 첫 코미디 연기는 이 방면의 달인 임창정의 큰 도움 덕분에 안정감을 얻긴 했지만, 박예진 스스로의 고민과 노력이 없었다면 이만한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태랑이 한때 짝사랑했던 남성과 데이트하는 장면이 그랬다. 그 남성은 그녀를 모르는 척하다가 어느 날 그가 사실 태랑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 순간 태랑이 “알고 계셨어요오~?”라고 말하면 관객, 특히 여성 관객은 박예진이 보여준 급반색, 급애교, 급능청의 연기에 자지러진다.

“태랑의 마음이 쏙쏙 와닿더라고요. 감춰뒀던 마음이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상황 말이에요. 그렇게 리얼해서 웃음을 주는 연기가 더 재밌더라고요.” 박예진이 태랑의 심경을 속속들이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거의 처음으로 내 또래, 내 환경, 내 일상과 비슷한 캐릭터를 만난” 덕분이다. 태랑은 무속인이라는 점만 빼놓으면 일과 사랑과 미래를 고민하는 20대 후반의 전문직 여성일 뿐이니까. <패밀리가 떴다>를 제외하면 박예진의 대표 캐릭터는 <대조영>의 초린과 <선덕여왕>의 천명 공주였으니 그녀가 태랑이라는 캐릭터를 반가운 친구처럼 받아들인 것도 무리는 아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던 시절 비슷한 또래 역할을 맡은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이후 박예진은 11년 만에 <청담보살>을 통해 다시 ‘진짜 박예진’과 재회한 셈이다.

그런데 진짜 박예진? 드라마 속 캐릭터나 첫인상에서 느껴지는 어딘가 냉랭하고 쌀쌀맞은 사람인가, 아니면 <패밀리가 떴다>의 콧소리가 낭창낭창한 ‘달콤살벌 예진아씨’인가. “둘 다예요. 친하지 않은 사람과 있거나 기분이 안 좋을 때는 차갑고, 친한 사람들과 있을 때는 정반대고. 항상 좀더 친절하고 온유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데 그게 쉽지는 않은 거잖아요. 그래서 인터뷰할 때 항상 이렇게 말해요. 내가 원래 그렇게 착하고 밝은 사람은 아니라고. 이렇게 내가 먼저 까칠하다고 말하면 나중에 위선적이거나 가식적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을 것 아니에요오~ 홍홍.”

<패밀리가 떴다>는 어쩌면 박예진의 ‘온유와 친절’을 위한 프로젝트였는지도 모른다. 원래 예능 프로그램에 울렁증이 있는 그녀가 프로듀서의 출연 제의에 응한 건 자신의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다. “내 연기가 아니라 일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건데 그러다 보면 연기자로서도 새로운 기회가 생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케이블 드라마 <여사부일체>, <TV동물농장>의 아프리카 기행, <선덕여왕> 등 빡빡한 스케줄 속에서도 2주마다 1박2일씩 강행군을 했던 건 그만큼 박예진의 내적 변화에 대한 욕심이 컸다는 뜻이다. 그렇게 바뀐 이미지와 자신감은 로맨틱코미디라는 미답의 장르에 다다를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청담보살>까지 마치고 나니 그동안 내게 있었던 틀을 깬 것 같은 쾌감이 있어요오홍~.” 박예진의 ‘영화 두 번째 이야기’는 그렇게 즐거운 콧소리로 시작하고 있었다.

스타일리스트 김고은보미·의상협찬 에린브리니에, 이자벨마랑, 자딕앤볼테르·소품협찬 인더우즈, 악세서라이즈, DK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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