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종말. 알다시피 얘는 수천년의 인류 역사 동안 그 탁월한 흥행성을 검증받아온 역사와 전통의 나쁜 놈이다(근데 얘는 사람도 아닌데 어떻게 나쁜 ‘놈’이라 칭할 수 있느냐고. 이 칼럼이 원래 좀 그래). 얘는 지난 1999년 8월15일, 노스트라다무스 예언이 파투난 이래 일시적 슬럼프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그로부터 불과 10년도 지나지 않은 21세기에 들어 지구 온난화라는 새로운 돌파구를 발견, 또다시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특히 소행성, 화산, 해일, 태풍, 지진 등 지금까지 등장했던 각종 지구과학적 나쁜 놈들이 일개 마을, 기껏해야 일개 도시를 박살내는 정도에 머물렀으면서도 ‘지구 종말’을 사칭해왔던 것과는 달리 근자에 개봉된 <2012>의 지구 종말은 말 그대로 5대양 6대주를 남김없이 초토화함으으로써 ‘지구 종말’이라는 타이틀에 가장 어울리는 면모를 보여준다. 게다가 <2012>의 지진이나 화산재는, 주인공의 뒤만 집중적으로 쫓아다님으로써 지구과학적 나쁜 놈의 지적 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던 <투모로우>의 얼음이 보유한 지능을 그대로 계승하는 바, 이 추세대로라면 5년 내에 ‘레이저 유도 우박’이나 ‘음성인식 산사태’ 등을 목도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라, 필자,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지구 종말’이라는 명칭의 타당성이다.
물론 말씀드리면 스포일러가 되긴 하겠으나, 영화 시작된 지 5분도 지나지 않아 오차범위 2% 이내로 예측 가능한 그 뻔한 결말을 미리 안다고 해서 크게 재미가 스포일될 것 같지도 않은 <2012>의 마지막 장면을 보더라도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지구 종말’이라는 단어가 부당하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왜냐. 이 영화의 마지막 대목에서 화면 가득 비치는 지구를 보시라. 그 파랗고 동그란 모습은, 제작진이 그리도 근면성실히 땅을 쪼개고, 화산을 터뜨리고, 바다를 넘치게 해도, 지구는 종말을 맞기는커녕 오히려 깔끔하게 리셋될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종말을 맞이한 것은 대체 무엇인가? 물론 그건 인간들이다. 그리고 인간들이 이른바 ‘과학문명’이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그리고 성찰과 절제가 결핍된 기술의 폭주를 ‘자연정복’이니, ‘통제’니 떠들어대는 오만방자한 정신세계다. 자연을 이리 깎고 저리 파헤치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행복해지게 된다는 신념 아래 막고 쌓고 공그리기를 일삼는 자들이 늘어놓는 횡설수설이다. 고로, 지금까지 우리가 지구과학적 나쁜 놈들의 내습을 통칭할 때 쓰는 ‘지구 종말’이라는 명칭은 마땅히 바로잡아야 한다. 그렇다. 그것은 ‘지구 종말’대신 ‘인간 멸종’이라는 명칭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기억하라. 인간에 대해서건, 지구에 대해서건, 파국을 부르는 것은 언제나 성찰없는 자들의 자기 확신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