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파주>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시종일관 영화를 감싸는 안개 때문일까. <파주>의 울림은 명확한 사실관계가 아니라 모호함에서 퍼져나왔다. 어떤 사람들은 그 점을 불평하는 것 같은데,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그 모호함을 투명하게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점점 더 납득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영화만은 익숙한 감정, 익숙한 인과관계에 기댈 때 설득력이 있다는 저들의 강고한 믿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여름의 대작들이 그렇게 성공을 거둔 뒤, 이 가을에 찾아온, 박찬옥 감독의 7년 만의 작품인 <파주>를 치밀하고 노련하게 만들어진 영화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영화가 그 모호함을 끌어안고 대면하며 세상 안에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점에 <파주>의 힘이 있고, 나는 그 점에 위로를 받는다. 그 모호함이 영화 서사상의 모호함이 아니라 세상의 모호함을 대하는 이 영화의 태도라고 믿고 싶다.
욕망의 실현이 두렵네
영화에서 가장 마음이 쓰인 장면 중 하나는 영화 초반, 공부방 선생님인 중식(이선균)에게 은모(서우)를 비롯한 학생들이 스승의 날 깜짝쇼를 벌이고 나서부터다. 어두운 방, 커튼이 열리고 빛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단체로 하얀 옷을 입고 머리를 풀어헤친 소녀들이 중식을 돌아보며 서늘한 목소리로 합창한다. “사랑해요, 중식씨.” 의아할 정도로 당황해하는 중식은 밤이 되어야 교실에 돌아오는데, 은모는 언니(심이영)의 명령에 따라 사과를 하러 중식을 찾아온다. 중식은 또다시 의아할 정도의 심각한 표정으로 “왜 그랬니?”라고 묻는다. 그러자 은모는 난데없이 “우리 언니 건드리지마”라고 외치며 뛰쳐나간다. 그때 언니가 들어와 중식을 품에 안는다. 이 장면, 동문서답처럼 들리고 여러 감정의 단계들과 설명을 건너뛴 듯한 이 대화는 좀 이상하다. 아무리 중식의 상처 입은 첫사랑을 떠올리는 장난이었다 해도 한낱 아이들의 놀이었을 뿐인데, 그 이유를 정색하고 묻는 자나, 그걸 전혀 다른 방향에서 답하는 자나 낯설게 느껴진다.
그런데 얼마 뒤, 영화의 시점이 현재로 돌아와 중식과 은모가 3년 만에 재회하는 장면에서도 그런 대화가 반복된다. “3년 전에 왜 그랬니?”라고 묻는 중식에게 “두려워서요, 혼자 못 살아간다는 게요”라고 은모는 대답한다. 이 두 대화 사이에는 7년이라는 시간이 있다. 그 사이 중식과 언니는 결국 결혼했고, 은모가 집을 나간 사이 언니가 가스 폭발로 죽었고, 돌아온 은모가 중식과 같은 집에 살았고, 어느 날 갑자기 은모가 떠나버렸다는 사실은 그 다음에야 플래시백으로 제시된다. 하지만 여전히, 이들의 반복되는 질문과 답이 무언가 핵심을 피하고 부유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거기에는 어쩌면 너무 명확해서 아무도 진지하게 말하지 않거나 피하려는 억압된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
나는 이 영화가 끝나가는 지점에서, 중식이 은모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은모가 중식을 보험사기로 고소한 뒤, 영화에 존재하지는 않지만 이전과 유사한 대화가 반복되는 장면을 상상해보았다. 중식은 “왜 그랬니?”라고 다시 물을 것이고, 은모는 아마도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두려워서요, 내 욕망이 현실화되는 거요.” 그러니까 중식의 질문에 대한 은모의 대답은 처음부터 하나의 욕망과 그에 따른 죄의식을 지칭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언니와 중식의 결혼사진에서 중식의 얼굴을 잘라내던 가위가 결국 언니의 죽음의 근원이 되었다는 사실을 새삼 지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중식의 “왜 그랬니?”라는 모호한 질문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왜 언니를 죽여야만 했니’라는 물음이 전제되어 있을 것 같고, 그 물음은 사실 은모에 대한 중식 자신의 무의식적 욕망을 거꾸로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점에서, 앞에서 말한 스승의 날 중식과 은모 사이에 이루어진 첫 대화는 너무 일찍 도착한, 혹은 이미 거기에 있었던, 그러나 끝을 예견하는, 미래의 질문과 대답이다. 이 장면이 이유를 알지 못한 채 기이한 슬픔을 자아낸다면 그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는 남자
은모가 중식과의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에서 거듭 진실을 알아야겠다고 할 때, 나는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이미 그 진실을 알고 있지만 모른 체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중식에게 보험금과 관련된 언니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묻는 것처럼 보이나, 그건 핑계처럼 보일 뿐이다. 그녀는 언니의 죽음의 비밀이 실은 중식과 자신의 서로에 대한 욕망 위에서 작동한다는 것을 끝까지 피해보고 싶은 것이다. 은모는 죄의식의 두려움에 떠는 가련한 새다. 그녀는 몇번 집을 떠나거나, 언니의 죽음에 대한 물증(보험금)에 매달리면서 그 두려움을 방어하지만, 그녀가 진실을 모르지 않음을 암시하는 장면들이 있다. 영화에서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리는 곳을 따라 은모의 시선이 한참 머무르는 장면이 두번 등장한다. 한번은 은모의 현재에서 과거로 넘어가는 시점, 다른 한번은 언니가 폭발 사고로 죽은 직후다. 영화상으로 은모는 그 사이렌의 실체를 모르는 것처럼 나오지만, 이상하게도 영화는 그 소리를 따라가는 은모의 시선과 표정을 신중하게 지켜본다. 그 소리는 징후적이다. 거기에는 마치 무언가를 아는 자의 꿈틀거리는 표정이 있고, 불현듯 돌출해버린 욕망과 두려움의 얼굴이 있다.
영화를 본 뒤 다시 떠올려보아도, <파주>는 은모와 중식의 불가능한 사랑에서 감정을 자아내는 영화는 아닌 것 같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느껴진다. 중식과 은모의 사랑이, 중식이 은모에게 “너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단 한번도 없었어”라고 고백하는 장면이 갑작스럽다고 말하는 이들의 불만도 수긍할 만하다. 둘의 사랑을 중심으로 감정선을 따라갈 때, 종종 영화에는 미진한 구석들이 보인다. 그러나 <파주>는 은모와 중식의 관계가 아니라, 온전히 홀로 떨어져 존재하는 영화 속의 인물들 각각을 쳐다볼 때 울림을 갖는 영화다. 이런 경험이 흔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나는 영화 속 모든 인물들에게 깊은 연민을 느낀다. 그중에서도 특히 중식이라는 가여운 남자에게 자꾸만 마음이 흔들린다. 영화는 왜 그에게만 모든 짐을 떠안기는 것일까. 그리고 그는 왜 단 한 차례도 그 삶에 반항하지 않는 것일까.
이 남자에게는 씻을 수 없는 외상적 사건이 있고 그 외상은 끈질기게도, 점점 나빠지는 상태로 반복된다. 수배 중이던 그는 감옥에 간 선배의 아내와 섹스를 하고, 그때, 그녀의 어린 아들이 끓는 물에 화상을 입는다. 영화는 과연 그래야만 했을까 싶을 정도로 독하게 그 과정을 다 보여준다. 그는 도망치듯 파주에 온다. 수배는 풀렸지만 서울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서 한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지만, 그녀와 섹스하기를 두려워한다. 어느 날 새벽 술에 취한 그가 아내와 관계를 맺을 때, 그는 누군가에게 “용서해주세요”라고 슬프게 말하고, 우리는 아내의 등에 화상자국이 있는 걸 알게 된다. 얼마 뒤, 그녀는 가스 폭발로 죽는다. 재를 뒤집어쓰고 타버린 시체를 남자만 본다. 시간이 흐르고 옛 선배의 아내가 찾아와 화상을 입고 손가락이 잘린 그때 그 아이의 사진을 보여주자 그는 흐느낀다. 그는 매번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아야만 한다. 철거민대책위원회에서 사람들을 이끌던 그는 화염병을 쓰자고 제안하고 그 결과는 모두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말한다.
그곳은 그의 자리가 아니다
영화는 불과 관련된 그의 외상을 매번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돌아오게 하고 그로 하여금 응시하게 만든다. 불만큼 자주 등장하는 이미지가 비와 안개지만, 이 수분은 불을 꺼뜨리지 못하고 오히려 그 불의 상처를 영화와 인물 안으로 축축하게 퍼뜨리고 젖어들게 하는 것 같다. 중식이 파주로 도망온 뒤, 어느 시점부터 나는 그가 그 외상을 피하려고도, 극복하려고도, 망각하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다. 다만 그는 홀로 그 외상을 다시 산다. 그건 죄의식이나 책임감이나 체념 혹은 결기로도 설명이 안되는 무엇인데, 오직 그것밖에 길이 없어 보인다. 은모가 그에게 직접적인 관계도 없으면서 철거민 투쟁을 왜 하는지 묻자, 그는 “처음에는 내가 갚아야 할 게 많은 사람이라서. 지금은 잘 모르겠어. 그냥 할 일이 너무 많네. 끝이 안 나”라고 대답한다. 끝이 나지 않는 할 일. 선배의 집에서 그의 아내와 섹스를 하고,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결혼을 하고, 폭파된 신혼집을 목격하고, 처제와 단둘이 한집에서 살고, 다른 이들의 집을 지키기 위해 철거민대책위원회에서 활동하는 이 남자. 이 애처로운 남자의 고통은 그가 자기 자리가 아닌 곳에서 그 자리에 있길 선택할 때 시작된다. 아니, 선택한다기보다 자신의 장소가 없는 이 남자는 역설적으로 그런 자리들에 있을 수밖에 없어 보이고 어디서도 주인이 되지 못한다. 그는 거기서 고된 노동을 하듯 삶에 돌아온 외상을 다시 산다.
물론 우리는 영화가 단지 장소를 갖지 못하는 어느 개인의 지독한 운명을 관찰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것과 분리될 수 없는 사회의 상처를 붙들고 있음을 보아야 할 것이다. 영화에서 장소가 허락된 자들은 귀농을 결심한 목사(이대연, 중식에게 파주의 공간을 마련해준 친한 형)거나 재개발을 추진하는 조직의 보스(이경영)뿐이라는 점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영화에 전면화되지는 않지만 중식은 아마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배됐을 것이고, 탈북자와 관련된 문제에 개입해서 연행되고, 철거민대책위원회를 주도했다. 그러나 허망하게도 그가 마지막 감옥에 가게 되는 계기는 보험사기의 누명이다. 단 한번도 투사처럼 보이지 않는 이 남자가 매번 그 싸움의 길 위로 돌아가 피로하게 서 있다는 것, 그런 그의 행적 자체가 이 천박한 땅의 외상을 보여준다는 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장소를 잃는다는 것의 사회적 층위를 끌어안고서 우리의 삶에 과연 장소라는 것이 있는가라는 실존적인 물음으로 근심이 확장될 때, 분노와 고독은 한몸이 되고, 쓸쓸함을 참기 어렵다.
그들은 이제 어디로 갈까
영화의 마지막, 중식은 마치 그곳밖에는 이제 자신에게 남은 장소가 없다는 듯이 감옥에 들어간다. 철거민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건물 밖으로 내쫓기고 말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은모가 부모가 물려준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임을 안다. 그녀는 다시 길 위로 나서는데, 영화가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 길 위에서 그녀는 유흥업소 사장(이경영)과 마주친다. 은모는 달리는 오토바이에 앉아서, 사장은 차 안에서 서로의 눈을 응시하고 불현듯 영화가 끝나버린다. 이 장면을, 이 영화의 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감하다.
은모의 마지막 응시자가 중식이 아니라는 사실, 그녀를 끝까지 보호하다가 감옥에 간 중식 대신, 영화상 중식과 정반대편에 존재하는 남자가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당혹스럽다. 파주를 부수고 거기에 자본의 꿈을 심는 장본인이 다시 모든 걸 버리고 파주를 떠나는 어린 새의 두려운 눈빛에 화답할 때, 그러니까 그와 은모의 마주침으로 영화의 시작과 끝을 채울 때, 나는 세상에 대한 이 영화의 비관을 읽는다. 파주에는 어떤 희망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이 남자를 연기한 이경영의 어떤 힘 때문인지(그는 영화에 손에 꼽을 정도로 적게 출연하며, 대사가 없는데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갖는다) 그의 침묵의 화답은 묘한 울림을 갖는다. 그는 중식과 철거민들의 반대지점에서 누군가의 장소를 빼앗는 영화 속 공공의 적이 분명하나, 그의 짧은 등장이 주는 인상은 그 역시 장소를 잃고 떠도는 사내 같고 그 모습이 어딘지 외롭고 처연하다는 것이다. 중식도, 은모도, 철거민들도, 심지어 이 사내도 어딘가로 향하고, 어딘가에 스스로를 묶어두려하지만, 그 어느 곳도 집은 아니다.
뿔뿔이 흩어진 이들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그들은 어디에선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렇게 영화는 이들이 온몸으로 이 시대를, 자신의 마음을 앓고 있지만 아무것도 되찾을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아니, 애초 되찾을 그 무엇도 소유해본 적 없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세상은 더욱 병들어간다는 것에 대해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 응시에 따뜻하게 대답하고 싶은데, 차마 그럴 수가 없어서 마음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