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어러브>는 신연식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이다. 감독은 데뷔작 <좋은 배우>로 초저예산(300만원)에도 불구하고 결이 살아 있는 영화를 만들었다는 호평을 받았다. 두 번째 행보에서는 그 결을 전적으로 사랑하는 연인들의 관계에 새겨넣었다. <페어러브>를 소개할 때 먼저 로맨틱코미디라고 말해도 틀리지는 않지만 이 영화는 로맨틱코미디가 일반화한 장르적 공식을 일부분 따르면서도 때로 줏대있게 튕겨낼 줄 안다. 무작정 납품을 목적으로 한 몇몇 한국의 로맨틱코미디와는 다르며 그로써 단순 공산품이 되는 비운을 잘 피해낸 것 같다.
<페어러브>는 많은 로맨틱코미디처럼 우연의 관계에서 시작하지만 꿈결 같은 행복의 땅에서 끝나지는 않는다. 감독은 “바티칸 교황청의 사진사”에서 영화의 영감을 얻었다고 밝히고 있는데 그게 흥미로운 단초가 될 수도 있겠다. 공고한 세계에 수십년간 살던 사람에게 갑자기 찾아온 새로운 외부의 영향력. 그게 사랑이라면 그는 어떻게 눈뜨게 될 것인가. 수행하는 구도자처럼 삶을 살아온 건실한 어느 카메라 수리공에게 그 외부의 세계가 접속해왔을 때 그의 삶은 과연 어떠할 것인가.
그러니까 덜컥 친구의 딸을 사랑하게 됐다. 그것이 오십이 넘을 때까지 그 누구와 한번도 사랑에 빠져 본 적 없는 사진기 수리공 형만(안성기)에게 갑자기 찾아온 곤경이자 축복이다. 처음에는 전적으로 곤경이었다. 빌려준 돈을 떼어먹고 오랫동안 잠적해 있던 옛 친구 녀석이 별안간 소식을 알려왔는데 그는 간암으로 지금 죽어가고 있으며 임종 직전 형만에게 죄를 빌고 유언처럼 부탁을 남긴다. 남겨진 딸 남은(이하나)이 형만의 가게와 가까운데 홀로 살고 있으니 매일 한번씩 찾아가 살펴달라고 한다. 형만과 남은의 수십년 나이 차이를 뛰어넘은 사랑은 이렇게 시작됐다.
완만하게 감정 모으고 느리게 전진
그런데 스물다섯살 남은은 좀 특이하다. 같은 또래는 시시하다며 오십 넘은 아저씨 형만에게 점점 더 관심을 보인다. 그녀가 그를 좋아하는데 형만이 모를 리 없다. 싫기는커녕 가슴이 터질 것처럼 설레는데 그게 바로 고민이다. 사랑의 열병을 앓게 되었는데 그 상대자가 친구의 딸이니 큰 죄를 진 것 같다. 형만은 말 못하고 혼자 앓으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몰래 답을 구한다. 목사 친구에게 성경에는 사랑이 어떻게 언급되어 있느냐고 묻는가 하면, 가게의 젊은 직원에게는 사랑하면 어떤 장벽이라도 다 뛰어넘을 수 있는 거냐고 묻는다. 결국 형만은 용기를 내어 남은의 구애를 받아들이고 그동안 가게 식구들에게 조카로 소개해왔던 남은을 이제 연인으로 새롭게 알린다. 곤경은 지나갔고 형만에게 사랑은 이제 축복이 됐다. <페어러브>의 이야기는 이 곤경과 축복의 아름다운 드라마에 그치지 않고 그 이후의 시간으로 더 진전된다.
감정을 재촉하지 않는 것이 <페어러브>의 전반적인 흐름상 매력이다. 성급하게 감정을 몰아치고 나서 그 다음 장면에서는 영화 스스로 기억상실증에 걸리는 실수를 이 영화는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완만하게 감정을 모은 다음 이완과 느린 전진을 통해 다시 전개된다. 다만 때때로 느리고 멋스러운 음악에 장면을 너무 오래 의탁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 음악 자체가 아름답기는 해도 영화에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는 미지수다. <페어러브>의 많지 않은 흠 중 하나다.
실은 섬세하고 위트있는 대사들이 영화의 결을 살리는 데 기여하는 바가 더 크다. <페어러브>를 보는 가장 큰 재미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인물들은 전체의 흐름에 해가 되지 않을 만큼, 아니 무언가 느슨해질 것 같아 걱정이 될 때쯤 적절하고 위트있는 혹은 은유적이면서도 의미심장한 대사 한 토막씩을 던진다. 그건 꼭 주인공인 형만과 남은만 그런 것은 아니다. 형만이 자기의 사랑이 부도덕한 것인지 아닌지 고민할 때 그는 가게에서 함께 일하는 젊은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묻는다. 사랑하면 누구하고나 결혼할 수 있는 거냐고 묻자, “사랑하면 외계인이라도 되고, 외계인이라도 예뻐야 한다”는 말이 형만에게 돌아온다. 형만은 그 말에 용기를 내어 남은의 사랑을 받아들일 용기를 얻는다. 그에게 남은은 외계인도 아닐뿐더러 더구나 더없이 예쁘고 사랑스럽지 않은가. 그러니 나이 차이는 부도덕함이 아니라고 확신하게 된다.
대사들이 귀엽게 느껴진다면 소박한 인물들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일반의 로맨틱코미디에 비해 각은 덜 세워졌지만 더 순화된 인물상이 <페어러브>에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형만 역을 맡은 안성기가 가장 귀엽다(?). 배우로서의 안성기는 때로 철저한 양식적 연기보다 그 자신의 천성적인 소탈한 목소리와 약간 구부정하게 몸을 굽힐 줄 아는 겸손한 몸의 각도만으로도 착하고 성실한 한 사람의 성품을 더할 나위 없이 연기해낸다. 반평생을 작은 카메라 작업대 위에 웅크리고 살아왔고 이제 오십을 넘어서 별안간 사랑을 배운 이 소심하고 정겨운 한 남자를 안성기는 멋지게 표현한다.
사랑의 상투성까지 끌어안다
<페어러브>는 이들의 사랑이 얼마나 특별한가를 웅변할 것처럼 시작한다. 하지만 사랑에 관한 <페어러브>의 가장 큰 포용력은 되레 사랑의 상투성까지 끌어안았다는 데에 있다. 특별하게 시작해서 상투적인 면모를 끌어안다? 이 특별한 사랑조차,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모두가 빠지곤 하는 그 갈등의 사막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는 것이 이 영화의 작은 주장이자 성찰이다. 가령 이런 변화들이 있다. 남은은 처음에 “기술을 가진 사람들은 다 신비롭다”고 한다. 형만의 직업에 대한 애정이 담긴 말이다. “유학에는 관심없다”고 한다. 형만의 옆에만 있겠다는 약속이다. 하지만 그녀는 나중에 형만에게 말한다. “평생 그곳에 매여 있지 말고 새로운 일을 찾아보라” “새로운 걸 알고 싶다”. 남은만 자기도 모르게 변하는 것은 아니다. 형만은 처음에 기계란 “관계만 알면 못 고칠 게 없다”고 한다. 그것이 그의 신념이고 모든 것에 적용하는 인생관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에게 사랑은 그렇지 않고 한번 틀이 깨어지고 나더니 보호자에서 사랑받는 사람으로, 구애하는 사람으로 계속 변모한다. 영원히 따뜻하게 안아줄 것만 같았던 그조차도 칭얼대고 매달린다. <페어러브>의 주인공 형만과 남은은 작은 굽이들을 돌며 만남, 열애, 갈등이라는 사랑의 통과의례를 다른 젊은 연인들이 그렇듯이 모두 거쳐간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제목이 <페어러브>인 것은 중의적이다. 사랑은 공정하다인데 어떻게 공정하다는 것인가. 처음에 우리는 그 공정함을 사랑에는 기준과 정도는 없다는 뜻의 공정함으로 이해하게 된다. 나이 차이가 많건 적건 사랑하는 것은 공평한 행위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양상이 더 있다. 특별한 사랑이라고 하여 유별난 단계만 거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특별한 사랑에조차 불안과 갈등은 매사 공정하게 찾아온다. 특별한 사랑은 변하지 않는가. 아니, 그들의 것도 사랑이니 변한다. 그게 감독의 의중인 듯 하다.
귀엽고 소박한 소동극인 동시에 성찰극
‘사랑에는 정도가 없으니 누구나 공정하게 사랑할 수 있다’와 ‘사랑은 변하는 것이고 그 변화의 바람은 누구의 사랑에나 공정하게 불게 마련이다’는 두 가지 태도를 모두 포괄하고 있는 이 영화에 얼마나 공감할지는 개인의 몫이다. 하지만 찬란한 환상과 허무맹랑한 행복론을 경계한 채로 삶의 한쪽에 명실상부하게 존재하는 상투적 진리까지 끌어안으려 한 이 영화의 작은 성찰은 존중할 만하다. 그로써 <페어러브>는 사랑에 관한 조용하고 귀엽고 소박한 소동극이며 동시에 작은 성찰극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