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진의 점프 컷]
[김영진의 점프 컷] 무섭고도 슬퍼라
2009-12-04
글 : 김영진 (영화평론가)
삶의 쓰라림 앞에서도 웃는 천진함이 날 울린 우니 르콩트의 <여행자>

우니 르콩트의 <여행자>를 보고 스스로 당혹스러운 경험을 했다. 비슷한 소재를 다룬 김소영 감독의 <나무없는 산>에 대해 아쉬움을 적은 적이 있던 터라 이 영화에 별다른 불만이 없을뿐더러 꽤 감동을 받은 자산에게 놀랐다. 물론 <나무없는 산>이 못 만들었다는 게 아니다. 그 영화에도 충분히 감응했지만 뭔가 더 보여줄 것이 있는 상태에서 끝났다는 느낌을 줬기 때문이다. 몇달 전 이 칼럼에서 나는 그 영화가 고양이나 탈진 비슷한 경험에 관객을 이르게 하기 위해 조금 더 밀어붙였어야 하는 게 아닌가, 오픈 엔딩이라고 해도 그 미덕은 이미 오래전에 숱한 영화들에서 비슷하게 소진한 상투형이 될 위험은 없는 것인가, 라고 질문했다.

그런 맥락에서라면 <여행자>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게 될 줄 스스로 예상했던 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진희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고아원에 버려지고 거기 적응할 즈음 프랑스 사람들에게 입양된다. 영화는 거기서 끝난다. 김새론이 연기하는 진희의 투명한 얼굴, 공항입국대를 거친 아이의 망설임과 두려움이 섞인 표정에서 화면이 멈추는 것이다. 그때 울컥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왜 그랬던 것일까. 물론 하나의 이야기의 완결 지점으로 그 장면은 적정했다. 이제 그애에게는 인생의 다른 서막이 펼쳐질 것이다. 감독의 자전적 스토리는 거기서 멈춘다.

등장인물에 거리를 두는 시선의 절제

<여행자>의 품격은 등장인물에 거리를 두는 시선의 절제에서 생긴다. 하나의 그림처럼 뭔가를 그려놓았으니 관객이 온전히 감상하라는 태도의 산물이다. 알다시피 영화는 이 거리감을 좁힌 예술이다. 대륙과는 달리 예술에 대한 전통적인 거리감, 하나의 예술 대상으로 거리감을 두고 감상하는 전통이 약했던 신흥자본주의 강국 미국에선 예술작품 속의 등장인물에게 밀착하는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미국영화의 품격은 숱한 시점 화면과 매치 컷의 교환 속에서 몰입과 거리감의 적절한 균형점을 찾아내는 데서 나온다. 당연히 <여행자>에는 그런 시도가 없다. 흔히 말하는 예술영화 스타일인 것이다.

이 절제는 미학적으로 타당하더라도 식상한 구석은 없는 것일까. 영화제를 통해 소개되는 화제작들 대다수도 심리적 리얼리즘으로 시간을 압축한 미국영화의 주류양식에 대항하여 시간예술의 속성을 강조하는 긴 호흡의 영화가 여전히 대세인 것이 현실이다. <여행자>가 꼭 형식주의 영화라는 것은 아니지만 이 영화의 절제는 시점 화면의 남용을 경계하는 감독의 태도에서 나온다. 진희는 고아원에 와서 자신의 고통을 조금씩 객관화하는 방법을 배운다. 흔히 성숙이라는 말로 뭉뚱그릴 수 있는 단계를 거치는 것인데, 자전적인 체험에 기초한 영화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감독은 놀라운 거리감을 유지한다. 어쩌면 이것이 그의 희미한 기억을 재생하는 방법론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전통적인 대중영화의 문법대로라면 이 영화는 꽤 컷수가 모자라는 영화가 될 것이다. 영화에서 아버지와 헤어진 진희가 가장 격한 반응을 보이는 때는 건강검진을 하는 의사 선생님 앞에서인데, 그때를 빼면 진희의 감정은 외형적으로 폭발하지는 않는다. 의사 선생님에게 진희는 아버지가 새엄마와 결혼한 뒤 장난치다가 의붓동생을 다치게 할 뻔한 사건 때문에 자신이 고아원에 오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진희가 질투로 의붓동생을 죽게 하려 했다고 부모님이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때 진희는 꾹꾹 참고 있던 슬픔을 눈물로 펑펑 터뜨린다.

필사적으로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가려고 했던 진희가 그걸 포기하게 된 것은 원장이 진희의 고향마을을 다녀온 뒤 아버지 식구가 이사 갔다고 말해준 뒤부터다. 그 이후로 진희는 고아원에서 사귄 언니 숙희와 더 친해지는데 이 아이는 미국으로 입양하기 위해 일부러 예쁜 척하고 영어공부도 열심히 하는 현실적인 아이다. 그 아이와의 우정에 의지해 고아원 생활을 견디던 진희는 함께 입양가리라고 약속했던 숙희가 혼자 떠나가자 다시 극심한 외로움에 빠진다. 고아원 보모가 속이 터질 때 그런 것처럼 빨랫줄에 널린 옷들을 방망이로 실컷 두들겨 패도 상실감이 줄어들지 않는다. 이런 장면들에서 감독은 등장인물들의 시선의 연결을 극도로 아낀다. 어린아이 진희가 마음에 맺힌 포한을 빨랫감을 두들겨 패며 달래는 모습을 옆에서 보모가 물끄러미 지켜보지만 그녀의 감정의 농도를 충분히 전해줄 만큼은 아니다.

마지막에 폭발시키는 축적된 감정

나중에 아무도 몰래 진희 혼자서 죽은 새를 묻어준 구덩이를 파내고 스스로 들어가는 섬뜩하고 슬픈 장면에서도 화면의 연결은 담담하다. 아이들과 수녀님들이 모두 성당에 간 사이에 진희는 죽을 결심을 한다. 더이상 세상에서 맺을 인연이 절친한 친구와의 이별로 다 사라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장면에서 주인공의 심상을 드러내는 인터컷조차도 감독은 극히 아낀다. 외부에서 보면 별것 아니지만 당사자에게는 의미심장한 죽음의 의식을 담담하게 찍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감독이 고도의 지성의 소유자라는 걸 증명하기도 하지만 대중영화로선 지나치게 온도가 차가운 영화가 되게 만든다. 그런데도 어떤 축적된 감정이 생겼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된다. 앞서 말한 대로 진희가 혼자 프랑스 파리에 내리는 순간, 혼자 살아갈 것을 아이가 받아들인 것처럼 보이는 순간 울컥해지는 것이다.

아이의 결단이 있기 까지 숱한 잔인한 정경들이 그 애 앞에서 펼쳐졌다는 것을 나중에야 헤아리게 된다. 친아버지에게 버림받은 것은 물론이고 진희가 고아원에서 보는 것은 함께 있던 아이들 중 누군가가 서양 사람들의 입양아가 되어 떠나가는 광경이다. 입양기관 직원과 함께 고급차에 오르기 직전 고아원생들은 작별의 노래를 부른다. 이 장면의 감정적 온도가 영화 전체의 감정적 온도와 정확히 일치한다. 언뜻 가슴 아프고 슬픈 광경이며 눈물나는 상황이지만 그 이전에 이것은 매우 잔인한 광경이다. 입양이라는 배려와 보듬의 형식에서조차 소외된 아이들은 고아원에 남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도권의 그 후의에 맞추기 위해 아이들은 필사적으로 예쁘거나 잘난 아이로 보이기 위해 노력한다. 제도기관의 중재로 맺어지는 이 입양의 절차를 매번 영화는 강조한다. 거기서 기계적으로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 별로 슬퍼하지 않는 그들의 눈동자, 하나의 간택이 끝나고 또 다른 간택이 기다리는 고아원에서의 삶의 행로에 적응한 무심한 일상이 있는 것이다.

여주인공 진희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만큼이나 주변 세상에서도 충분히 불행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목격한다. 새의 죽음에서 본 필연적인 생로병사의 운명 말고도 어른들의 질서에서 불가피하게 초래된 약육강식의 질서와 그 속에서 더 나은 인연의 삶을 찾으려 안간힘을 쓰는 아이들의 좌절을 보게 되는 것이다. 고아성이 인상적으로 연기한 절름발이 소녀 예신은 고아원에 자주 오는 한 청년을 짝사랑하면서 남의 집에 식모로 가는 것에 저항했으나 결국은 서투른 자살 시도 끝에 팔려가는 것이나 다름없이 식모살이를 떠난다. 예신이 자살시도 끝에 살아났을 때 아이들 앞에서 참회하던 그녀는 아이들의 킥킥거리는 웃음소리에 자신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이제 막 살갗이 닿기 시작한 삶의 쓰라림 앞에서 이들이 보여주는 천진함 때문에 <여행자>는 무섭고도 슬픈 영화가 된 것이다. 감독의 창작자로서의 태도가 왜 중요한지를 이 영화를 보고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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