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한복판에 거대한 구멍이 생기고, <천지창조> 속 신과 아담의 손가락이 ‘끊어지며’ 달리던 기차가 ‘은하철도 999’처럼 허공으로 추락한다. <타이타닉>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대형 크루즈호가 실감나게 뒤집힌다. 롤랜드 에머리히의 <2012>가 보여주는 재난 스펙터클은 그날 밤 악몽으로 재현될까 두려울 만큼, 단연 압도적인 현실성으로 능란하게 펼쳐진다. 지난 11월1일 LA 베벌리힐스에서 열린 <2012> 프리미어 시사회에서 감독과 각본가, 주연배우들을 만났다.
“우리에게 시간이 좀더 있을 줄 알았는데….” <2012>의 과학자 애드리언이 망연자실하게 내뱉을 때, 열렬하게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처럼 지구멸망설이 실감나는 때가 또 있었던가. 이건 온갖 휴거설과 밀레니엄 바이러스 앞에 덜덜 떨던 1999년보다 더하다. 극지방의 빙하는 놀라운 속도로 사라지고, 북극곰은 서커스 묘기하듯 얼음덩어리 위에 불편하게 버티다가 결국 하나둘씩 익사하며, 그 와중에도 빙하가 녹으면 새로운 뱃길이 열린다며 각국에선 벌써부터 항로 주도권을 따내느라 정신없다. 돈을 긁어모으겠다는 그 무시무시한 욕망 때문에 인류는 결국 이렇게 자멸하고 말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 없다.
롤랜드 에머리히의 신작 <2012> 뉴스를 처음 들었을 때도, 그의 전작 <투모로우>가 새삼스레 떠올랐던 건, 지구멸망을 ‘확실하게’ 보여주려면 설득력 있는 현실적 근거를 제시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짐작 때문이었다. 전쟁도 핵무기도 여전히 두렵지만, 무엇보다 인간의 잘못으로 인한 자연의 복수가 가장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 옛날 마야인들이 예언했다는 ‘2012년 멸망설’은, 어쩌면 단순한 예언이 아니라 인류의 궤적을 뒤돌아볼 때 어떤 필연적인 조화설처럼 느껴졌다.
지난 11월1일 오후 7시 미국 LA 랜드마크 시어터에서 열린 프리미어 시사회장에서 처음 공개된 <2012>는, 그러나 예상과 달랐다. 당면한 현실을 떠올릴 만한 배경 설명은 깔끔하게 제거된 채, 지구멸망이 태곳적부터 정해진 운명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다는 설정이다. <2012>에는 ‘노아의 방주’라는 명백한 종교적 레퍼런스가 포함되어 있음에도, 인간들의 불의에 진노한 신이 대홍수를 내려 지구를 ‘청소’했다는 그 무시무시한 은유 대신 인간의 잘못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선의에 대한 믿음이 더욱 크게 부각된다.
이에 대해 롤랜드 에머리히가 “나는 <투모로우>가 진짜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멸망은 바로 그런 식으로 올 것 같다. 솔직히 2012년 멸망설을 개인적으로 믿지 않지만, 인간의 잘못으로 인해 생겨날 결과에 대해서는 분명히 두렵게 느낀다. 하지만 <2012>의 초점은 완전히 다르게 잡았다. 무엇이든 간에 끝이 온다면, 그 다음 ‘누구를 구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만든 영화다”라고 답한 것은 이 영화에 대한 정확한 요약이었다. 제작자 겸 각본가 해럴드 클로저 역시 “우리는 재난 자체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이 재난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관한 영화여야 했다. 그래서 이야기도 매우 사적인 것으로 짰다”라고 부연했다.
프리미엄 시사회를 마치고 베벌리힐스 포시즌 호텔에서 롤랜드 에머리히와 해럴드 클로저, 주연배우 존 쿠색, 아만다 피트, 치웨텔 에지오포와의 라운드테이블 인터뷰가 마련되었다(매력적인 안호이저 역의 올리버 플랫이 참석하지 않은 것이 아쉬웠다).
정석 답변으로 기자들 초조하게 한 존 쿠색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는 데 실패한 SF소설가 잭슨 역의 존 쿠색, 잭슨과 이혼한 뒤 두 아이를 키우는 평범한 여인 케이트 역의 아만다 피트, 지구멸망 징조를 가장 먼저 알아차리는 과학자 애드리언 역의 치웨텔 에지오포는 각기 다른 입장으로 영화 출연 소감을 전했다.
‘아저씨 점퍼’ 스타일로 지나치게 친근하게 차려입은 존 쿠색은 예상했던 대로 상당히 쿨한 입장을 고수했다. 화산 폭발 당시 도망치는 자신의 스틸컷이 대문짝만하게 실린 <LA타임스>를 한참 들여다보기에 한 미국 기자가 “소감이 어떠냐”고 묻자 “음, 그냥 좋은 사진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라며 덤덤하게 대답해 폭소를 끌어냈다. 액션신이 힘들지 않았냐는 질문에도 “전혀”라고 짧게 대답하고, 지금까지 연기 인생 중 가장 큰 규모의 블록버스터를 찍은 소감에서도 “롤랜드는 관객이 기대하는 종류의 SFX와 CGI의 마스터이며 큰 블록버스터를 많이 만들었기 때문에 믿을 수 있었다. 물론 작은 영화를 찍을 때보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워낙 스탭과 배우들이 경험 많은 인재들이라 큰 차이점을 느끼진 못했다”는 ‘정석’대로의 답만 들려주어 기자들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끔찍한 상황에서도 연이어 조크가 터져나오는 <2012>의 특성상 그 두 가지 정서를 어떻게 조율했는가를 질문했을 때에도 처음엔 “스크립트에 있는 대로 한 건데”로 말을 시작하여 기자를 한순간 긴장케 했다.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사람들은 매우 긴장된 순간으로부터 재미를 느끼지 않나. 왜 두려워하면서도 엔터테인먼트를 추구하는 건지에 대해서는 나 역시 항상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뭐 원래 그러니까. (웃음)”
검은색 벨벳 원피스를 입은 아만다 피트는 영화에서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지만, 다소 까칠한 인상이었다. <우리, 사랑일까요?> 등의 로맨틱드라마로 인지도를 얻은 그녀답게, 따뜻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를 십분 살려 절절한 모성과 로맨틱한 삼각관계를 연기한 것과 관련하여 출연 소감을 질문했다. “일단 <2012>가 거대한 블록버스터영화라는 게 끌렸다. 한번도 그런 기회를 가져본 적이 없었고. 또 존 쿠색과 톰 매카시와의 삼각관계도 좀 재밌지 않았나?” 가장 어려웠던 장면을 물었을 땐 과할 정도로 솔직하게 답해 기자들을 당황시키기도 했다. 영화 후반 클라이맥스 장면, 턱까지 차오르는 물속에서 격렬한 감정을 표해야 했던 ‘클로즈업’ 장면이라고. “카메라가 좀 멀면 대충 해도 리얼해 보이는데(웃음), 클로즈업으로 들어올 땐 허우적거리는 와중에도 연기를 굉장히 잘해야 하니까 그게 힘들더라. (웃음)” 무엇보다 그녀의 개인적 캐릭터가 엿볼 수 있던 순간은, <2012> 같은 파국에 대해 걱정하느냐는 질문 앞에 “아니. 아직 그런 것까지 걱정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지금 당면한 전쟁문제만 해도 시급하지 않은가. 이를테면 북한”이라는 단호한 답변에서였다.
그에 비해 검은색 양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치웨텔 에지오포는 “윤리적인 이슈를 정면으로 직면해야 하는” 과학자 애드리언 역할이 흥미로웠다면서 말 그대로 모범답안만을 내놓았다. 존 쿠색에 비해 대중적 지명도가 약해서인지, 외국 기자들의 질문도 <2012>보다는 차기작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에지오포의 신작이 안젤리나 졸리와 함께 출연하는 스릴러 <솔트>였기 때문에, 졸리와의 호흡에 대한 질문이 쏟아지는 난감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해럴드 클로저 “화산 폭발 장면 가장 어려워”
“내가 미국에 처음 건너왔던 1994년, LA에는 상당한 규모의 지진이 발생했다. 내가 묵던 집의 일부분도 무너졌다. 지금까지 그 경험은 내게 가장 큰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그래서 <2012>의 LA 지진신에도 그 기억을 반영하며 굉장히 공을 들였다.” 늘 쾌활한 해럴드 클로저는 15년 전의 공포를 떠올리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는 다른 어떤 재난보다 지진이 인간에게 근본적이고 물리적인 공포를 안겨준다고 코멘트했다. “이를테면 화재는 밖으로 대피한 채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나의 안전을 확인할 수 있지만, 지진은 내가 발딛고 있는 곳마다 끊임없이 움직인다. 예측이 불가능하다.”
그의 말대로, <2012>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장면은 역시 LA를 한숨에 날려버리는 지진이다. 영화가 시작하고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LA는 완전히 날아가버린다. 그는 이 영화에서 가장 어려웠던 장면으로 옐로스톤국립공원이 지진과 화산폭발로 무너지는 시퀀스를 꼽았다(이 장면에서 존 쿠색은 마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의 캐리 그랜트처럼 달린다. 차이점이라면 캐리 그랜트가 헬리콥터에 쫓겼다면, 존 쿠색은 사방팔방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바위와 불덩이를 피해 달린다). 한국에서도 <해운대> 덕분에 “물 CG가 가장 어렵다”는 정보가 익숙하게 알려져 있었다. 해럴드 클로저 역시 그에 동의했지만, “이번에 해보니 화산 폭발 장면이 가장 어렵더라. 지표면 자체가 쿨럭거리고 움직이며 불이 터져나오는 걸 표현하기란…”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롤랜드 에머리히 “불가능에 접근은 나의 천성”
예상과 달리 매우 점잖은 인상의 백발 신사 롤랜드 에머리히는 <2012> 기사가 큼지막하게 실린 <LA타임스>를 코앞에 밀어주는데도 “아니다, 어떤 기사도 읽고 싶지 않다”고 밀어냈다. 지금까지 ‘대중적 인기, 평단의 악평’이라는 구도에 꽤 시달린 눈치였다. 그러나 큰 기대를 모으는 이번 신작에 대해 하나하나 답하는 그의 태도에는 자신감과 여유가 넘쳤다.
해럴드 클로저가 처음 <2012> 아이디어를 냈을 때도 “아냐, 아냐, 아냐, 당신 미쳤어? 또 재난영화를 하자고?”라며 단번에 거절했지만, 디테일을 들을수록 점점 끌렸다고 했다(백악관 전멸신에서도 “또 똑같은 걸 찍고 싶지 않아”라고 거절했지만, 주변에서 “아냐, 당신은 그걸 꼭 해야 해, 다들 그걸 기대하고 있을 텐데”라고 부추기는 바람에 결국 JFK함대가 백악관 위로 무너져내리는 식으로 살짝 비틀었다).
이를테면 <10000 BC>에서 그는 고대 문명의 다큐적 재현이 아니라, 그에 관련한 온갖 음모론을 영화화하는 데 흥미를 보였다. 그렇다면 ‘2012년 지구멸망설’이야말로 요즘 같은 시대에 가장 핫한 ‘떡밥’ 아닌가. “내가 할 수 있는 장르영화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걸 잊지 말아 달라. (웃음) 나는 재난영화와 액션영화를 이미 찍어봤지만, 호러나 판타지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선택의 여지가 그리 많지 않았다.”
‘재난영화 전문 감독’이라는 카테고리에 묶이는 걸 그닥 달가워하지 않는 듯했지만, 그래도 에머리히는 “불가능한 이미지에 접근하는 건 나의 천성”이라고 잘라 말했다. 압권은 라운드테이블 인터뷰가 끝나갈 때쯤 나왔다. 바티칸 성당이 참혹하게 무너지는 장면에 대한 이탈리아 기자의 애교 섞인 불평에 대해, 에머리히는 슬쩍 웃었다. “거기에 대해서라면 나의 관점은 매우 단순하다. 그런 재난에서 기도는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교회까지 가서 기도하진 마라. 교회가 당신 머리 위로 무너져 내릴 테니!”(일동 폭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