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영화에서 단 하나의 장면만 떠오르게 된다. 필립 리오레의 <웰컴>의 경우, 후반부에 쿠르드족 청년 비랄이 도버해협을 수영으로 건너는 장면이 그랬다. 감독이 이 장면을 찍기 위해 영화를 만든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만큼 그 장면 하나가 인상 깊었다. 몹시 추운 날 이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뼛속까지 시리는 아픔 비슷한 것이 그 장면을 보고 찾아왔다. 표면적으로 17살 소년은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인데,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극적 인위성을 감안하고서라도 소년에게는 다른 삶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4,000km 이상 사막을 걸어 프랑스에 온 소년은 영국에 가려 한다. 거기에는 연인도 있고 자신의 우상인 축구선수 호나우두도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끝장면에서 비랄을 우연찮게 잠시 돌봐준 수영코치 시몬이 비랄이 도버해협을 건너다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 런던으로 가서 비랄의 애인을 만나 자신의 것이었던 결혼반지를 비랄의 선물이라고 속여 전해주려는 상황이 나온다. 비랄의 애인은 거절한다. 그녀는 아버지의 강권으로 아버지의 친구인 중년 남자에게 곧 시집을 가야 한다. 맥없이 그곳을 떠나던 시몬의 눈에 텔레비전 중계 중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축구 경기 모습이 잡힌다. 마침 호나우두는 골을 넣고 포효하듯이 거만한 세레모니를 하고 있다. 화면 속의 호나우두, 누구의 시선도 받지 않겠다는 듯 의기양양한 모습과 그를 쳐다보는 시몬의 얼굴에서 영화는 끝난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감시하는 사회
삶에서의 불가능한 판타지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불우한 17살 쿠르드족 소년에게 있었던 것은 행운일까, 불행일까. <웰컴>의 후반부 두 장면은 어쩔 수 없이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강박을 띨 수밖에 없는 이 영화의 선의에서 가장 뾰족하게 튀어나온 이미지였다. 많은 가난하고 비전없는 소년과 청년들이 호나우두의 성공을 보며 꿈을 키울 것이다. 극소수의 성공 아래에 바벨탑처럼 쌓인 숱한 좌절의 기록들이 있을 것이다. 사다리를 올라가는 것이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목숨을 걸고서라도 도버해협을 맨몸으로 건너겠다는 결심을 한 영화 속 소년의 절실함은 어떤 것일까. 비랄이라는 이 소년은 바람처럼 빠르게 달리는 말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고 축구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유서 깊은 박해의 역사를 가진 고향을 떠나 서구사회로 그가 건너왔을 때 기댈 것은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는 희망과 애인을 만나겠다는 달뜬 마음뿐이다.
이런 것들이 부질없는, 한줌 재와 같은 기대라는 걸 비랄을 보살펴주는 프랑스인 시몬은 안다. 그는 한때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으나 이제는 지방 소도시에서 수영 강습을 하며 살아간다. 방금 이혼을 했고 삶에 별다른 희망이 없다. 겉으로 딱딱하게 구는 그의 태도는 앞으로 남은 삶에서 기대할 것이 없는 중년 남자의 공허를 감추기 위한 갑옷이다. 그가 미친 듯이 수영 연습을 하는 소년을 보며 한심해할 때 그는 소년에게서 자신에게는 없는 절실함을 감상적으로 느낀다. 거기서 잠시 연민을 품은 뒤 하룻밤 그를 재워준 것이 그를 둘러싼 적대적인 환경을 그로 하여금 자각하게 만든다. 이웃은 경찰에 신고를 하고 시몬은 요주의 인물로 감시당한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감시하는 사회가 된 칼레의 서슬 푸른 풍경이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두 남자, 중년의 서구인과 쿠르드족 소년의 희미한 교감을 방해하는 것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 감독 필립 리오레의 신중함이다.
예전에 이 지면에서 몇번 지적했듯이 이방인을 대하는 태도는 정치적 올바름의 강박에서 자유롭지 못할 경우 거꾸로 수직적인 시선의 덫을 피하지 못한다. 한국도 이제 어느 나라 못지않은 다인종 사회가 돼가고 있으나 소수자 이방인을 대하는 시선은 이제 막 열리기 시작했을 뿐이다. <웰컴>과 비슷한 소재를 다뤘으며 역시 한국에서 자그마한 규모로 개봉한 <비지터>란 영화에도 감독은 그들 내면을 다 아는 척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삶에 무감각해진 교수는 젊은 아프리카인에게서 북치는 솜씨를 배우고 그 리듬에 반해 열심히 북을 두드린다. 그것 때문에 그는 본국으로 추방당하는 젊은이를 번거롭게 끝까지 도와야 하는 처지를 감내한다.
갱생의 기회는 모두에게 오지 않고
나는 이런 종류의 망설임, 도와야 하는 것은 알겠는데 내키지 않는 심정으로 어쩔 수 없이 끌려가다가 결국 세상의 비극을 목격하게 되는 주인공들의 처지를 그리는 것이 비교적 솔직한 창작자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웰컴>의 필립 리오레 감독도 그 비슷한 것을 해낸다. 시몬이 비랄을 도와준 것은 하룻밤의 감상적인 휴머니즘에서 우발적으로 저지른 행위였다. 그에게는 이 행위가 사소한 것이었으나 불법 체류자 문제로 시끄러운 칼레에서는 대단한 일이었다. 시몬은 원치 않는 가운데 자꾸 비랄의 처지를 기웃거리게 된다. 비랄이 묵고 있는 칼레의 불법 이민자 수용소, 경찰이 무지막지한 몽둥이로 다스리는 그곳의 현실을 알게 되면서 시몬은 비랄을 더 도울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이는 그 자신이 비참하다고 여겼던 삶에 다소 원기를 불어넣는다.
비랄과 마찬가지로 시몬도 이 자기갱생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한다. 영화 중반, 시몬이 걱정돼서 찾아온 전처와 고민을 나누다가 시몬은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가 완곡하게 거절하는데도 관계를 맺는다. 관계가 끝난 뒤 황폐한 심정으로 어쩔 줄 모르는 두 남녀에게 비랄의 불행한 운명에 관한 소식을 알리는 전화가 온다. 시몬의 전처는 자신에게 달려든 시몬을 책망하고 그곳을 떠난다. 애인을 찾아 도버해협을 건너던 소년의 실패와 전처와 재결합하고 싶어 하는 자신의 실패가 겹치서 시몬의 삶은 더욱 어둠에 갇힌다. 개인적인 것을 전체의 삶과 반드시 이을 필요는 없지만 <웰컴>은 우리의 개별적인 삶이 어떻게든 필연적으로 상호연관되어 있는 지점을 드러낸다. 시몬이 대단한 일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걸 하기 위해선 그가 개인적 희생을 치러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걸 해냈음에도 갱생의 기회는 시몬에게나 비랄에게나 오지 않는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주며 끝난다.
작은 규모의 영화이고 관객에게 큰 제스처를 취하는 영화도 아니지만 <웰컴>을 보는 느낌은 요즘 같이 시절이 하 수상한 세상에선 좀더 공명이 컸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시선을 줬을 때 그건 전과 다른 삶의 경험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어디서나 있는 불행이라고, 신문 방송에서 볼 듯한 일이라고 지나치며 살아갈 수도 있겠지만 이 영화에서의 시몬처럼 누군가에게 잠시라도 시선을 줬을 경우 그의 삶의 개별성은 나의 개별성과 묶이고 연대가 가능하지 않은 세상의 질서로부터 진한 복수를 당한다. 전반적으로 차가운 이 영화에서의 풍경, 소년이 수영으로 건너는 도버해협의 압도적인 무서움, 그런 것들이 영화가 끝나고 잔상으로 남게 된다. 활기찬 한 젊은 육체가 필사적으로 헤엄쳐가는 바다 위로 넘실대는 위압적인 파도와 거대한 배가 지나가는 풍경은 아무리 인위적으로 창조된 광경이라 해도 육체적으로 진한 통증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