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있습니다
영화적으로 미비하나 놀랍게도 그 미완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호의적 해석을 낳고 있는 영화 <파주>는, 그 때문에라도 관심을 갖고 말해질 자격이 충분하다. 쓴소리조차 무색한 영화에 비한다면 필시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많은 호평이 있었으니 이견이 하나쯤 첨부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다. <파주>에 관한 호의적 평가들로는 <씨네21>에 실린 주성철, 김용언, 남다은의 글을 귀담아들으면 좋겠다. 드물게 김봉석만이 <씨네21>의 20자평에서 “인물과 이야기, 어디에도 논리와 일관성은 없다”고 비판적 태도로 잘라 말했다. 나는 <파주>에 대한 그의 평가에 공감한다. 하지만 스무자 정도의 요약으로 재단될 만큼 이 영화가 간단치는 않다. <파주>의 인물과 이야기에 논리와 일관성이 없는 것이 아니다. 다른 종류의 어떤 집요한 논리와 일관성이 이 영화를 다스리고 있어 그런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이다. ‘무언가 부재하다’는 것과 ‘무언가 강력하게 존재하는 것이 부재함의 인상을 주고 있다’는 건 다른 문제이며 다른 진술이다. 전자가 아니라 후자의 관점에서 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개인적인 인상으로만 먼저 말하자면 <파주>는 결국 닿고자 했던 목적지에 닿지 못하고 표류하는 상태에서 끝난 것 같다. 나는 이 영화가 표류하는 느낌을 준다, 가 아니라 표류하고 있는 상태다, 라고 쓰고 있다. 이 영화의 만듦새에 헐거움이 있다는 뜻이다. 나는 의외로 파주의 만듦새가 다소 헐겁다고 보는 편인데 여하튼 만듦새와 무관하게 호의는 존재할 수 있으니 그건 그 자체로 인정하자. 그런데 이때 쟁점은 <파주>에 관한 대부분의 호의적 평가의 근거가 제시될 때 ‘안개 같은 영화, 모호한 영화, 형부와 처제 사이의 금지된 사랑에 대한 묘연한 심리드라마’라는 쪽으로 말해진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그건 관객 혼자 만들어낼 수 있는 감상이 아니고 영화쪽에서 걸어오는 서술에 대한 긍정이거나 합의일 가능성이 더 크다. 문제는 이 합의과정에 동참할 것인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곳, 어떤 식으로건 관념적인
이 영화가 어렵다, 애매하다고 말하는 쪽은 보았어도 수긍하기 어렵다는 쪽을 거의 보지 못했다. 왜 수긍하기 어려운지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아예 보지 못했다. 어렵지만 어쨌든 수긍하도록 만들어져 있다는 생각을 대체로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안개처럼 다가와 붙잡히지 않는 신비로운 영화로 인식되는 <파주>에는 그러나 앞서 말한 어떤 집요한 논리와 일관성이 진주해 있고 그것이 실제로 사태가 그렇지 않은데 그렇다고 믿게 만들고 있으며 그럴 때 우리는 환상이 여기 서성이고 있음을 감지해야 한다. 안개를 일으키는 환상이 있다면 그건 무엇일까. 그러므로 질문은 이것이다. <파주>는 어떤 환상을 기술하기에 이 영화에 관한 지대한 해석의 사랑을 끌어내는 것일까. 지금은 <파주>의 환상에 대해 말할 시간이다.
영화는 개봉 전부터 두 가지 상징적인 제시어로 자기의 영화적 정체성을 예고해왔다. 하나가 ‘파주’이고 나머지가 ‘안개’다. 이 두 낱말의 조합 때문에라도 나는 인터넷에 이 영화의 후기를 올린 몇몇 블로거들처럼 한국문학 속의 한 지명으로 이끌린다. 당연한 일이다, 그곳은 ‘무진’이다. 박찬옥이 은연중 파주를 가상의 소도시 무진처럼 보이고 싶어 했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곳으로 나의 생각이 이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1964년에 나온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의 무진은 안개를 명물로 가진 가상의 소도시다. “서울에서의 실패로부터 도망해야 할 때거나 하여튼 무언가 새 출발이 필요할 때(<무진기행>)” 주인공 윤희중이 찾아들던 곳. ‘안개에 휩싸인 채 도사리고 있는 음험한 상상의 공간, 지도위의 어느 곳도 아니면서 도처에 널려 있는 도시, 일상에 밀려 변방으로 쫓겨난 아득한 도시, 문득문득 삶의 한복판을 점령해 들어오는 신기루의 도시’(김훈), ‘어촌도 아니고 농촌도 아닌 규정 불가능한 공간, 안개에 둘러싸인 상상적 관념적 공간’(신형철).
<파주>에도 안개가 상주해 있다. 게다가 이곳도 신기루의 도시, 규정 불가능한 상상적 관념적 공간으로 보인다. 누군가는 여기 머무르고 있고 누군가는 들고 난다. 애써 비교하자면 중식이 아니라 은모가 윤희중인 것 같고 중식은 하인숙에 가까울 것이다. 혹은 은모가 파주에 들어올 때 택시에 함께 탔던 나이트클럽 사장(이경영)은 <무진기행>의 미친 여자처럼 당신은 파주로 들어왔습니다(혹은 지금 파주를 벗어나고 있습니다)를 알리는 표지판쯤 될 것이다. 물론 그 유사성에는 빈틈이 많고 두 작품 사이에는 차이가 많다. <무진기행>의 무진은 변화의 징후를 갖지 않지만, 아이의 화상과 한 여자의 죽음과 사랑할 수 있었으나 그러지 못했던 관계로 한 타래 얽혀버린 <파주>는 갑자기 솟아나는 세계의 융기가 있다. <무진기행>에는 세계에 대한 결론이 없지만 <파주>에는 세계에 대한 결론이 징후적으로 내정되어 있다. <무진기행>에서 하인숙에게 보내려고 썼으나 찢어버린 편지로 하인숙에 대한 윤희중의 연모의 수준을 알기란 어렵지만, <파주>에서 은모를 위한 중식의 마음은 이제 그의 말과 행동을 따라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무진기행>을 빌려 <파주>를 말하는 것에는 무엇보다 이곳이, 안개 낀 파주가, 말 그대로 신기루처럼 느껴지고 변하지 않는 관념의 섬처럼 종종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곳은 어떤 식으로건 관념적이다.
‘솔직한 막연함’의 설득력은 있으나
그렇다면 <파주>는 전적으로 관념만을 다루는가. 짧게 덧붙여야 할 한 작품이 더 있으며 이번에는 문학이 아니라 영화다. 김소영이 적절하게 지적한 것처럼 <파주>는 더도 덜도 아닌 10여년 전 일산이라는 도시를 떠올리게 한다. 그곳의 도시 개발이 한창일 때 배경으로 만들어진 이창동의 <초록물고기>를 불현듯 생각나게 한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서울 외곽지역의 저개발의 기억들은 현실에 떠밀려 상실되어가고 소실되어가는 사람들의 주거의 현장을 만들어낸다. <파주>는 분명 서울 외곽의 삶이라는 발전과 소실에 대한 지역적인 구체성을 안고 있다. 이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구태여 <파주>를 말하기 위해 <무진기행>과 <초록물고기>를 우회한 이유가 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는 <파주>에 대한 일차적 환상 하나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무진이 일견 관념적 장소인 것처럼 파주도 그러하다. 안개는 그때 이 영화의 인상에 큰 영향을 미친다. 둘째, 하지만 한편으로 <초록물고기>의 일산이 현실의 현저한 저개발의 기억이었던 것처럼 <파주>의 파주는 재개발의 현실적 싸움터다. 중식과 은모는 그곳 철거대책위원회에 몸담고 철거 용역들과 대치 중이다. 그러니까 <파주>는 한쪽으로는 관념적, 혹은 비현실적인데 또 한쪽으로는 현실적이다. 박찬옥은 비현실과 현실 사이에 인물들을 밀어넣는다. 이 지점은 간단치 않고 더 나아간다. <파주>의 비현실성은 중식과 은모의 미완의 관계라는 심리적 긴장상태를 은연중에 보장한다. 한편 현실적 상황은 저 밖의 괴물들과 싸우는 활동가(중식)의 사회적 믿음으로 나아간다. 이렇게 이중의 계통을 꾸린다. 의미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더 깊어져, 미학과 윤리학으로 번진다. 비현실적인 파주에 대한 인상과 그 안에 있는 미완의 관계는 안개의 미학으로 심화되고, 현실적 싸움과 그 싸움을 이끄는 활동가와 주민들의 투쟁은 윤리학으로 심화된다. 미학과 윤리학. 이 둘의 상승적 기운과 효과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영화에는 그러니까 중요한 한 순간이 있다. 투석과 화염이 난무하는 곳을 느린 화면으로 지나친 다음 건물 위로 올라간 은모는 물대포를 맞으며 용역 깡패들과 싸우는 중식에게 “왜 이런 일을 하세요. 이 일이 형부한테 무슨 보람이 되죠?”라고 문득 묻는다. 중식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글세… 처음엔 멋있어 보여서 한 것 같고 그 다음엔 내가 갚을 게 많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던 것 같은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 그냥 늘 할 일이 생기는 것 같아. 끝이 안 나”라고 답한다. 선언적이기는커녕 최소한의 자신감도 결여되어 있는 이 말, 그러나 어떤 선언보다 울림이 있는 이 말을 듣는 순간, 이 사람의 윤리를 근거로 이 영화의 미학을 온당하게 믿고 싶어진다. 저 불확실의 윤리, <파주>에는 안개가 낀 것처럼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지금 몽롱하구나, 라고. 그가 자신의 활동에 대한 적절한 이유를 대지 못할 때 그 솔직한 막연함이 영화 일단의 막연함에 대한 믿음의 근거로 받아들여지는 환상이 작동한다는 것이 지금 이 부분에서 나의 요점이다. 물론 이 환상은 받아들이기에 나쁘지 않다. 그 감정의 파동은 아름답다.
‘영화를 보는 동안’ vs ‘영화를 보고 나서’
하지만 문제는 지식인 남자의 윤리적으로 올바른 그러나 가식 떨지 않고 이유를 찾지 않은 그의 대답이 이 영화의 미학적 행위를 결정적으로 관할하고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는 데 있다. 이 장면이 영화 <파주>에서 가장 공들여 찍은 장면 중 하나라는 사실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우리는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그 남자 중식의 고뇌에 기원한 망설임과 이 영화의 미진함을, 그리고 그 남자의 세계에 대한 근심이 <파주>의 세계에 대한 근심인 것처럼 받아들여져 그의 막연함이 이 영화의 막연함에 대한 준거로 삼아지는 것을. 이때 인물의 고뇌를 통하여 윤리에 빚진 다음 <파주>의 미학에 응당함을 부여하는 잠정적 결론에 관객은 스스로 도달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그런 다음 이 영화는 안개 같은 것이라고 탄식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일단 이 환상은 너무 아름다워서 한번 믿으면 회피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이 해석의 덫을 경계해야 한다. <파주>의 미학과 <파주> 속 특정 인물 중식의 대의적 윤리는 아무 상보적 관계가 없다. 이것이 걷어내야 할 첫 번째 <파주>의 환상이다. 그의 윤리는 올바르지만 <파주>가 애매해지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러니 더 큰 환상을 말할 차례다.
이렇게 재차 물어보자. 정돈되지 않고 미완의 느낌을 주는 <파주>의 인상이 주인공의 윤리와 작품의 미학을 혼동하는 것에서 오는 오해라고 하자.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가. 아닐 것이다. 그의 윤리는 그의 것으로 두고 이번에는 영화의 구조에 대면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혹시라도 이 영화가 모호하고 애매하다는 것은 이야기, 즉 <파주>의 서사가 그러하다는 것인가. <파주>의 서사는 ‘영화를 보는 동안’ 단숨에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서’ 이 영화의 서사를 요약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나는 많이 보지 못했다. 아니 일반의 관객이 전체의 이야기를 설명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들 중 누구라도 이것이 형부와 처제의 금지된 사랑 이야기라고 자신있게 일축하는 건 자주 보았다.
이때 ‘영화를 보는 동안’이 아니라 ‘영화를 보고 나서’라는 표현에 유의해주기를 부탁드린다.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이야기가 어렵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 이야기를 요약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는 건, 또는 그렇게 생각한다는 건 무슨 뜻일까(영화를 보고 나서도 도저히 이야기가 요약되지 않는 영화들이 있다.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들이 그렇다). 그 말에는 차이가 있다. ‘서사’와 ‘신의 배열’은 미묘하게도 실상 다른 영화적 항목이다. 좋은 영화에는 그 둘 사이의 조화가 필요하다. <파주>는 신들의 관계를 느끼기에 어렵도록 구성되어 있는 것 같다. 그것이 보는 동안 서사 파악의 난점을 불러오는 실제적인 이유다. <파주>는 의도적으로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이 이야기에서 미로에 빠지도록 신들을 배열하고 있다. 하지만 보고 나면 이야기는 요약할 수 있다. 그건 어떻게 가능한가. 결정적으로 “은모야, 난 단 한번도 너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어”라는 말이 등장할 때 대부분은 이 영화의 서사적 열쇠를 쥐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한마디의 대사는 문득 우리가 <파주>의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안심을 심어준다. 지적한 것처럼, 이로써 많이 사람들이 이 영화를 금지된 사랑으로 요약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영화구조상 좀더 복잡한 문제가 있다. 결론으로 가기 위해 그걸 말해보자.
방치된, 수습되지 않은 것들
박찬옥의 <질투는 나의 힘>을 몇 차례 보아도 계속 남는 인상은 영화가 지루하지 않은데 무언가 펼쳐놓은 것들을 채 수습하지 못하고 방치된 상태로 끝맺는다는 것이다. 영화의 음성이 과장되지 않고 과묵하고 차분하여 그것에 끌려 보게 되는데 그러자면 좀 주마간산 격이다. 물론이다. 수습되지 않는 것은 수습되지 않는 대로 놓아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방치되어 아름다운 영화가 있다. 하지만 어떻게 그 방치됨을 고안할 것인가는 영화의 몫이다. 그냥 놓아지는 것이 아니라 놓아진 것 같은 느낌을 주도록 고안되는 것이 방치를 아름답게 하는 영화의 형식이다.
박찬옥의 <파주>에서 그 방치됨은 고안되지 않고 불철저하다. 편집 전문가가 아니므로 그냥 한명의 관객으로 말하자면 <파주>는 커팅 포인트(숏의 편집점)가 불안한 지점이 많다고 느껴진다. 혹은 신 배열이 좋지 않아 내내 서성이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신이 서성이는 것과 다른 평자들이 지적한 이 영화의 안개 같음, 모호함은 멀고도 다른 문제일 것이다. 물론 박찬옥은 세계의 전체가 있고 그 전체의 일부를 어떻게 분산시켜 보여주느냐가 중요하다고 보는 것 같다. 남다은이 적절히 지적한 것처럼 “영화가 모호함을 끌어안고 대면하며 세상 안에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파주>의 힘이 있고 그 모호함이 영화 서사상의 모호함이 아니라 세상의 모호함을 대하는 이 영화의 태도”일 수 있다. 이것이 원래 박찬옥이 세계를 보는 방식인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인물의 관계가 마침내 영화를 보고 나서 서사로서 완성되는 것에 비해 장면(신 또는 한신 안에서의 숏들)들의 밀도는 종종 중요시하게 생각되지 않는 것 같다. 이 점이 바로 영화를 보고 나서 서사는 요약할 수 있지만 영화를 보는 동안 서사를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든다.
이런 예를 들고 싶다. 언젠가 극장에서 한 영화의 예고편을 상영한 다음 연이어 그 영화의 본편을 상영한 적이 있다. 이 행태가 이미지 학습의 효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그 자리에서 경험했다. 적어도 그 극장 안에 있던 사람들은 예고편이 미리 짚어준 영화의 포인트마다 정확히 한번도 빠짐없이 반응하여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관객의 웃음은 준비되어 있었다. 정확히 예고편에서 알려준 지점에서 웃는 것이 학습의 효과였다. 예고편은 언제나 그 영화의 전부가 아니라 본편을 위한 전략이다. 당연하지만, 예고편은 본편의 신 순서를 전략적으로 뒤섞는다. 그때 예외없이 편집이 중요하며 그때 몇개의 신들을 배치하는 선택의 기준이 되는 것은 첫째 어떻게 궁금증을 유발할 것인가이며, 그러기 위해 둘째 어떻게 방점들을 찍어야 할 것인가이다. 마침내 그걸 다 보고도 관객이 얼마간은 알았다고 생각하지만 또한 얼마간은 알지 못한다고 느껴야 뛰어난 예고편이다. 그러므로 모든 예고편이 가져야 할 최상의 비수는 환상에의 기술이다. 본편을 괄호 안에 넣고 지금 그 본편에 대한 환상을 일구는 것이 예고편이 해야 할 일이다.
이것은 뛰어난 예고편이다
말을 돌릴 필요가 없겠다. 비유컨대 <파주>는 뛰어난 예고편이다. 나는 안개 같음, 모호함, 등으로 묘사되는 찬사가 <파주>의 이 예고편식 구조가 지닌 환상의 기술에 대한 환호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파주>는 111분짜리 예고편인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이 영화를 보고 나면 <파주>의 본편은 따로 있을 것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파주>는 세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그 형성의 의지가 있었음을 예고하는 데서 그친다. 이것이 이 영화가 세계를 대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에 따른 ‘미스터리 구조의 플래시백’과 ‘방점의 에디팅’은 구체적 기능이다.
영화에는 두번의 문답이 있다. 은모가 학생들과 공모하여 중식을 놀렸을 때 중식이 “왜 그랬니”라고 물으면 은모는 “우리 언니 건드리지 마”라고 말한다. 얼마 뒤 장면에서 중식이“3년 전에 왜 그랬니”라고 물으면 은모는 “혼자 못 살아간다는 게 두려워서요”라고 답한다. 시간의 혼란을 느끼며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는 재빨리 답을 찾아야만 한다. ‘언니를 건드리지 말라고 한 건 무슨 뜻인지 알 것도 같은데, 그건 8년 전이다. 그런데 3년 전에 왜 그랬냐고 묻는 걸 보면, 이 질문은 그 뒤에 다른 일이 있었다는 뜻이다.’ 물론 이런 식의 빈칸을 남겨두고 오가는 미스터리 구조는 흥미진진하다. 우리는 이후에 알게 된다. 첫 번째 대답과 두 번째 대답에 모두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두려워서요’와 ‘당신 밑에서 살아가는 게 두려워서요’라는 중의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많은 신이 매번 뒤로 밀리는 답안지처럼 수수께끼 같다. 우리는 첫 장면에서 확신하지 못하고 유사한 다음 장면에서 확신한다. 혹은 영화를 보는 동안 확신하지 못하고 본 다음 확신한다. 이때 중요한 점은 이 확신이 사후적 승인이라는 데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녀의 욕망과 두려움에 대한 수수께끼 같은 수신호를 먼저 받은 다음, 그 대답으로서의 정보는 나중에 받게 된다. 그런데 궁금하다. 그렇다면 그와 그녀의 욕망이 전이되는 순간은 언제였던가? 욕망이 전이되는 장면을 보지 못했는데 그들이 서로 욕망한다고 우리가 확신하게 된 것은 아닌가. 욕망의 장면에 대해 우리가 본 경험치는 부족하고 사후에 정보로서만 그렇다고 인정받도록 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솔직하고 싶다. 당신은 <파주>를 ‘보는 동안’ 은모의 욕망과 중식의 욕망을 접한 적이 있는지 궁금하다. 은모가 계단을 급히 올라서 중식의 안위를 살피고, 연행된 그의 전화를 받으며 우는 것으로? 한발 물러서서 그것이 암시일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암시를 배열하는 것으로 욕망을 전이시키지 못할 것이다.
오직 방점뿐이군
우리는 <파주>가 미스터리를 위한 플래시백 구조라는 걸 이상에서 말한 셈이다. 이런 구조에서 중심이 되는 건 어디에 방점을 찍는가 하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미스터리는 방점이 좌우한다. <파주>는 시간을 여러 차례 옮겨가고 있는데 그때마다 새로운 방점을 제시한다. 그중에서 영화의 중·후반부에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의 장면이 연이어진다. 은수가 죽고 중식과 은모는 단둘이 산다. 같이 트럭에서 장사하는 중식과 은모의 신이 지나면 곧장 시장에서 브래지어를 함께 고르는 중식과 은모의 신이 이어진다, 그 다음 공부방에서 중식과 은모가 돌아올 때 집 앞에 자영이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아기 사진을 보여주면 중식은 운다. 그 다음 신에서 자영의 전화를 받고 중식은 활기차게 나간다. 그 다음 신에서는 중식과 은모의 집에서 회의가 열린다. 자영이 중식과 은모의 관계를 염려하고 은모가 듣는다. 그 다음 중식이 연행되었다고 자영이 은모에게 알려주고, 은모는 유치장으로 중식을 만나러 간다. 오는 길에 은모는 인도행을 결심한다. 바로 이어지는 다음 신, 현재로 돌아와 장미아파트에서 용역 깡패와 싸우는 중식에게 가서 은모가 질문을 던지고, 연이어지는 신에서 마침내 중식의 고백이 나온다.
몇개의 신을 놓쳤을 수도 있지만 대략은 맞을 것이다. 이 신들의 연결은 벅차다. 신마다 거의 하나씩의 외상 또는 전환점 또는 사건들이 놓여 있다. 따지자면 어마어마한 변화와 진실 출몰의 지점들이 총망라 되어 있다. 이 영화가 포괄하던 앞과 뒤의 문제가 모두 터져나오는 지점들이다. 그런데 영화에서 그걸 보여주는 신들은 오래 머무르거나 망설이지 않고 인물의 아주 일부분적인 상징적 제스처만 보여주고 넘어간다. 가령 브래지어를 고르는 중식과 은모는 은수를 잊은 것 같다. 다 나은 아기의 사진을 본 중식은 외상에서 벗어난 것 같다. 그러다 갑작스런 연행을 당하고 그런 그를 본 은모는 진짜 멀리 가는 가출을 결심한 것 같다. 그러나 바로 다음 장면에서 그녀는 이미 돌아와 있고, “왜 이 일을 하느냐”는 갑작스런 질문을 던진다. 그 다음 은모의 방을 찾은 중식과 은모는 끌어안는다. 이 뒤의 장면들을 거론해야겠지만 이 정도의 예시로도 벅차다.
이 연속된 신에서 우리는 무엇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아니 무엇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여기에는 너무 쉽게 물러서는 트라우마와 너무 많이 출몰하는 새로운 사건들이 들어찬 것은 아닌가. 영화의 구조인 신이 내밀하게 상황을 포괄하지 않고 넘어가버리는 방식의 반복으로 은수가 죽은 뒤 단지 몇신 만에 많은 걸 털어버리거나 새로 문제를 설정한다. 숏과 신이 그 정보와 변환의 홍수 속에서 미처 세계의 모호함과 아픔을 다 담지 못하고 매번 부서지면서, 다음 신, 그 다음 신으로 넘어가다가 마침내 “한번도 사랑하지 않은 적 없다”는 대사에 모든 걸 맡기고 있다. <파주>는 매우 많은 신에서 사건이나 정보의 매듭을 너무 세게 묶은 다음 때로 납득할 수 없을 만큼 그 매듭을 너무 쉽게 끊어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세게 묶은 다음, 쉽게 끊어버리는 이 구조적 결단은 <파주>에서 지속적이며 일관적이며 잘못된 선택 같다.
금지된 사랑 혹은 그들은 사랑하였다.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결과를 말하기 위해 괄호 속에 쳐진, 존재했어야 할 그 순간의 감정의 부재함은 안타깝다. 서사는 되돌아와서 질문에 대답을 줄 수 있지만 감정의 신의 빈칸은 이미 시간을 따라 지나가버렸다. 박찬옥은 영화의 리듬으로 세계의 리듬을 형성하는 것에 골몰하지 않고 영화의 방점찍기로 전체라는 세계를 예고하는 것에 골몰한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가 예고편처럼 보인다는 건 그런 뜻이다. 방점에 골몰할 때 영화는 신별로 개별의 정보를 다루고 플래시백으로 숨긴 뒤 그것이 거대한 세계의 이면인 것처럼 행세하게 된다. 박찬옥은 방점의 사이사이를 느끼게 하기보다, 그 방점을 너무 여러 번 찍는 것에 주력했던 게 아닐까. 나는 그런 방점의 연쇄가 묶어낸, 숏과 신이 세계를 버티지 못하고 뒤로 넘겨지는 그 영화적 세계관에 공감하기 어렵다. 그건 잘 만들어진 텔레비전 시트콤이나 유능한 예고편도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보는 동안의 감흥이 있어야
누군가는 기술적 문제에 집착한다, 이것이 정색하고 물어야 할 만큼 중요한가, 라고 반문할 것이다. 중요하다. <파주>의 서사가 ‘무엇을(그들은 사랑했다)’이라는 목적어를 결코 놓치지 않은 것에 비해, <파주>의 신의 배열들은 ‘얼마나(그들이 지금 이 순간 이만큼 사랑하고 있다)’라는 영화적 경험의 현재적 밀도를 지나치게 놓쳤기 때문이다. 때로 영화에서는 그것만이 전부다. 사후적으로 그들이 얼마나 사랑했는지 설명할 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가 영화를 보고 있는 그때에, 그 흐르는 시간에, 목도하고 대면한 그 순간에 느낀 맨눈으로서의 감정의 덩어리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거기에 바로 드라마틱한 것과 시네마틱한 것의 차이가 있다. 나는 보는 동안 감흥을 미루고 보고 나서 해독으로 뒤늦게 감흥을 되찾는 영화를 지지하지 못하겠다. 그러므로 박찬옥의 <파주>가 미완성 교향곡인 것처럼 말해지는 것은 의아한 일이다. 우리는 그 순간 음악을 들어야지 악보를 해석한 다음 음악이 훌륭하다고 말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 언젠가 <파주>의 본편을 보게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