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객잔]
[전영객잔] 다리나 몸통없이 이제 머리뿐인가
2009-12-17
글 : 김소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디스트릭트9>에서 <2012>를 거쳐 <닌자 어쌔신>에 이르는 영화들이 육체를 전시하(지 않)는 방법

**이미 스포일 된 영화라고 해도 , 스포일러 있을 수 있습니다.
뱀이 자기 꼬리를 먹어 들어가 포식자와 피식자가 오직 치켜든 머리 하나로 남듯, 자신이 딛고 선 지반을 허물어 그 흙으로 집을 짓듯, 파괴의 과정이 생산의 기반이 되는 영화를 카타스트로프, ‘재앙’영화라고 하자. 예컨대 이런 악순환을 오히려 자신의 자양분으로 삼는 영화들 말이다. <2012>는 영화 관객, 자신의 관객 자체가 급격히 줄어들 그날을 D-Day로 삼아 달려간다. <닌자 어쌔신>은 닌자가 등장하는 액션영화 장르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육체들을 체인, 단날 검, 양날 검, 수리검, 표창 그리고 CGI와 총탄으로 산산조각낸다. 조련사가 스펙터클을 위해 동물들을 조련하다 그 동물들을 잔혹하게 도살할 지경에 이른 마냥 굴곡있는 인간 육체를 어떤 방식으로 새롭게 커팅할까? 이것이 이 영화의 무술 지도와 CGI 용법의 지침이다. <2012>가 기후재앙이라면 <닌자 어쌔신>은 육체 재앙 영화다. 두말할 것도 없이 20세기 이후는 인간이 발생시킨 대규모의 재앙, 카타스트로프의 시대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과 수많은 대량살상이 가능한 국지전 그리고 미래를 위협하는 환경재앙 등.

<2012>, 자연만이 문제라고?

어떻게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은 인류의 멸망을 다루는 <인디펜던스 데이>나 <투모로우> 그리고 <2012> 같은 일련의 영화를 만드는 것을 커리어의 특장으로 삼았을까? 재앙영화 전문 감독이라는 직업은 특이한 시대적 이력이다. 왜 비, 정지훈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여기저기 상처난 자신의 몸을 전시해야 하는 영화를 선택했을까?

조르조 아감벤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사람들의 경험의 빈곤화를 발터 베냐민에게서 인용한 뒤 오늘날 경험의 파괴엔 전쟁과 같은 재앙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도시에서의 단조로운 일상사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현대인의 일상에는 경험으로 번역될 수 있는 어떤 것도 없다는 뜻이다. 오늘날 경험 자체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개인 외부에서 경험이 일어난다. 개인은 안심한 채 단순히 그것을 관찰한다. 알람브라궁전과 같은 경이로운 곳을 여행하면서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것을 경험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는다. 오히려 카메라가 그것을 경험하는 것을 선호한다. 사람들은 예의 재앙영화를 통해 카메라가 재앙을 경험하게 하는 셈이다.

<2012>는 착한 블록버스터다. ‘도의적’으로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빠짐없이 담느라 2시간30분의 상영시간을 준수한다. <닌자 어쌔신>은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은 안 하지만 뭐, 특별히 이야기랄 것이 없다. 98분이다.

<2012>에서 유난히 어리둥절한 점은 지구 종말이 인재가 아닌 자연재해만으로 온다는 것이다.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 되는 가스배출 등에 대한 불안이나 경고는 완벽히 부재한 채 마야문명이 예고한 대로 2012년 태양 중성자의 작용에 의한 지구 중핵의 가열과 그 결과에 따른 대륙판 이동과 쓰나미 등이 대재앙의 원인이 된다(이렇게 그린피스 활동에 무심해도 되는 건가?).

영화의 VFX의 포뮬라를 보면 리얼 액션을 충분히 살리면서 CGI를 사용하는 것이 감독의 뜻이어서, 스튜디오 자체가 요동하고 사람들은 흔들리며 크레인으로 집어올린 차들이 도로나 주차장에 내팽개쳐진다. 이 영화의 중요한 숨겨진 전략 중 하나는 도로와 집, 산과 들의 대규모적 파괴는 보여주면서도 사람들의 죽음은 될 수 있으면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인공 혈액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는 연출 기법이다. 그래서 북미, 남미와 아시아 대륙 등이 천지개벽을 할 뿐 사람들이 어디서 어떻게 죽어가는지는 생략된다. 영화에 가족주의는 있지만 뼈저리고 피흘리는 고통은 없다.

주인공 잭슨(존 쿠색)은 밤에는 소설 쓰고 낮에는 리모 운전사를 하는 피곤한 작가이자 이혼 뒤 전 부인(아만다 피트)와 함께 사는 아이들의 신뢰를 회복하려는 아버지다. 나쁘지 않은 역이다.

혈흔과 상흔 없이 살아남은 사람들

영화는 미국을 중심으로 정렬된 다국적 인물들(미국, 러시아, 티베트, 인도, 유럽, 일본, 중국)과 다국적 로케이션을 시도한다. 미국에서 출발해 중국까지가 주요 여정이고, 마지막엔 대륙판 이동으로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고도를 갖는 대륙이 된 남아프리카로 향한다. 미국의 엘로스톤과 히말라야, 티베트에서 일어나는 화산 폭발과 쓰나미에 영화의 CGI 효과가 전면 동원된다.

영화에서 깜찍한 미끼는 잭슨이 필사적으로 가족들을 데리고 도착해 이용하려고 하는 것이 지구 탈출용 우주선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리둥절해하는 아들에게 그는 친절하게 설명한다. 지구 대륙의 대부분이 날아가고 사람들이 몰살하는 위기를 통해 복원되는 것은 잭슨의 가족애고 남아프리카의 케이프 오브 굿 호프, 희망봉의 의미를 새삼스레 확인하는 것이다.

긴 영화가 끝이 나면 영화에 파도나 쓰나미는 넘쳐나지만 혈흔과 상흔은 없으며, 살아남은 자들이 죽어간 태반의 인류에 대해 애도의 시선을 보내지 않는 것이 의아하다. 이러한 두 가지의 부재- 피, 몸, 피부, 땀 등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몸과 죽음 이후의 제의- 를 결핍으로 생각하지 않는 <2012>는 CGI로 이루어진 영화 장르 자체를 포스트 휴먼, 사이보그 시대 회고적으로 돌아본 인간의 마지막 엑소더스 게임처럼 보이게 한다. 영화에서 땀이 흐르는 장면이 나오는 것은 단 한번, 도입부의 인도 에피소드가 유일하다.

흥미롭게도 <닌자 어쌔신>은 위의 부재 대신 그 둘에 대한 과잉을 택한다. 라이조(정지훈)는 오랜 역사를 가진 닌자 자객단 오즈누파에서 훈련을 받다가, 자신과 ‘마음’인지 ‘심장’인지를 나눈 소녀가 탈출하다 잡혀와 심장에 칼이 찔린 채 죽자 이후 오즈누파를 떠난다. 별로 동기화나 심리적 깊이가 중요하지 않은 영화에서 유일한 감정선은 라이조의 소녀에 대한 끝나지 않는 애도의 감정이다. 오즈누파를 떠난 라이조는는 형제, 자매처럼 함께 자라난 동료 닌자들의 추적을 받게 된다. 닌자의 신화를 소개하는 도입부나 라이조가 벌이는 싸움장면에서 몸통이나 팔다리는 난자, 도륙, 흉한 기하학적 모양으로 잘려나간다. 이 영화엔 인공 혈액이 넘친다. 만화형 혹은 CGI형 고어, 고어, 고어.

애도도 있고 인공 혈액, 인공 육체 장기 파편, 인공 피부도 넘쳐나지만 이 영화에서 애도와 같은 감정은 빈약하다 못해 제로 플롯인 닌자의 복수담의 연료와 같다. 몸을 조각조각내고 정지훈의 ‘환상 복근’ 몸도 늘 상처투성이로 가학적으로 제시한다. 예컨대 비라는 남성 스타의 몸은 한번도 환상적으로 완벽할 때가 없다. 늘 어딘가 상흔으로 갈라져 있다.

<닌자 어쌔신>, 부서지지 않는 라이조의 몸

처음 인용했던 발터 베냐민의 경험의 빈곤을 이야기하는 끝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성찰이 있다. (전쟁 이후) “그 어떤 것도 변하지 않은 것이 없고 구름 아래, 파괴적 분출과 폭발이 일어났던 그 장에 작고 상처받기 쉬운 인간의 육체가 있다.” 경험의 빈곤과 왜소한 그러나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인간 육체의 공존.

반면 비, 라이조의 몸은 상처를 지니고 있으나 부서지지 않는 몸이다. 영화 안과 밖에서 훈련된 완벽에 가까운 몸을 처음부터 칼집낸 채 제시한다. 자신을 추격하는 닌자들에게 난자되어 죽을 지경에 이르나 마음의 힘으로 몸을 재생시킨다. 여기에서 보이는 사회적 판타지는 천년이 넘은 닌자 클랜의 훈련으로 닦아낸 근대 의학이나 근대 생체 과학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운 몸의 비과학적 자기 조정 능력이다. 지난번 이야기했던 <디스트릭트9>이 외계인과 인간의 DNA가 결합된 군산복합체, 생체 과학기술의 초관심 목표가 되는 현재에서 미래로 열린 낯선 몸을 다루고 있다면, 비의 몸은 과거, 고대의 몸이다. 병원 치료를 받지 않고도 자기 치료되는 신체다. 그러나 동시에 벌거벗은 몸이며 배제된 신체다. 시민권도 국민성도 부여되지 않는다. 일종의 난민인 셈이다. 닌자 역을 한국인 정지훈이 연기하고, 할리우드영화가 생뚱맞게 독일에서 전개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나름 논리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첨단 생체 과학이 신과학의 생체 신호 광자 등 ‘비과학적’ 요소들까지 흡수해 근대과학이 비가시화한 동양 무사들의 몸의 비밀까지를 통합해 몸과 정신의 통제를 한번에 하고자 한다면 영화에서 라이조의 몸은 생체 과학에서 <디스트릭트9>의 인간 플러스 외계인의 몸만큼이나 첨단적이다. 이러한 라이조의 몸을 지배하는데 일본의 클랜은 실패했다. 영화에서 보자면 독일의 공권력은 아직 이 몸의 비밀엔 별 관심이 없다. 그의 몸의 상처나 재생력에 집요한 관심을 보이는 것은 할리우드의 카메라다. 맨몸의 이소룡이나 후기 포디즘 시대에 걸맞은 유연한 몸이나 첨단장치가 내재된 턱시도가 필요한 성룡과는 다른 완벽하나 상처난 몸. 상처가 그치지 않는 몸. 자기 재생이 가능한 신비 육체. 한편으로는 트랜스지방 제로라는 표현처럼 이상화되어 있으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어둠 속에 잠긴 채 상처를 드러내며 출현하고 치유를 요구하는 듯한 이러한 몸은 일종의 포스트 액션 장르영화- 액션영화의 기반인 몸을 훼손하는 정도가 아니라 파편화해 해체시키면서 동시에 치유가 필요하다고 울부짖는- 의 한 규범이 될 것 같다. 닌자 클랜의 거주지/훈련장은 독일군의 폭격으로 초토화되고 한국인 닌자가 독일을 주 배경으로 설정한 할리우드영화에 종횡무진하는, 역사적이거나 당대적인 지리적, 정치적 표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초국적 포스트 액션영화는 지구 종말을 다룬 환경 재앙영화들과 더불어 예의 경험의 파괴 이후 카메라가 대신 경험하는 컴퓨터화된 스크린 경관 위 육체 재앙적 스펙터클이다. 재앙이 재앙영화의 장르를 먹어 들어가, 다리나 몸통없이 이제 머리만 매달려 있는 카타스트로프! 뭔 걱정이람. CGI가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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