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영화읽기] 진정 이것이 기다렸던 이야기였어?
2009-12-10
글 : 남다은 (영화평론가)
기억이 주체에게 출몰하는 순간이 결여된 <브로큰 임브레이스>

<브로큰 임브레이스>가 이야기꾼으로서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역량을 재확인해준 작품이라는 데 대체로 동의하는 분위기다. 마술 같은 영화적 순간을 통해 이야기의 미로를 횡단하는 그의 능력을 부정하는 평을 본 기억은 없었던 것 같다. 나 역시 그의 영화적 재능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가 만들어낸 세상이 언제나 조금 과한 대접을 받는다는 생각을 해왔고, <브로큰 임브레이스>를 보면서도 역시 그랬다. 평자들이 그의 작품이 주는 영화적 도취의 순간, 혹은 감정적 파장을 말할 때마다 나는 설명하기 어려운 일종의 정서적 소외감 같은 걸 느껴왔다. 그리고 그것이 알모도바르 영화 속 무언가의 결핍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지독한 완결함의 의지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분위기에 압도되어 놓치고 마는 것들

흔히 누군가를 이야기꾼이라고 부를 때 그건 이야기의 내용적 차원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같은 이야기라도 얼마나 다르게 전달하는가의 문제, 그러니까 이야기 행위의 문제일 때가 더 많다. 알모도바르가 이 영화에 대해 “허구를 창안하는 과정에 대한 축하연”이라고 표현할 때, 그의 방점은 ‘허구’가 아니라 ‘과정’에 놓여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는 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을 자유롭게 뒤섞으며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 그중에서도 알모도바르 특유의 액자구성에 대한 신뢰가 있는데, 그것이야말로 상투적일 법한 이야기에 무언가 다른 문을 지속적으로 열어주는 열쇠라고 보는 것 같다. 물론 이런 구성방식이 알모도바르만의 것은 아니며, 새롭다고 말할 수도 없다. 다만 인간의 은밀하고 저속한 욕망의 연쇄를 ‘영화적’으로 형상화해내는 데서 알모도바르만큼 그 구조를 영리하게 사용하는 감독은 드물다는 것이다.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지만, 나는 이야기의 문이 열리고 또 열리는 이런 구조가 우리의 쾌감을 자극하는 만큼 그의 영화에 대한 우리의 착각을 작동시킨다고 생각한다. 즉 그런 구조가 종종 불러내는 환상과 몽환적인 분위기에 압도되어 우리는 그 문들이 정작 어느 방향으로 열리고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문제를 쉽게 지나친다는 것이다.

액자구성이 가장 흥미로워지는 순간은 이야기의 연쇄가 처음 이야기를 시작한 자의 지배를 벗어나 자체적으로 나아갈 힘을 얻을 때이다. 아무리 전체를 관할하는 감독의 존재가 전제될 수밖에 없을지라도 그가 사전에 계획하지 않은 어떤 틈, 혹은 사후에 우연히 발견된 잉여 같은 것이 불현듯 지나가는 순간들이 거기 존재한다. 말하자면 그런 구조 속에서 이야기가 두터워지거나 세밀해질수록 그 이야기에 포획될 수 없는 지점들이 늘어난다. 이렇게 표현해볼 수도 있겠다. 이야기꾼은 말해진 것들 사이에서 말해지지 않은 것을 상상하도록 남겨두길 잘하는 사람이다. 때때로 좋은 이야기는 말해진 이야기가 말할 수 없는 이야기의 실패 지점임을, 혹은 환상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브로큰 임브레이스>가 그런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어니스토 마르텔이라는 남자와 그가 연모하는 아름다운 비서 레나(페넬로페 크루즈)의 관계를 보여주는 과거가 등장하고 나서 영화는 맹인 작가인 해리의 현재로 돌아온다. 그때 레이 X라는 정체불명의 남자가 찾아와 아버지-아들에 관한 각본을 써달라고 부탁한다. 그의 등장을 계기로 영화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게 되는데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맹인이 되기 전 감독 마테오였던 해리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오랜 시간 봉인되었던 과거가 열린 시점은 그동안 해리를 보살펴온 유디트가 출장을 간 사이이며, 해리는 유디트의 아들인 디에고에게 과거의 기억을 들려준다. 과거의 장면들이 이어지면, 그 위로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는 현재 해리의 내레이션이 흐르고, 레나를 둘러싼 주변인들의 심정, 당시 영화 파트너였던 유디트와 제작을 맡은 어니스트 마르텔의 심적 갈등에 대한 해리의 설명, 혹은 추측이 따른다. 뒤이어 그런 심정을 형상화하는 장면들, 예컨대 어니스트 마르텔이 영화현장의 메이킹 다큐를 보면서 레나와 해리의 관계에 대해 노심초사하는 모습 같은 것이 나온다.

회상의 주체가 누구인가의 문제

이때 주목할 점은 해리가 당시 그 자리에 없었으므로 볼 수 없었고, 따라서 기억이 애초 불가능한 상황 위로 종종 그 장면에 대해 말하는 그의 내레이션이 흐른다는 것이다.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해리는 자신이 경험한 상황을 토대로 아마 그러했을 것이라고 추측된 정황을 상상하고 있는가? 해리의 이야기를 듣는 디에고가 그의 말을 뼈대로 살을 붙인 이미지인가? 이 기억이 불려나온 현재의 시점은 레나와 어니스트 마르텔이 이미 죽은 뒤이므로, 이들의 기억이 여기에 더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지금 이 과거의 기억에 개입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은 당시 영화현장에 함께 있었고 현재 살아 있는 유디트와 레이 X라는 가명을 쓰는 어니스트 2세다. 어니스트 2세에 대한 언급은 잠시 뒤로 미루고 유디트의 경우를 말하자면, 그녀는 지금 디에고와 해리의 대화에 끼어들어 자신의 기억을 말할 수 없는 처지다. 그녀는 공교롭게도 때마침 출장 중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알모도바르는 액자식 구성, 그러니까 여기서 저기로 이어지는 문을 만드는 데 능숙한 감독이므로 이 과거의 장면들을 어느 한 인물에게 종속된 기억으로 볼 수는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 해리에게서 시작된 과거의 이야기들이 중간중간 그 이야기가 말해지고 있는 시공간, 즉 해리와 디에고의 대화장면으로 결국 돌아오곤 하기 때문에 일단 이것은 해리의 기억이라고 보아야 한다. 무엇보다 회상된 과거가 상당히 일관된 흐름으로 어떤 망설임도 없이 나아간다는 점, 그 기억에 별다른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앞서 말했듯 해리가 직접 목격할 수 없었던 어떤 상황, 즉 그가 가정할 수밖에 없는 정황이 영화에서 과거-사실처럼 재현된다. 기억 주체가 해리가 될 수 없는 장면들이 거기 있다는 사실은 영화가 해리의 기억을 완성시키기 위해 동원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무엇을 위해서일까?

그걸 말하기 전에 우선 이 과거 장면들에서 몇몇 예외의 지점을 볼 필요가 있다. 대체로 타자의 기억이 개입된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과거의 장면들에서 레이 X와 유디트의 시선이 두드러지는 경우가 있다. 달리 말해, 특정 장면들은 온전히 레이와 유디트 각각의 것처럼 느껴진다는 건데, 우선 레이의 경우를 보자. 그가 아버지의 명령대로 촬영현장의 메이킹 다큐를 찍는다는 사실은 단지 카메라를 들고 있는 그의 모습뿐만 아니라, 그가 들고 있는 카메라의 시점숏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이 시점숏은 곧 당시 현장을 보는 레이의 시점숏과 다름없다. 영화의 끝 무렵에 이 메이킹 다큐의 테이프가 실제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남으로써 해리의 회상장면에 등장하는 레이의 시점숏은 해리가 침범할 수 없는 레이만의 기억으로 남겨진다. 그런데 엄밀히 그 내용을 따져보면 카메라로 기록된 레이의 기억은 해리의 기억과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해리의 가정된 기억을 기계 눈을 통해 오히려 객관적인 사실로 보증해주는 보충물로 기능하고 있는 것 같다.

유디트의 시선은 독립적이지만…

반면 유디트의 시선은 독립적이다. 해리의 기억 속에서 해리를 슬프고 은밀하게 주시하는 유디트의 응시가 가끔 등장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마테오가 교통사고로 레나를 잃고 눈이 먼 뒤, 유디트와 재회하고 바깥세상으로 처음 걸어나올 때다. 유디트는 해변을 걷고 싶다는 해리와 어린 아들, 디에고를 바닷가에 내려준다. 그리고 해변 위를 뛰어노는 디에고와 그 뒤에 가만히 서 있는 해리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영화 안과 밖이 마술적으로 융합되는 장면들의 인상에 대해 말하지만, 내게는 유디트가 바라본 디에고와 해리의 해변 신이 가장 아름답다. 더이상 감독 마테오로서 바다를 바라볼 수 없는 해리의 뒷모습. 그의 곁에서 종알거리며 작은 눈이 되어주는 천진한 아이 디에고. 그리고 그 풍경을 한참 동안 응시하는 유디트의 눈. 이 해변 장면이 지나간 뒤에 영화는 현재로 돌아오는데, 해리는 디에고에게 그날이 기억나는지 물으며 자신은 그날 들리던 소리만을 기억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해변의 풍경은 해리가 소리로만 기억할 수밖에 없는, 일정 부분은 디에고의 것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유디트만의 것일 기억 이미지다. 시간순서상 그 자리에 있는 게 맞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장면이 해리의 기억서사에서 실은 빠져도 될, 어쩌면 이 자리가 아닌 다른 자리를 위한 장면일지 모른다는 점을 놓치기 쉽다. 시종일관 불안을 떨치지 못하는 유디트가 유일하게 평온하게 느껴지는 이 기억장면은 혹시 해리가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유디트 홀로 품어온 마음의 장면이 아닐까. 영화를 완성하는 것보다 하찮게 여겨지는 비밀, 즉 유디트가 마테오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고 그가 디에고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 사실을 유디트가 아들에게 고백하는 시점과 방식, 그걸 말하는 자와 받아들이는 자의 심정에 대한 묘사는 갑작스럽고 영화적으로 성의가 없는데, 이 고백장면에 삭제된 심리적 풍경이 바로 위의 해변 신에 있다.

이 바닷가 장면이 아련한 또 하나의 이유는 이것이 영화가 유디트의 내면에 공들여 부여한 거의 유일한 순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해리의 기억장면에서 대부분의 경우 그녀의 복합적인 심정은 해리와 디에고의 단순한 대화로 처리되었고, 특히 그녀가 디에고와 해리 앞에서 과거를 고백하는 서사적으로 중요한 순간 역시 몇분간의 말로 정리될 뿐, 단 한 차례도 당시 그녀의 내면을 묘사하는 장면들에 할애되지 않는다. 서술시간이 이야기되는 사건의 내재적 중요성에 비례하는 게 일반적인 경우라면, 영화의 이런 선택은 확실히 불공평하다. 나는 앞서 해리의 기억을 완성시키기 위해 영화가 일련의 요소들을 동원했다고 말했는데, 조금의 비약을 감수하고서라도 해리의 기억이란 결국 마테오에서 해리로 겹쳐지는 감독-작가의 역사, 나아가 크게는 <브로큰 임브레이스>의 이야기 자체라고 해보자. 이 이야기의 완성을 위해, 유디트의 고백은 마테오의 망쳐진 영화의 비밀을 밝혀주고 복구의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레나의 죽음을 보여주는 레이의 메이킹 다큐만큼이나 중요하다. 그러나 유디트의 고백은 그 내용의 중요성에 비해 하찮게 재현된다. 여기에 영화의 핵심이 있다. <브로큰 임브레이스>에서는 과거의 비밀, 이야기의 내용보다는 그게 밝혀지는 과정, 그것이 말해지는 행위가 중요하며, 그 행위가 중요해지는 순간은 그것이 아버지-아들의 서사를 지칭할 때이다. 자칫하면 진부한 분석이 될 수 있어서 피하려고 했지만 마지막으로 이걸 말하지 않고서 이 글을 정리할 수 없을 것 같다.

이야기의 비밀을 상상하지 않는 영화

어네스트 2세는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그의 눈이 된다. 아버지에 대한 인정욕구와 아버지의 욕망의 대상(레나)에 대한 욕망이 동시에 작동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실은 억압적인 생부를 증오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데, 증오의 진짜 이유는 타자(레나)의 욕망이 되는 것에 결국 실패한 아버지에 대한 좌절일 것이다. 달리 말해, 아버지의 욕망을 더이상 욕망할 수 없게 되자, 아버지-아들의 관계를 지속시킬 명분을 잃은 아들은 분열된다. 그때 그의 해결책은 아버지의 적, 그러니까 아버지의 욕망의 대상(레나)이 욕망하는 자(마테오)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어네스트 2세가 찍은 메이킹 다큐가 결국에는 또 다른 아버지(마테오 혹은 해리)의 (욕망의) 역사에 대한 기록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디에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영화가 굳이 디에고와 해리의 관계를 해리에게 밝히지 않는 이유는 이미 둘은 아버지-아들의 관계에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 아버지에 대한 디에고의 인정욕구를 암시하는 장면은 쉽게 찾을 수 있다. 디에고에게 자신의 탄생기원보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해리의 탄생기원을 듣는 것이며, 그때 둘 사이에는 피보다 진한 아버지-아들의 서사가 생긴다. 그리하여 레이 X가 자신의 기록을 통해서, 디에고가 그 기록을 눈으로 보고 증명해줌으로써 반쪽자리 마테오, 반쪽자리 해리의 이야기는 마침내 하나로 통합된다. 그 과정의 결과물은 물론 <여인들과 가방>의 완성이다.

레나와 사랑에 빠져 도피 중이던 마테오가 사진을 찍을 당시에는 몰랐던 커플의 포옹장면이 사진 구석에 존재하는 걸 보고 놀라는 장면이 있다. 그는 그걸 비밀이라고 표현했다. 이야기의 비밀. 기억화 될 수 없고 상징화될 수 없지만 분명 거기 존재하는 무언가. 그러나 <브로큰 임브레이스>는 그걸 껴안고 상상하는 데 관심이 없다. 주체가 불러내고 의미화하는 기억이 중요하지 기억이 주체에게 출몰하는 순간은 없다. <여인들과 가방>을 재편집한 마테오가 중요한 건 영화를 끝내는 것이라고 말할 때 사람들은 감동을 느낀다지만, 내게 그 말은 그저 동일자의 귀환으로 완성된 기억-이야기 앞에서 자족하는 남자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경멸>(장 뤽 고다르)의 마지막, 구멍 난 인생과 영화 앞에서 “시작을 했으면 끝을 봐야지”라고 말하는 쇠락한 거장의 쓸쓸한 체념 같은 것이 여기에는 없다. 그러므로 나는 다시 묻고 싶다. 이것이 진정 우리가 기다리는 이야기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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