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히스 레저] 히스는 거기에 있었다
2009-12-21
글 : 장미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으로 부활한 히스 레저

슬픔은 때론 뒤늦게 가슴을 친다. 살아남은 자의 어깨를 돌려세워 이가 빠진 객석을 기어이 응시하게 만든다. <다크 나이트>(2008)로 절절하게 되새김질한 히스 레저의 젊은 죽음을 다시 한번 추모할 시간이다.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이하 <상상극장>)은 알려진 대로 그의 유작이요, 크레딧에 명시되듯 ‘히스 레저와 친구들의 영화’다.

숱한 재앙의 현장을 인내했지만 주연배우의 죽음만큼은 참기 힘들었던 듯 촬영이 중단된 몇 개월 동안 “영화는 끝났고, 우린 당장 집에 가야 한다”고 한탄했다는 테리 길리엄은 말했다. “히스 레저는 모든 과정에서 우리와 함께했다. 그의 에너지, 재능, 생각들…. 그의 죽음이라는 비극과 우리를 제작에 임할 수밖에 없게 만든 궁극적인 결단. 그게 이 영화가 히스 레저와 그 친구들의 영화인 이유다.”

히스 레저의 친구라 함은 명백히, 난파 직전의 영화를 가까스로 회생으로 이끈 세 배우, 조니 뎁·주드 로·콜린 파렐을 뜻한다. 고인이 드리운 그림자의 무게를 더불어 감당한 이들은 히스 레저의 유일한 딸, 마틸다 로즈의 미래를 염려해 영화의 출연료 전액을 그녀를 위해 선사하기로 했다. 이로써 <상상극장>의 수상하고 괴이하며 매력적인 사기꾼 토니는 히스 레저의 무덤에, 온전히 그의 승리로 헌납됐다.

상상극장 문을 열고 나오다

<그림형제: 마르바덴 숲의 전설>(이하 <그림형제>, 2005)로 테리 길리엄과 협업한 히스 레저가 <상상극장>에 합류한 건 <다크 나이트>의 준비로 런던에 머무르던 즈음이었다. “그는 다니엘 아우버와 함께 시각효과 회사인 피어리스에서 일하고 있었다(<상상극장> 역시 피어리스에서 맡았다). 하루는 그들에게 우리가 시도할 것들에 대한 슬라이드쇼, 그러니까 스토리보드를 보여주고 있었는데, 그가 ‘내가 토니를 연기할 수 있을까’라고 적힌 노트를 내밀었다. 그는 이미 스크립트를 읽은 상태였지만, 정말 완전한 놀라움이었다. 훌륭했다!” 그러나 미완성으로 남은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는 물론 <그림형제>, 아니, 일찍이 <바론의 대모험>(1988)과 <브라질>(1985) 때부터 따라붙은 불운은 테리 길리엄의 옷깃에 끈질기게 남아 있었다.

2008년 1월22일 런던에서 촬영을 마무리짓고 캐나다 밴쿠버 촬영을 기다리던 제작진을, 충격적인 뉴스가 급습했다. 주연배우인 히스 레저가 자신의 아파트 침대에서 숨진 채 발견된 것이다. 사인은 약물과다복용. 파르나서스 박사 역의 크리스토퍼 플러머는 “히스 레저는 언제나 ‘제기랄, 잠을 잘 수가 없다’면서 수면제를 복용하곤 했다”고 전했다. “습기가 올라오는 끔찍한 밤을 지새우면서 우린 야외 촬영을 감행했고, 감기에 걸렸다. 그러나 히스는 잘 견뎌냈고, 나는 그가 즉각적으로 약물의 힘을 빌렸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테리 길리엄이 먼저 도움을 요청한 배우는 “언제나 첫 번째 선택”으로 주저하지 않는 조니 뎁이었다. “그는 히스를 사랑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더라. ‘할 겁니다. 뭐가 어찌됐든.’” 상상극장의 마법 거울이 열쇠였다. 마법 거울로 넘나드는 세 부분의 판타지 장면 속 토니를 세명의 배우가 나눠 연기하는 것으로 수정하고 나니 히스 레저가 이미 촬영한 현실장면을 손상시키지 않은 채 영화를 완성할 가능성이 엿보였다. “그의 아버지는 ‘날 믿으라, 난 당신이 그 아이를 보기 좋게 만들리라는 걸 안다’고 하더라. 사실 히스를 훌륭하게 보이도록 하는 건 쉬웠다. 그를 나쁘게 만드는 게 불가능하지….”

시간이 곧 돈과 같은 의미인 할리우드에서 <퍼블릭 에너미>의 촬영을 일주일가량 지연시키면서까지 조니 뎁은 약속을 지켰다. 주드 로와 콜린 파렐이 차례로 모여들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배우들 전부 다른 영화에 캐스팅된 상태였고, 스케줄을 수정했다.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히스에게 보내는 일종의 러브레터 같았다.” 기이한 우연도 있었다. 테리 길리엄의 기억에 따르면, 히스 레저의 마지막 대사는 “메신저를 쏘지 마라”. 토니 역을 연기하던 조니 뎁이 정확히 동일한 애드리브를 시도했고, 테리 길리엄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히스는 여전히 거기 있었다. 조니는 히스의 뭔가와 소통하고 있었다.”

친구들이 보내는 러브레터

<상상극장>은 희생을 딛고 일어선 영화다. 제작자인 윌리엄 빈스가 “마지막 필름 롤이 카메라를 거쳐간 지 일주일 뒤” 암으로 죽었고, 테리 길리엄 역시 런던에서 밴에 치어 척추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그러나 영화 속 죽음에 대한 언급이 히스 레저의 그것을 연상케 한다는 질문에 테리 길리엄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들은 히스가 죽은 이후에 그 따위를 썼다고 생각들 하는데, 아니다. 단어 하나도 바꾸지 않았다. 내겐 정말로 두렵고 무서운 일이었다. 왜 그렇게 비과학적이냐고? 죽음에 관해서라면 모조리 그럴 수밖에 없다.”

영화가 상영되는 한 배우의 죽음이 무한히 연기된다면 <상상극장>의 개봉을 앞둔 지금 히스 레저를 향한 애도는 시작되지조차 않았다. <다크 나이트>의 조커와 <아임 낫 데어>(2007)의 밥 딜런, <브로크백 마운틴>(2005)의 카우보이가 새로운 찬사를 얻고, <기사 윌리엄>(2001)과 <패트리어트: 늪 속의 여우>(2000),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1999)가 또 다른 소녀들의 볼을 발갛게 물들이는 동안엔. 어쩌면 그 죽음의 목격자가 한명도 남지 않고 사라진 뒤에도.

<그림형제>에서 현실적인 형과 달리 동화 속 세상을 사랑하는 동생을 연기했던 히스 레저는 상상극장 앞을 서성이면서 입장료가 얼마냐고 묻는 행인에게 도전적으로 대꾸한다. “당신은 꿈에 값을 매길 수 있습니까?” 연기라는 꿈을 위한 판돈으로 삶을 송두리째 내놓은 배우. 영화의 기적에 경도된 비주얼리스트 테리 길리엄이 그를 위해 진정한 마술을 선보일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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