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전복적인 불쾌의 미학에 물들어보라
2010-01-06
글 : 김지미 (영화평론가)
1월5일부터 서울아트시네마와 아이공에서 바바라 해머 회고전 열려
<여성의 옷장>

‘당신은 남성인가, 여성인가’라는 질문은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줄곧 부딪히게 되는 일상적인 문제이다. 병원에서 판정된 성별의 결과에 따라 핑크색 혹은 하늘색 옷으로 구분되며, 손에는 인형이나 자동차가 선별적으로 쥐어진다. 성별에 따라 다른 대접을 받는 것도 매우 폭력적이지만, 근원적으로 단 두가지의 성별로 나눈다는 것 자체가 매우 폭력적인 일이다. 그래서 뤼스 이리가라이는 고정된 틀 안에 갇힐 수 없는 인간의 다양한 성차를 논하며 ‘하나이지 않은 성(性)’을 이야기했고, 주디스 버틀러는 ‘젠더를 말하기 이전에 원초적이며 본질적인 구분으로서 섹스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에 대해 회의하며 ‘젠더 트러블’을 말하지 않았던가. 바바라 해머의 영화들은 이런 페미니즘, 특히 레즈비언 성담론의 최전방을 이미지, 활자, 사운드를 통해 실험적으로 구성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그의 영화는 여러모로 ‘불쾌’를 유발하는데, 그것은 여성 성기의 적나라한 노출과 레즈비언/게이 성애에 대한 직설적인 표현에서 기인한다. 그의 영화는 역으로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남성 중심적이고 이성애적인 성담론에 지독하게 물들어 있었는지 깨닫게 한다. 우리의 욕망을 좀더 자유롭게 풀어주기 위해 2010년 1월5일부터 30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와 아이공에서 펼쳐지는 바바라 해머의 회고전을 보며 한 방향으로만 치우친, 안일한 ‘쾌’에서 벗어나볼 필요가 있다.

말이 아닌 은유
A Horse Is Not A Metaphorㅣ 2008년ㅣ30분ㅣDVD 난소암과 투병하며 생사의 갈림길에 섰던 바바라 해머의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완성한 실험영화. 2009년 베를린영화제에서 퀴어영화에 수여되는 작품상(Teddy Awards)을 수상했으며 국내 최초로 소개되는 그의 최신작이다. 난소암으로 판정받고 화학적 치료를 받으며 단계별로 겪게 되는 육체적 변화들을 영상으로, 그에 따른 심리적 변화는 내레이션으로 담고 있다. 승마를 하는 자신의 모습과 건강한 말의 육체를 유비적으로 그리고 투병으로 인해 신체적 자유를 속박당하는 과정을 실험적 영상을 통해 포착한다. 특히 그녀가 머리카락을 점점 상실하는 모습, 건강을 회복한 이후 숲에서 나체로 해방감을 느끼는 장면 등이 매우 인상적이다. 작품 전반에 깔린, 미국의 현대무용가이자 작곡가인 동시에 영화감독인 메레디스 멍크의 음악은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 자신의 육체를 재발견해내는 서술자의 진술에 더 큰 힘을 실어주며 관객의 감정적 공명을 이끌어낸다.

질산염 키스
Nitrate Kiss ㅣ1992년ㅣ67분 ㅣ16mm 게이 커플의 인터뷰와 동성 커플의 성애장면을 1933년에 제작된 무성 게이 에로 실험영화인 <Lot in Sodom>의 영상과 함께 편집한 영화다. 노년의 레즈비언 커플, 흑백 남성 게이 커플, 피어싱과 문신을 한 레즈비언 커플 여기에 SM 취향의 레즈비언 커플까지 영화에 등장하는 연인들의 조합은 시각적으로 매우 낯설다. 주류영화에는 등장한 적도, 등장할 수도 없는 이 커플들이 화면 위에서 벌이는 육체의 향연은 에로틱한 동시에 정치적이다. 또한 <Lot in Sodom>의 영화 속 인물들이 마치 현재의 동성애 커플을 지켜보는 듯한 독특한 편집이 눈에 띈다. 자신이 죽기 전에 자신의 성적 취향을 나타내는 표식들을 모두 없애버리려고 했던 레즈비언 작가 윌라 카터의 이야기와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 유대인이나 집시 같이 수용대상으로 분류되었던 레즈비언 수난사를 담은 내레이션을 통해 동성애자들에 대한 역사적 탄압을 증언한다.

바비의 일생
Tender Fiction Still Point ㅣ1995년ㅣ58분 ㅣ16mm 딸을 셜리 템플로 만들고 싶었던, 우크라이나 출신 노동계급 이민자를 어머니로 둔 바바라 해머 자신의 이야기다. <질산염 키스> <역사 수업>과 함께 레즈비언 역사 3부작을 이루는 영화로 자신의 개인사를 통해 레즈비언의 사회사에 접근하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명제에 대한 바바라 해머의 영화적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자서전은 확고 불변한 결과물이 아니라 한 개인이나 사회의 정체성을 찾아가며 계속 진행되는 탐색의 과정’이라는 영화 속 진술처럼 바바라 해머는 자신이 어떻게 레즈비언 정체성을 발견하고 자아, 가족, 사회와 갈등하며 그것을 확립해나갔는지를 개인적인 경험과 동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공적 기억들을 하나로 엮어 이 작품을 완성했다.

저항하는 파라다이스
Resisting Paradise ㅣ1999년ㅣ80분ㅣ16mm 1999년 프랑스 카시스의 아티스트 레지던시에 참가했던 바바라 해머는 마티스, 보나르, 쇠라와 같은 화가들을 음산한 파리에서 끌어내어 아름다운 빛의 세계로 이끌었던 카시스라는 지역에 관심을 갖게 된다. 처음에는 빛과 화가들의 작품 세계를 중심으로 작품을 구상하며 촬영을 준비했던 그녀의 관심은 코소보 전쟁 발발을 계기로 전쟁과 예술가의 삶으로 선회했다. 레지스탕스 활동에 참여했던 마티스의 부인과 딸을 비롯해 그 지역에서 유대인의 탈출이나 생존을 도왔던 레지스탕스 여성들의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졌다. 레지스탕스 여성들의 활약상과 기억을 생생하게 기록하면서 마티스와 보나르, 발터 베냐민의 삶의 흔적들까지 아우르는 이 다큐멘터리는 사실에 대한 중요한 기록이자 회화와 실사가 결합하는 새로운 영상미학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처음엔 예술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으로 화면에 등장했던 카시스의 ‘빛’은 그 위로 아픈 역사적 기억들이 투과되면서 창백하고 잔인한 칼날이 되어 번쩍거린다.

제주도 해녀
Diving Women of Jeju-do ㅣ2007년ㅣ25분ㅣDVD 2000년 여성영화제 때문에 한국에 오게 된 바바라 해머가 ‘제주도에는 여성 잠수부가 있다’라는 관광 안내문 하나에 매료돼 만든 영화. 이후 그녀는 제주에서 5일 밤낮으로 촬영하여 현재 제주 해녀들의 삶을 담아냈다. 한국인에게 익숙한 소재일 뿐 아니라 그녀의 다른 작품들과 달리 실험적 영상이 배제된 전통적인 다큐멘터리 화법으로 촬영된 영화여서 감상하기 수월하다. 특히 그녀가 미국에서 온 할아방인지 할망인지를 헷갈려하는 해녀 할망들과 함께 잠수복을 입고 물속으로 뛰어드는 모습에서 적극적으로 해녀들의 삶에 다가가려는 감독의 의지가 엿보인다. 해녀를 단순히 이국적인 호기심의 대상이나 가부장제 사회의 억압의 산물 등으로 섣불리 규정하지 않고 한국사의 여러 단면과 관련해 다양한 측면을 보여준다.

레즈비언 에로티카
Lesbian Eroticaㅣ1974~78년ㅣ45분ㅣ베타 레즈비언 섹슈얼리티에 대한 네편의 단편 모음. <내가 사랑하는 여인들: Women I Love>은 바바라 해머가 자신의 실제 애인이었던 여성들에게 바치는 일종의 연가이며 <멀티플 오르가즘: Multiple Orgasm>은 우리 주변을 둘러싼 모든 자연 속에서 여성 성기와 오르가슴을 상징화할 수 있는 대상들을 찾아 병치한 기발한 상상력과 뛰어난 관찰력의 산물이다. <레즈비언 사랑의 기술: Dyketactics>에서는 상업화, 규격화된 포르노그래피적 시선에서 벗어나 자연 상태에 놓인 여성의 육체와 레즈비언 섹스가 에로틱하게 펼쳐진다. <이중 강도: Double Strength>는 레즈비언 커플의 달콤한 사랑 고백을 후경으로 삼아 곡예사 여성의 나신을 독특한 미학적 관점으로 재발견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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