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도, 귀도… 귀도! <나인>의 영화감독 귀도 콘티니는 어설픈 술래다. 영감의 갈증에 시달리는 그는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는 세상을 피해 달아나기 급급하지만 일은 쉽게 어긋나고 행방은 금방 들통난다. 그를 찾고자 하는 이들의 욕망이 그의 도피욕을 능가하는 까닭이다. 그리하여 귀도는 아이러니하게도 관계의 헤게모니를 거머쥔 승자요, ‘예스 혹은 노’의 특권을 획득한 행운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귀도 역을 맡은 배우 대니얼 데이 루이스는 어떤가. 극중 페넬로페 크루즈의 정부요, 마리온 코티아르의 남편이자 소피아 로렌의 아들인, 나아가, 니콜 키드먼의 존경을 사고, 주디 덴치와 비전을 공유하며, 케이트 허드슨이 하룻밤 사랑을 갈망하는, 그야말로 선물 같은 한때를 누린 그라면. 게다가 인간 대니얼 데이 루이스는 대개 일과 사생활을 철저하게 분리하는 노련한 술래에 가깝지 않았나. “작업은 순수한 쾌감이나 이를 둘러싼 지엽적인 많은 것이 끔찍하다. 나는 영화를 홍보하기 위한 모든 수단에 호의적으로 반응한 적이 결코 없다. 어떤 영화에 참여하더라도 그런 생각은 항상 나를 머뭇거리게 만들 것이다.”
외부의 압박이 예술가의 내면을 혼돈으로 몰아넣을 수 있음을 일찍이 깨달은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귀도를 선택한 건 어쩌면 운명적인 일이었다. 문제는 <나인>이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 <8과 1/2>을 원전으로 하는 뮤지컬의 영화 버전, 즉 뮤지컬영화라는 데 있었다. “알다시피 롭은 나를 설득했다. 내가 (노래) 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내가 그럴 수 없다는 변명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실제로 그에게 몇몇 (배우들의) 이름을 대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는 말했다. ‘아니, 나는 당신이 노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롭 마셜 감독의 설득은 물론, 헛수고가 아니었다. 대니얼 데이 루이스의 귀도는 마르첼로 마스트로이안니의 귀도보다 미남은 아닐지라도 음탕하고, 영악하며, 섹시하다. 변명조차 유혹적으로 전시하는 그의 목소리는 뮤지컬적인 무드에 적격이다. 혹은 선글라스를 내렸다가 날렵하게 올려 쓰는 손동작이든지, 그 틈을 타 슬며시 노출되는 자기기만적인 시선, 엇박으로 흔들리는 팔다리의 움직임까지. 철저한 에고이스트이자 과장과 조롱, 합리화의 대가인 ‘마에스트로 콘티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듯 대니엘 데이 루이스는 이탈리아 억양의 비논리를 꼬집는 기자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 말이 맞다. 억양 말이다. 그건 다른 영화에서 나를 짜증스럽게 했다. 독일인은 독일어 억양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냥 독일어로 이야기할 뿐이다. 나는 당신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는데, 그건 답이 없기 때문이다. 거부. 그게 내 대답이다. 거부!”
극히 적은 수의 영화에 출연하되 출연하기로 마음먹고 나면 충격적일 만큼 경이로운 변신을 감행하는 괴물 같은 남자. 2년 만의 복귀작 <데어 윌 비 블러드>(2007)로 오스카와 골든글로브, 영국아카데미상(BAFTA)과 배우조합 시상식 등에서 다시 한번 거듭 수상자로 호명된 대니얼 데이 루이스는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리 까다롭지 않다”고 장담했다. “단순히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들을 아주 빨리 알아차릴 뿐이다. 또한 나를 작업으로 잡아끄는 충동을 알아차릴 수 있다. 다만 나이가 들수록 충동이 찾아드는 횟수가 줄어들게 마련이다.” 연기를 혐오하는 배우. 대신, 삶이 자기 몸에 깃들 때까지 초기 석유 시추업자들의 도구를 익히고(<데어 윌 비 블러드>), 두달 동안 19세기 귀족의 의상을 걸치고 현대 뉴욕을 활보하는가 하면(<순수의 시대>), 갈비뼈가 부러질 때까지 휠체어에서 일어서려 하지 않았던(<나의 왼발>) 영화의 노예. 그러므로 대니얼 데이 루이스는 쏟아지는 러브콜에 예스 혹은 노의 특권을 획득한 몇 안되는 배우인 동시에, 어설픈 술래일 수밖에 없다. 영화로 회귀하고자 하는 욕망이, 그의 지독한 도피욕을 매번 능가하는 까닭이다. 빙의의, 나아가 영화라는 기적에 중독된 대니얼 데이 루이스는 반문했다. “사람들은 언제나 내게 묻는다. 작업을 준비하기 위해 이것저것 배워야만 한다는 게 이상하지 않나. 그러나 무엇이 진정으로 영화 작업 자체보다 더 이상할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