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입체사진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2007년에 발표한 장편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펼쳐 보면 알 것이다. 이 칼럼의 내용을 이해하려면 그 소설을 꼭 읽어봐야만 할 것이다(라고 쓰지만, 그 책을 다 읽고 나면 이 칼럼을 읽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어렸을 때, 우리 집에는 설악산 입체사진첩이 있었다. 부착된 두개의 렌즈를 들여다보면 거기 흔들바위나 백담사 계곡 같은 게 생생하게 보였다. 그건 내가 최초로 매혹된 이미지였다. 이 매혹은 내게는 더없이 중요했다.
입체사진을 영어로 스테레오스코피라고 부른다. ‘스테레오’는 ‘입체’(solid)라는 뜻의 그리스어다. 입체사진은 두장의 사진 사이의 차이에 의해서 입체로 보인다. 스테레오 사운드 역시 이런 원리로 만들어졌다. 들어보면 알겠지만, 양쪽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는 차이가 난다. 이 차이는 이 세상에 없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중학 1학년 때, 나는 워크맨으로 처음 스테레오 사운드를 들었다. 광활한 들판에 나 혼자 서서 음악을 듣는 느낌이랄까. 그건 이 세상에 없는 공간이랄까. 감각할 수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면, 스테레오가 만들어내는 그 공간은 실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국민통합’같은 말이 싫다니까
좀더 어렸을 때, 그러니까 텔레비전은 흑백화면이었고 모든 음악 소리는 모노였던 시절인 1970년대 후반에 내가 본 만화 <걸리버여행기>에는 소인 악단이 직접 들어가서 연주하는 라디오가 나오기도 했다. 아이들 중에는 라디오 속에 진짜 그런 소인 악단이 있는 줄 알고 뜯어보는 친구도 있었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나 역시 KBS 김천중계소에서 틀어주는 노래를 듣다가 혜은이가 그 중계소까지 찾아와서 부르는 줄 알고 흥분한 적이 있었다. 여름이면 수영하러 가면서 늘 지나갔던 중계소니 노래가 끝나기 전까지는 달려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내 말에 어른들은 꽤 웃었다.
그러니 이제쯤은 어린 시절 나를 매혹시킨 건 현실에 육박하는 환영, 즉 스테레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지금도 라디오에 모노 사인이 뜨면 견디지 못하고 안테나를 이리저리 돌려보는 사람이다. 나는 민주주의마저도 스테레오의 관점으로 이해한다. 서로의 차이를 통해 만드는 입체적인 사회가 내가 상상하는 민주주의 사회다. ‘난 생각이 좀 달라’라고 말하지 못하는 사회는 모노 사인이 뜬 라디오보다 더 견디기 힘들다. 그래서 나는 국민통합 같은 말이 제일 싫다. 그건 경제가 어려우니 흑백TV를 보자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게는 못하겠다.
<크리스마스 캐롤>이 입체영화라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뛸 정도였다. 크리스마스에나 개봉할 줄 알고 방심하다가 이미 개봉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보러 갈 정도였다. 그런데 웬걸, 들어갈 때 입체안경을 나눠주는 직원이 서 있어야 할 텐데,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광고는 맨눈으로 볼 수 있도록 나중에 나눠주려는 모양이구나’). 실내등이 꺼지고 나서도 안경을 나눠주는 직원은 없었다(‘이건 맨눈으로 볼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입체영화인가?’). 하지만 카메라가 눈 내리는 런던의 거리를 날아다니는 도입부가 시작됐는데도 안경은 없었다. 꼭 그저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는 걸 피력한 것뿐인데도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한다고 구박받는 걸로도 모자라 경찰에 끌려가는 것으로 국민통합에 이바지하는 기분이랄까. 좀 억울했다. 알고 봤더니 입체영화는 지정된 극장에서만 하는 것이었다.
급한 마음에 확인하지도 않고 달려간 게 실수였다고나 할까. 엄청나게 실망했다고 이 칼럼에 쓰게 되리라…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평범한 화면으로 보는 <크리스마스 캐롤>도 충분히 놀라웠다. 이 영화에는 단순한 입체영상을 넘어서는 뭔가가 있었다. 입체영상이 아니었기에 오히려 실사영화와 구별되지 않는 환영을 봤다고나 할까. 말했다시피 감각할 수 없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적어도 사물들은 그렇다. 그렇다면 이토록 감각적으로 사실적인 영상이라면 이걸 환영이라고 불러도 될까? 이걸 환영이라고 부른다면 실사영화도 환영이라고 부르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이제는 적어도 실사와 CG의 차이가 현실과 스크린의 벽만큼 크지 않은 것 같다.
단순한 입체영상을 넘어서는 그 무엇
그런데 뜻밖에도 이 실사와 CG의 경계가 모호해진 상황이 이야기의 핍진성(흐흐흐, 소설 창작 강사 시절, 학생들을 괴롭힐 때 쓰던 단어로구나)에 기여했다. <크리스마스 캐롤>의 주제란 무엇일까? 젊어서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가난하게 성장한 탓에 돈밖에 몰라, 툭하면 경제를 살리겠다는 둥 직원에게도 값싸고 질 좋게 일하기 싫으면 나가라는 둥 귀신도 따라하다가 턱이 빠질 정도로 “비이이이즈니스!”라고 떠들어대던 한 늙은 인간이 어느 크리스마스이브에 유령이 보여주는 환영을 보고 개과천선한다는 이야기 아닌가. 그러므로 이 이야기의 성패는 노회할 대로 노회한 그 늙은 인간마저도 현실과 오해할 정도로 사실적인 환영을 보여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관용을 베풀지 않은 부자들이 죽고 나서 어떤 처지가 될지 보여주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 지도 벌써 150년이 넘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은 게을러서 가난하며,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느니 차라리 감옥에 보내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부자들이 많은 건 아마도 그간 이 이야기에 핍진성이 부족했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로버트 저메키스가 만든 <크리스마스 캐롤>을 보니까 인류가 환영을 다루는 능력은 이제 결정적인 지점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내가 스크루지였다면 이 영화를 보면서 마음을 고쳐먹었을 것 같다. 특히 꼬맹이 팀이 죽은 뒤에 계단을 올라가던 환영 속의 밥이 스크루지를 빤히 쳐다보는 장면에서는 내 손발이 다 오그라들더라.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개인맞춤 환영을 만드는 일이겠다. 환영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이렇게 일취월장한다면 조만간 각자가 주인공이 되는 <크리스마스 캐롤>도 만들 것이다. 자신의 과거와 미래가 그처럼 사실처럼 보인다면, 어느 누가 “비이이이즈니스!”라고만 떠들어대겠는가. 갈 곳이 없어서 망루에 올라간 사람들이 불에 타죽어도, 죽고 나서는 차가운 냉동고 안에 누워 있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못된 사람들을 환영으로 뉘우치게 하는 일은 유령들이 했으면 좋겠으나, 유령들은 다 죽었는지 뭐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