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레인] “이건 꽤 괜찮은 승부다”
2009-11-30
글 : 이화정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닌자 어쌔신> 레인

비가 할리우드에 진출했다. 워쇼스키 형제와의 조우를 알린 <스피드 레이서>의 단역이 예고편이었다면, 이번엔 본편이다. ‘꿈을 이루었다’는 그에게 <닌자 어쌔신>이 사건이듯이, 한국 관객에게도 ‘레인’이란 타이틀의 화면 점령은 전에 없는 사건이다.

비는 유독 이름이 많이 필요한 스타다. 연기자로 그가 영역을 확장할 때, 그는 본명 ‘정지훈’을 앞세워 자신의 변화를 알렸다. 그는, 자신이 정지훈으로 불린다면 그간 ‘가수 비’로 보여주었던 무대 위 퍼포먼스의 흔적을 떨치고 배우로서의 정체성을 획득할 수 있을 거라고 강조했다. 본명의 사용은 자신이 그만큼 연기에 강한 집착을 보인다는 진실성을 비추는 효과적인 마케팅 수단이 되어주었다. 그가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그래서 공백을 설명할 누군가의 새로운 헤어스타일, 혹은 성형수술과 비슷한 맥락으로 읽힌다. 그는 갑작스레 스타일을 바꾼다거나 외꺼풀의 눈에 칼을 대는 대신, 달라진 이름 하나로 변화를 각인해왔다. 첫 할리우드 진출작 <스피드 레이서>부터 그는 비도 정지훈도 아닌 ‘레인’이라는 칭호로 자신을 어필해왔다. 미국의 유치원생도 모를 리 없는 기초단어 ‘Rain’은 할리우드 시장에서 그를 알릴 절체절명의 무기였다.

크레딧의 힘은 생각보다 컸다. <닌자 어쌔신>에서 그가 98분 동안 기예에 가까운 무술을 선보일 때보다, 혹은 잦은 클로즈업으로 그의 외꺼풀이 전에 없이 생경해 보일 때보다 더 놀라운 장면은, 영화의 시작 워너브러더스의 로고 뒤에 뒤따라 새겨진 ‘Rain’이라는 타이틀이었다.

완성도를 논하기에 앞서 <닌자 어쌔신>은 출연 자체로 이미 화제가 될 수밖에 없는 영화다. 메이저 제작사 워너브러더스, 제작자 조엘 실버와 워쇼스키 형제, 웬만한 블록버스터에 버금가는 2800개관에서의 개봉, 그리고 그가 맡은 영웅 라이조까지. 고아로 자라 비밀 닌자 양성 조직 ‘오주누파’에 의해 길러진 인간병기 라이조는 출중한 무예로 사부의 눈에 드는 수제자였지만, 탈출을 시도한 조직의 일원이자 첫사랑인 친구의 죽음 이후 조직을 배반, 도망자가 되어 조직의 와해를 위해 싸운다. 정의를 향해 도전하는 할리우드 영웅 역할이 인종과 무관하게 그에게 주어졌다. 더군다나 할리우드에서 나고 자라 언어를 습득한 동포도 아닌, 그는 말 그대로 한국에서의 활동만으로 발탁된 행운아라는 점까지 덧붙여야겠다. ‘할리우드 진출’이라는 홍보효과만 노리고 실상과 달리 과장되게 홍보하는 영화들이 아닌, ‘진짜’ 할리우드 주류영화를 대표하는 배우가 된 셈이다. “아시아인으로서는 첫 단독 타이틀롤을 맡은 거다. 생각해봐라. 성룡은 항상 파트너가 있었다. 그가, 30대 후반에 시작한 자신보다는 20대 후반에 시작한 내가 더 가능성이 많으니 잘해보라며 격려해주더라.” 레인은 자신이 획득한 지금의 지위를 부인하려 들지 않는다.

그는 엄청난 행운과 그에 따른 노력을 지불한 지금의 자신이 대견스러운 듯 보였다. 자신감 뒤엔 그가 할리우드에서 흘린 말 그대로의 땀방울이 있었다. <닌자 어쌔신>의 메인 타이틀은 <스피드 레이서> 때부터 ‘일부러 눈에 띄려고’ 촬영이 없는 날에도 가서 연습하고 지켜보며 신뢰를 쌓아 획득한 자리였다. 혹독한 연습과 촬영을 자처하고 나선 건 그래서 다른 누가 아닌 레인 그 자신이었다.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내가 뛰어내리고 내가 차량과 충돌하고 싶었다. 스턴트맨 없이 100% 내가 다 하고 싶었다. 너무 적극적이다 보니 오히려 스탭들이 나를 말릴 지경이었다.” 그렇게 위험 수준 고난이도의 장면 중 80%가 레인의 몸으로 직접 만들어졌다. 영화 속 놀라운 장면 중 하나인, 침봉 가득한 판에서 물구나무서기하는 장면 역시 CG가 아닌 레인의 연기다. “푸시업을 하는데 토할 것 같더라. 첫달에 하나, 둘쨋달에 두개, 셋쨋달에 세개, 마침내 8개월이 돼서 20개 정도까지 하게 됐다. 찍는 날, 내가 전율이 돋았다. 사람은 역시 안되는 게 없더라.” 고된 촬영과 연습이 병행되는 기간. 토하고 밥 먹고, 먹는 대로 토하기를 거듭, 촬영을 하는 동안 속은 엉망이 되어갔지만, 독한 마음은 신기하게도 고스란히 레인을 지탱해주었다.

할리우드영화를 찍는다고 했을 때 그가 접한 가장 흔한 질문은 ‘왜 아시아 배우들은 매일 액션 장르뿐이냐’는 비난 섞인 질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비난의 지점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건 그간 몸소 체험한 미국이라는 시장에 대한 분석과 전략과 맞물린다. “<닌자 어쌔신>을 빈약한 스토리라고 비난해도 괜찮다. 액션 장르의 특성상 분명 즐길 수 있는 지점이 있다. 중요한 건 이 영화로 레인이라는 캐릭터가 할리우드 시장에 얼마냐 각인되느냐 하는 문제다. 설사 흥행에 성공하지 못해도 이름은 남을 수 있다. 그럼 된 거다. 그럼, 다음 스텝으로 나아갈 수 있다.”

워쇼스키라는 백그라운드는 그가 가수로의 성공을 있게 해준 박진영과 조우했을 때와 같은 크기의 것이다. 오직 아시아시장 진출을 위해 약삭빠르게 그에게 접근했던 무수한 기획사와 달리, 워쇼스키는 순수히 그의 스타성만 보고 그에게 투자해준 가장 영향력있는 버팀목이었다. “왜 내 몸 혹사해서 그들 좋은 일만 해주겠나. 난 자신있으니 내 가치를 제대로 평가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레인은 지금 그 튼실한 버팀목을 딛고 달려와 결과를 기다린다. “지금도 미국에서 음반 제안은 많이 들어온다. 그런데 아직은 그 제안을 모두 유보하고 있다. <닌자 어쌔신>이 얼마나 잘될지 모르니까. 잘된다면 이제 가수가 아닌 연기자로 활동하고 싶다.” 이미 이번 성과에 따라 2편과 3편의 제안이 기다리고 있는, 이건 꽤 괜찮은 승부다. “인생은 단정하기 힘든 도박 같다. 사실 내가 앞으로 어떻게 돼 있을지 나조차 궁금하다. 확실한 건 결과를 걱정하는 대신 내게 온 기회를 잡는 것이다.”

스타일리스트 박혜정, 정윤경·의상협찬 D&G, 송지호옴므, IW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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