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배우 또 없다. 멜로와 코미디, 호러와 드라마를 횡단하고 역도 선수(<킹콩을 들다>)와 매니저(<온에어>), 외과의사(<외과의사 봉달희>), 의금부 도사(<음란서생>), 조직폭력배(<조폭 마누라3>)를 숨 가쁘게 종단하면서 20년 가까이 은막 위에 자기 자신을 힘껏 맞부딪힌 사나이. 배경 속 익명의 누군가에서 자기 이름 석자를 크레딧에 가장 먼저 새기기에 이른 이범수의 다음 목적지는 <홍길동의 후예>다. 장르의 관성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그의 필모그래피에서도 생경한 액션활극이다. 그가 연기한 인물은 홍길동의 직계 후손이자 21세기 한국형 슈퍼히어로 홍무혁. 두달 동안 철저한 식단관리로 체중을 4kg나 감량하고, 두달 반가량 신재명 무술감독에게서 땀으로 익히고 몸으로 이해한 캐릭터다.
“실수했다간 목뼈가 부러질 수도 있는 두 커트 빼곤 내가 다 했다. 옥상에서 옥상으로 뛰어가는 신이 있었는데, 이쪽 난간을 딛기 전까지 아래 옥상이 안 보이는 거다. 착지 지점을 보고 으싸 뛰어내려도 긴장될 판인데, 악당을 보면서 쫓아가서 난간 사이 거리를 재야 한다. 그 장면을 8일 동안 찍었다. 8일 동안 뛴 거다. 계속. 달리기는 워낙 자신있지만 6일째가 되면서부터 다리가 막 후들거리더라. (웃음) 계산 착오였던 게 구두를 신고 뛰어야 하니까.”
데뷔 이래 쉴 틈 없이 연기하고 또 연기한 이범수에게 2009년은 유독 예외적인 해였다. <킹콩을 들다> <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 <정승필 실종사건> <홍길동의 후예>까지 극장에 걸린 혹은 걸릴 그의 출연작은 무려 4편. “꼭 진실을 말하고 싶은데, 나는 2009년 이범수 영화는 두편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는 우정출연 개념으로 7회차 정도 나간 거고, <정승필 실종사건>은 2년 전에 찍은 영화인데 갑자기 개봉이 잡혀서 나도 당황했다. 분명한 건 내가 연기를 매우 좋아한다는 거다. 얼마 전 누군가 ‘취미가 뭐냐’고 질문하던데, 별로 없더라. 하는 일에 아쉬움이 있다면 취미를 통한 즐거움이 필요할 텐데, 나는 그렇지 않다.”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 같은 대작들과 끈질기게 몸싸움을 벌인 <킹콩을 들다>는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상까지 들어 올렸고, 쇠막대기만 20kg에 달하는 바벨을 견뎌낸 그는 배우만이 전부였던 지난 세월을 위로받았다. “바벨이 용상에선 (어깨에) 걸쳤다가 올라가잖나. 닿는 느낌이 너무나…. 뼈를 쇠로 때린다고 생각하면 너무 소름끼친다. 그걸 이겨내야 한다. 자리 잡고 팔을 벌리면서 뻗어야 하는데, 그걸 신경 쓰다가 하나둘셋 턱 치고 올라가고. 나도 한대 맞았다. 정신이 아찔하더라. 비슷한 시기에 대작이 많았는데, 흑자를 내서 기쁘고. 상도 줘서 감사하다. 잘 보이지도 않는 배우에서 시작해서 남우주연상을 받는구나. 주인공으로 시작해 주인공으로 남우주연상을 받는 분들과 느낌이 다를 거다. 그만큼 내가 부지런히 달려왔구나.”
최고로 중요한 순간이란 바로 지금임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잊는가. <킹콩을 들다> 촬영에 돌입하면서 5~6kg을 덜어냈고 <홍길동의 후예>로 몸을 다듬은 이범수는 인생의 황금기로 접어든 남자의 향기를 풍겼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하고 싶은 역할이 많냐”는 질문에 “안 해본 직업은 다 해보고 싶다”고 잘라 답했다. “요즘 <아이리스>가 재미있잖나. 이병헌씨 상대역을 내가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은 본능적으로 들더라. 정준호씨도 물론 멋있지만. 이병헌씨 만나면 항상 운동 이야기를 하는데, 둘이 붙으면 상당히 치열했을 거다. (웃음)”
화양연화를 위해 달려가는 사나이, ‘연기’라는 단어를 가장 빈번하게 입에 담던 이 천생 배우가 이상하게 신선하다면 되새기듯 느릿하게 펼쳐놓던 그의 연기론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습관처럼 차선을 선택하던 우리에게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안길 그 다짐에. “내가 맡은 역할에서 베스트를 끌어내고 싶다. 어마어마한 빌딩이든 작은 오두막이든 공들여 짓고 싶다. 당당하고 싶다. 더욱 남들과 다른 행보로 배우 인생을 살고 싶다. 매번 최선을 다했고, 작품 하나하나가 무척 소중하다. 나는 연기의 신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든지 연기를 못 할 수 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잘하고 싶고, 못 하면 언제든지 혼나고 반성하고 깨우쳐서 또다시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