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나인> 보석처럼 빛나다가 꿈결처럼 사라지네
2010-01-05
글 : 문석
롭 마셜의 뮤지컬영화 <나인> 미리 보기

대니얼 데이 루이스, 니콜 키드먼, 페넬로페 크루즈, 마리온 코티아르, 소피아 로렌, 주디 덴치, 케이트 허드슨, 그리고 블랙 아이드 피스의 보컬 퍼기까지. 뮤지컬영화 <나인>은 출연하는 배우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흥분감을 주는 영화다. 여기에 <시카고>로 뮤지컬영화 연출 능력을 검증받은 롭 마셜 감독까지 참여했으니 대단한 영화임에 틀림없다는 확신마저 들게 한다. 그런데 이 화려한 진용과 골든글로브상 후보 지명에도 불구하고 <나인>이 어딘가 허전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나인>을 그 원천인 영화 <8과 1/2>, 그리고 뮤지컬 <나인>과 함께 살피면서 그 ‘허전함’의 근원을 찾아본다.

여기 화려한 필모그래피를 자랑하는 영화감독이 있다. 그는 과거 관객을 웃고 울리는 영화들을 만들었지만 최근 들어서는 창작에 어려움을 느끼는 중이다. 어느 정도냐 하면, 그는 10일 뒤부터는 촬영에 들어가야 하는 스케줄을 앞두고도 시나리오를 한줄도 쓰지 못한 상태다. 설상가상으로 제작자는 제작발표회를 일방적으로 열고, 아내와 정부는 동시에 촬영장으로 찾아오며, 스탭들은 혼란 속에서 감독을 압박한다. 감독은 서서히 미쳐가고 영화 촬영은 점점 불가능한 일이 된다.

영화에 웬만큼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이야기가 페데리코 펠리니의 대표작 중 하나인 <8과 1/2>의 줄거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연출자와 예술 창작의 고통을 초현실적으로 묘사한 이 영화는 밥 포시의 <올 댓 재즈>나 우디 앨런의 <스타더스트 메모리즈>, 그리고 찰리 카우프먼의 최근작 <시네도키, 뉴욕> 등에 영향을 끼쳐왔다. <8과 1/2>은 브로드웨이 뮤지컬로도 이식됐다. 1982년 초연된 이후 런던의 웨스트엔드를 비롯해 프랑스, 일본, 스웨덴, 그리고 한국 등에서 상연된 뮤지컬 <나인>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무비컬’을 다시 영화로 옮긴 것이 바로 곧 개봉할 롭 마셜의 뮤지컬영화 <나인>이다.

호화 캐스팅, 진귀한 가무의 위용

영화 <나인>은 그 뮤지컬 원전과 또 그 뮤지컬의 원천이 된 <8과 1/2>의 기본 구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1960년대 중반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의 주인공은 창작의 위기를 맞이한 감독 귀도 콘티니(대니얼 데이 루이스)다. 9번째 영화를 앞두고 있는 그는 제작자의 무리한 요구로 스트레스를 받다 로마에서 탈출한다. 귀도는 지방의 휴양지에서 ‘잠수타기’를 시도하지만 뜻은 이뤄지지 않는다. 귀신같이 그를 찾아낸 제작자가 제작 사무실을 아예 휴양지로 옮겼기 때문이다. 꼼짝없이 영화를 짜내야 하는 그 앞에 설상가상으로 정부 칼라(페넬로페 크루즈)와 아내 루이사(마리온 코티아르)가 차례로 나타나고 미국 패션 기자 스테파니(케이트 허드슨)까지 육탄 공세를 펼친다.

판타지는 귀도의 유일한 탈출구다. 그는 판타지 속에서 예술적 영감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스스로 믿고 있는) 여배우 클라우디아(니콜 키드먼)를 꿈꾸고, 오랜 세월을 함께해온 의상 담당자 릴리(주디 덴치)의 성인 클럽 ‘폴리 베제레’를 떠올리며, 씻을 수 없는 죄의식을 심어준 매춘부 사라기나(퍼기)와 무의식을 짓누르고 있는 엄마(소피아 로렌)를 만난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여인들과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고 그를 억누르던 그 무언가의 실체 또한 선명해져간다.

뮤지컬 버전이 그랬듯, <나인>은 경쾌한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중반부까지만 해도 귀도의 괴로움은 외려 행복한 고민처럼 보인다. 숱한 여성들에 둘러싸인 그의 모습은 바람처럼 가벼운 플레이보이처럼 묘사된다. 게다가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한 그의 판타지는 화려하기 그지없다. 휘황찬란한 무대 위에서 아슬아슬한 란제리만 걸친 환상 속 여인들이 가랑이를 들어올리는 장면들은 아찔한 쾌감을 선사한다. 귀도가 현실과 직면할 수밖에 없는 후반부로 갈수록 꿈은 악몽에 가까워지지만 호화로운 배우들의 진귀한 가무가 발산하는 압도적인 매혹은 줄어들지 않는다. 뮤지컬영화 사상 최대의 제작비를 들였다는 영화사의 주장이 의심스럽지 않을 정도로 <나인>의 외양은 보석처럼 눈부시고 아름답다.

‘8과 1/2’은 어떻게 ‘나인’이 됐을까

<나인>과 그의 할아버지뻘인 <8과 1/2>의 간극은 상당히 커 보인다. 혼란스러운 몽환의 연속인 <8과 1/2>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영화이기도 하지만 애초부터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가뜩이나 영화가 뮤지컬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생기는 비약이 큰데, 또 뮤지컬이 뮤지컬영화로 바뀌었으니 말이다. 그건 영화-뮤지컬 공연-뮤지컬영화로 변신했던 <프로듀서스> <리틀 숍 오브 호러> <헤어 스프레이> <스윗 채리티>(펠리니의 <카비리아의 밤>이 원전) 등도 마찬가지였다. 과연 <8과 1/2>은 어떻게 뮤지컬 <나인>과 뮤지컬영화 <나인>으로 제작된 것일까.

먼저 뮤지컬 <나인>이 있었다. 펠리니 영화를 사랑했던 작곡가 모리 예스턴은 1973년부터 <8과 1/2>의 뮤지컬화를 추진했고 1982년 작가 아서 코핏이 결합하면서 뮤지컬은 현실화됐다. 사실 <8과 1/2>은 애초부터 무대예술적인 요소를 갖고 있었다. “꿈만이 유일한 리얼리티”라고 말했던 펠리니는 이 영화의 상당수 장면을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귀도의 판타지 또는 백일몽으로 구성했다. 또 주요 사건이 벌어지는 광천수 샘터 또한 대형 무대를 연상케 하는 공간이었다. 뮤지컬 <나인>은 이 점을 잘 이해했다. 귀도를 뺀 나머지 모든 배역을 여성으로 설정한 것도 전체를 귀도의 판타지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또 무대의 특성도 한껏 이용했다. 수녀복을 입은 칼라와 매춘부 사라기나가 같은 무대 위에 있거나 귀도가 루이사의 안경을 벗겨 클라우디아에게 씌워주는 장면은 대표적이다. 1982년 초연 때 라울 훌리아가, 2003년 재상연 때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귀도 역할을 맡았던 뮤지컬 <나인>은 1982년 토니상에서 작품상을 비롯한 5개 부문을, 2003년 토니상에서는 2개 부문을 수상했다.

하지만 뮤지컬 버전은 구체적인 이야기에서 <8과 1/2>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다. <8과 1/2>에서 귀도가 만들려는 영화는 괴이한 SF영화인 데 반해 뮤지컬 버전에서는 카사노바 이야기다. 뮤지컬 버전의 귀도는 자신을 반영한 카사노바를 영화화하겠다고 생각하면서 창작난이 해소됐다고 믿는다. 그리고 스스로 카사노바가 돼 뭇 여성을 희롱하는 판타지에 빠져들어간다. 이것은 분명 <8과 1/2>의 그 악명 높은 장면, 즉 채찍을 든 귀도가 영화 속 모든 여성들을 복종시키는 장면의 변형이지만 뮤지컬은 이를 클라이맥스로 배치해 이어지는 귀도의 절망감을 극대화한다.

제목을 <나인>으로 정한 것도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 <8과 1/2>은 펠리니의 자기 반영적인 영화다. 귀도에서 펠리니 자신을 읽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8과 1/2>을 시작하기 전 내가 항상 두려워하던 뭔가가 일어났다. 그건 바로 감독으로서의 한계였다”는 펠리니의 말처럼 어떤 영화를 만들어야 할지 몰랐던 이는 바로 펠리니였다. 귀도의 아내 루이사가 그의 아내였던 줄리에타 마시나의 영화적 변형임은 자명했고, 그의 영화를 냉정하게 평가하던 영화평론가는 <카이에 뒤 시네마>를 비롯한 당대의 평론 진영임에 틀림없었다. 제목 <8과 1/2> 또한 펠리니 자신에게서 나왔다. 그때까지 그가 만들었던 장편영화는 6편, 단편영화는 2편, 그리고 공동연출작은 1편이었다. 그 다음 영화는 8과 1/2번째 영화가 되는 셈이었다. “여기에 음악이라는 요소를 덧붙이면 1/2이 더해진다고 생각했”던 모리스 예스턴은 제목을 <나인>으로 지었다. 또 뮤지컬은 귀도가 9살 때 사라기나를 만나면서 성적으로 억압돼 성장하지 못했다는 모티브를 강력하게 부여한 까닭에 <나인>이란 제목은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는 귀도의 나이 9살을 의미하기도 한다.

인물들이 노래하는 장면은 무대 위로 한정

롭 마셜 감독은 이미 1982년 상연 때부터 <나인>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거미 여인의 키스> <카바레> 등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연출하다 영화 데뷔작 <시카고>로 아카데미상 6개 부문을 휩쓴 뒤 그는 <게이샤의 추억> 이후 만들 뮤지컬영화로 <나인>을 점찍었다. 제작에 임한 마셜은 몇 가지 수정을 가했다. 우선 제작자를 비롯한 상당수 캐릭터를 <8과 1/2>에서와 같이 남성에게 돌려주는 대신 비중을 줄였고, 새로운 여성 캐릭터들을 만들었다. 주디 덴치가 연기한 의상 디자이너는 <8과 1/2> 속에서는 루이사의 친구였고, 뮤지컬에서는 제작자였던 캐릭터를 분리해낸 경우이고 케이트 허드슨이 연기한 <보그> 기자는 영화에서는 영화평론가, 뮤지컬에서는 평론가 출신 신임 프로듀서를 변형한 것이다. 또 뮤지컬에서 <Nine>을 비롯한 상당수 노래를 뺀 대신 예스턴이 만든 신곡 3개를 추가했다. 엄마 역의 소피아 로렌이 부르는 <Guarda La Luna>와 루이사 역의 마리온 코티아르가 부르는 <Take It All> 등이 그것이다.

영화 <나인>이 뮤지컬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점은 공간이다. 영화가 사실성에 기반하는 매체라는 점을 생각하면 영화 버전이 무대를 벗어나야 함은 당연하다. 그리고 이 공간들은 <8과 1/2>에 기반한다. 칼라가 등장하는 기차역, 귀도가 칼라에게 요부 짓을 요구하는 호텔방, 분주한 제작사 사무실의 풍경, 어린 시절 귀도가 찾아간 사라기나의 바닷가 집 등은 <8과 1/2>에서 그대로 가져온 듯 보인다. 그럼에도 마셜은 각각의 인물들이 노래하는 장면을 <시카고>에서 그랬듯 무대 위로 한정한다. 그는 “이 영화 안에서 3개의 다른 세계를 만들려 했는다. 60년대의 리얼리티, 귀도 콘티니의 환상 속 삶, 그의 기억이 그것”이라고 말했는데 귀도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노래하는 대목은 귀도의 판타지에 해당한다. 결국 노래장면을 무대에 배치한 것은 판타지를 강조하고 “영화 매체의 리얼리티를 배제하기 위해서”였다. 이 무대는 막 지어지고 있는 귀도의 영화 세트장인데, 마셜은 “완성되지 않은 세트장은 귀도가 무언가를 채워넣으려는 공간”이라고 말한다. 즉, 이들 판타지란 귀도의 욕망이 투영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노래가 끝나면 감흥도 사라지고…

하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그의 말은 그리 적합하지 않은 듯 느껴지기도 한다. 이를테면 칼라가 귀도에게 전화를 걸어 음탕한 이야기를 털어놓는 <A Call From The Vatican>은 귀도의 환상이라기보다 실제 벌어지는 사건에 가깝다. 귀도와 소원해진 관계를 털어놓는 루이사의 <My Husband Makes Movies> 또한 현재진행형 진술이며, 1960년대 이탈리아 대중문화가 미국에 끼친 영향을 찬양하는 스테파니의 <Cinema Italiano>는 귀도가 아니라 스테파니 자신의 판타지처럼 보인다. 게다가 이들 노래는 뮤지컬에서처럼 각각의 캐릭터가 홀로 부르게 돼 있다. 이런 점들 때문에 드라마와 노래는 부조응하고 전체적인 내러티브는 지극히 산만한 인상을 준다. 각각의 개별 무대는 눈부시게 화려하지만 전체적인 이야기를 풍성하게 해주는 대신 노래가 끝나는 동시에 감흥은 소멸된다. 야한 분위기의 노래장면들이 산개되다 보니 ‘영화를 만들던 귀도가 여성들에 관한 판타지를 갖는다’는 쪽이 아니라 ‘란제리 패션쇼 또는 성인클럽에 간 귀도가 자신의 영화 만드는 과정을 환상으로 본다’(롭 마셜은 브로드웨이에서 <카바레>를 연출한 바 있다)고 하는 편이 더 걸맞을 듯 느껴진다. 이로 인해 <나인>이라는 세계의 중심이어야 할 귀도는 가장자리로 밀려나는 듯 보인다. <8과 1/2>이나 뮤지컬 <나인>과 달리 귀도가 맞은 중년의 위기, 창작의 고통, 여성들에게 버림받는 아픔이 그리 처연하게 다가오지 않는 것도 그 탓이다. 여기에는 이야기의 결말을 지극히 단순한 멜로드라마로 마무리지으려는 시나리오도 큰 영향을 끼쳤다.

만약 롭 마셜이 실패한 점이 있다면 그건 <8과 1/2>과 뮤지컬 <나인>의 장점을 모두 가져오려 했던 데 있는지도 모른다. 영화 <나인>은 앞선 두 가지 버전을 엮어놓았지만 완결적인 뮤지컬영화의 구조를 구축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한 듯 보인다. 물론 “제목을 <나인>이 아니라 차라리 <제로>라고 짓지 그랬어”라는 일부 서구 언론의 혹평에 동의할 정도는 아니다. 스타와 비현실적인 찬란함에 대한 매료 또한 영화에서 접할 수 있는 즐거움이라고 한다면, 그 점에서만큼 <나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충족시켜준다. 뮤지컬 팬이라면 더할 나위 없는 기회라는 점도 확실하다. 니콜 키드먼, 페넬로페 크루즈, 마리온 코티아르, 케이트 허드슨, 퍼기가 한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모습을 대체 언제, 어디서 다시 볼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다들 야한 란제리만 입었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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