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편집장님.
=뭐야. 당신이 새로온 에밀린가? (옷과 가방을 데스크에 사정없이 던지며) 이 퍼 베스트 드라이클리닝 좀 맡기고 에르메스 매장에 가서 스카프 좀 찾아와요.
-이런. 전 새 어시스턴트가 아니고 기잡니다. 인터뷰를 하러 왔어요. 가상인터뷰 역사상 첫 번째 진짜 인물 가상인터뷰라서 부담스럽긴 하지만. 편집장님과 꼭 좀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근데 안나 윈투어 편집장님 아닌가요? 꼭 미란다와 이야기하는 듯한 기분이 드는걸요.
=그 영화 이야기는 제 앞에서 꺼내지 마세요.
-넵. 그러겠습니다. 정말 묻고 싶은 질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대체 21년 동안 편집장 자리를 지키려면 뭘 해야 하는 거죠?
=대답은 하나뿐이죠. 책을 잘 팔리게 만드는 것.
-그것만 잘하면 되는 건가요?
=그것? 그것? 명색이 에디터라면서 그런 식으로 말을 하다니 정말 놀랍군요. 잡지에 있어서 판매량은 정말로 중요한 요소예요. 1988년에 제가 편집장에 올랐을 때 <보그>는 망해가고 있었어요. 전 편집장이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젊은 잡지시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탈리안 보그>도 여전히 잘 팔립니다. 그들은 <보그 USA>처럼 셀레브리티를 표지로 내세우지 않고 전통적인 모델 사진만으로도 우아하게 잘 팔리지 않나요?
=우아한 척 몰락해가는 걸 로맨틱하게 포장하는 게 이탈리아인들의 장기죠.
-단호하시군요.
=전 대중을 위한 패션 잡지를 만듭니다. 게다가 마크 제이콥스, 존 갈리아노, 잭 포즌. 모두 제가 발굴한 신인 디자이너들이었어요. 지금은 업계를 쥐고 흔드는 최고의 디자이너들이 됐죠. 미국판 <보그>는 항상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씨네21>도 발굴에 게으르지 않습니다. 이번주 특집도 독립영화계 감독인 곡사와 김종관의 현장인걸요. 그나저나 정말 집에서도 일만 하시나요? “전 집에서 놀지 않아요”라고 <셉템버 이슈> 감독에게 말했다던데.
=놀지 않습니다. 제가 하는 모든 것은 일의 연속이에요. 제가 집에서 보는 책과 잡지, 집에서 듣는 음악, 벽에 거는 액자 하나까지 모두 <보그>의 일부분입니다. 저의 라이프 스타일이 바로 <보그>예요.
-아무리 그래도 정말 훌륭한 인터뷰이를 인터뷰해왔는데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잡지에서 빼버린 건 보기가 좀 그랬어요.
=세상이 정치적으로 공정하기만 하면 무슨 재미가 있죠? 영화는 언제나 정치적으로 공정하기만 한가요? 옛날 영화를 복원하면서 담배를 디지털로 지워버리는 게 공정해요? 잉그리드 버그먼의 대사들도 남녀평등의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바꿔버릴 건가요? 패션이 정치적으로 공정해야 하나요? 그러고보니 당신 역시 뱃살 좀 뺄 필요가 있겠구먼.
-그건 저도 압니다. 흑. 그나저나 젊은 시절 에디터로 일할 때는 글을 못 쓰는 걸로 유명했다면서요? 글을 지나치게 못 쓴 나머지 잡지사에서 글 쓰는 에디터를 따로 붙여줄 정도였다던데. 푸훗.
=글만 잘 쓴다고 <보그>의 에디터가 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에디터는 글과 비주얼을 잡지적으로 결합해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해요. 그리고 제가 원했던 건 처음부터 편집장. 편집장 자리였어요.
-이번주부터 <씨네21>의 편집장을 문석 기자가 새로 맡게 됐습니다. 편집장계의 거성으로서 뭔가 조언해주실 말은 없나요?
=기자들을 종처럼 부려요. 나쁜 편집장이 좋은 편집장이에요. 아주 혹독하게 들들 볶….
-다… 닥… 닥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