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 이어 이번엔 <여행>이다. <여행>은 문화체육관광부의 관광진흥개발기금으로 디앤디미디어와 아리랑국제방송이 제작하는 프로젝트 <영화, 한국을 만나다>의 일환으로, 배창호 감독이 연출한 옴니버스 신작 제목이다. 서울(윤태용 감독), 부산(김성호 감독), 제주도(배창호 감독), 춘천(전계수 감독), 인천(문승욱 감독) 등 5개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이번 프로젝트에서 배창호 감독은 제주도를 선택했고, ‘눈만 돌리면 관광지’인 제주도 곳곳을 서성이는 <여행>의 주인공들은 외부와 내면이 섬세하게 조응하는 특별한 순간들을 맞닥뜨린다. 공모전 준비를 위해 제주도를 찾은 사진부원 준형과 경미는 친구와 연인 사이의 경계에서 머뭇거리고(<여행>), 10여년 전 가출한 엄마를 찾아나선 15살 소녀 수연은 방학 동안 좀더 성숙해진다(<방학>). 명예퇴직한 남편과 중학생 딸에 치어살다가 충동적으로 혼자만의 여행을 떠난 주부 은희는 자유를 만끽한다(<외출>).
<여행>은 배창호 감독의 기존 영화들에서 좀처럼 보기 힘들던 측면을 보여준다. 일상의 한 단면을 뚝 잘라붙인 듯한 캐주얼한 화면과 대사들이 처음엔 낯설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매 순간 경험하는 갈등이나 고통도 결국에는 용서와 사랑으로 극복하며 다시금 행복해지려는 의지를 잃지 않는 선한 주인공들은 그대로다. 초봄 개봉을 준비하고 있는 <여행>은 1월23일(토),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의 일환으로 최초 공개된다.
-<길> 개봉 이후 3년 만이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가.
=많은 일이 있었다. <길>이 오랜 기다림 끝에 개봉했고, 건국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직을 사직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다시 창작에 전념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난 3년 동안은 내 영화와 내 삶을 정리하는 기간이었다. 하고 싶은 전원생활도 해봤고, 현재의 한국영화계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나 개인에 대해서도 모자라고 보충해야 할 부분과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에 대해 고민했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나의 전작전을 개최한 것도 의미가 컸다. 한 자리에서 나의 예전 영화들을 죽 몰아본다는 게 흔치 않은 경험이니까, 마치 전생을 더듬어보는 듯했다. 그외에는 내가 큰 관심을 갖고 있던 아프리카 로케이션 영화를 준비했고, 헌팅과 추진 과정을 1년 정도 겪었다. 지금은 유보 상태다.
-아프리카 로케이션 영화라니, 궁금하다. 아프리카의 어떤 부분에 관심이 있는 건가.
=1978년에 케냐에서 현대종합상사 지사장으로 근무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영화계로 건너올 때 스스로에게 약속한 바가 있었다. 케냐에 실존했던 한인 의사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겠다고. 하지만 최근에 준비했던 건 다른 얘기였다. 한국에도 몇번 와서 공연을 가진 케냐어린이합창단에 관한 영화였다.
-<영화, 한국을 만나다> 프로젝트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지난해 봄에 시작됐다. 디앤디미디어 오동진 대표가 제의했고, 나야 한국의 자연이 아름답게 녹아드는 프로젝트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지금까지 해온 작업들도 언제나 그 연장선상에 있었고.
-그렇다면 왜 제주도를 선택했나. 그동안 유독 ‘길’을 표현한 예술 작품을 좋아한다고 누누이 밝힌 바 있기 때문에 잘 어울리는 공간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제주도는 한국에서 가장 독특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여행을 자주 다니기도 했고, 지금까지 <천국의 계단>이나 <기쁜 우리 젊은 날> 등 대여섯 작품에서 부분 로케이션도 진행했다. 전체 로케이션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제주도에서 어떤 공간들을 보여주려고 했나. 의외로 한라산이나 일출봉 같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관광지는 별로 안 나오더라. 그마나 요즘 유명해진 ‘올레길’ 정도? 공간 자체보다 인물에 더 초점을 맞춘 느낌이다.
=내가 제주도 가이드가 되어 <여행>의 관객에게 자전거를 타고 한 바퀴 직접 돌아본 듯한 체험을 갖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헌팅 당시 느낀 게, 제주도는 어딜 가더라도 관광지이기 때문에 굳이 명소만 찾아다닐 필요가 없었다. 유명한 곳을 일부러 보여주기보다 스토리가 용납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인물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너무 무겁지 않게, 넘치지 않게 담는 것이 중요했다. 제주도 헌팅을 처음 가서는 가능한 한 많이, 빨리 둘러보면서 장소와 인물이 한꺼번에 접함점을 찾을 수 있는 이야기를 궁리했다. 그러다가 ‘제주도=관광지’라는 공식에 부합하는 보편적인 에피소드인 ‘여행’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여행’을 준비하다가 보니 관광객 입장에서만 찍기보다 여기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담으면 어떨까 싶어 두 번째 에피소드 ‘방학’을 구상했다. 세 번째 에피소드 ‘외출’은 그 다음 연결시켰고.
-옴니버스영화를 만들면서 에피소드당 ‘여행, 방학, 외출’이라는 시간대, 그러니까 평범한 일상에서는 약간 비껴나 있는 시간대를 부여했다.
=자연을 보여주기 위한 가장 보편적인 방법으로는 여행을 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누구나 살면서 여행 도중 이런 작고 소소한 경험을 한번쯤 겪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이야기를 얼마나 깊이있게 들려주느냐다. 이번 시나리오를 전부 하나하나 내가 다 쓴 건 아니다. 내가 먼저 중요 테마와 방향을 잡은 다음 1편은 학교 제자들과 함께 썼고, 2편은 당시 중학교 2학년이던 딸과 3편은 나의 아내이자 김은희 역으로 출연한 김유미씨와 같이 썼다.
-혹시 세편의 단편이 묶이면서 느슨한 하나의 장편을 염두에 둔 것인지.
=처음엔 하나의 장편으로 묶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1편 ‘여행’에 나오는 비밀스런 스쿠터 여성이 3편 ‘외출’의 은희일 수도 있고, 또 ‘여행’의 나이 많은 해녀가 2편 ‘방학’의 수연 할머니일 수도 있고. 하지만 내 자신이 너무 뚜렷한 상징이나 연결고리를 그렇게 좋아하는 편이 아니어서 그 생각은 포기했다.
-세편 모두 여성이 주인공이다. 최근의 전작 <정>이나 <길> 등의 여주인공들은 어두운 고난의 시간을 견뎌내는데, <여행>의 여성들은 아주 평범한 현대인들이다.
=<여행>은 아주 소박하고 담백하게 가고 싶었다. 거의 가공하지 않은 현실 속 이야기를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전작들보다는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좀 열린 태도를 취했고, 아까 말했다시피 같이 작업한 여성들을 쥐어짜기도 했다. 비유하자면 내가 참기름 틀이었달까. (웃음) 공동작업을 통해 변화가 가능했던 것 같다.
-같이 작업한 어린 제자들이나 가족의 반응은 어떻던가.
=다들 즐거워했다. 자신의 체험을 집중력있게 파고들어 정제하면 얼마든지 영화로 재창조할 수 있다. 누구의 삶이든 다 영화가 될 수 있다. 마음을 열고 느끼면 된다. 그것이 영화의 힘이고 예술의 힘이고 창작의 힘이다.
-두 번째 에피소드 ‘방학’의 주인공 수연은 제주도에서 픽업한 새 얼굴인가. 할머니 역의 배우와 함께 놀랍도록 자연스런 연기를 보여준다.
=맞다. ‘방학’의 방향을 정하자마자 바로 제주도쪽 연기 학원과 연극 단체들에 오디션 공고를 냈다. 연기의 숙련도가 가장 중요했다면 그냥 내가 알던 배우를 쓸 수도 있었겠지만, ‘방학’의 스토리 특성상 제주도에서 진득하게 살아온 사람의 느낌이 나야만 했다. 해풍이 묻어 있어야 한다고 할까. 해녀들이 쓰는 사투리 역시 타 지역 관객이 잘 못 알아듣더라도 대략적으로 뜻이 이해될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수연 할머니를 연기한 배우는 제주도 민속극을 오래 작업한 분이기도 하다.
-1996년 <러브스토리> 이후 오랜만에 동시대로 시선을 돌렸다. 당신이 보는 동시대는 어떤 풍경인가.
=몇년 동안 쉬면서 동시대 영화를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요즘 영화들이 너무 인간의 경박하고 비열하고 어두운 면을 부각하는 편이고 관객 역시 그걸 새로운 경향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물론 인간에게는 누구나 비겁하고 왜소한 면이나 열등감이 있지만, 그쪽으로만 관객이 공감하게 되는 방향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동시대 사람들에게도 순수한 우정과 사랑이 변함없이 존재한다는 걸 편견없이 귀를 열고 기울이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이런 생각을 두고 로맨티시즘이라고 한 단어로 정리해버리기도 하던데, 그건 사람들이 그런 시선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근작 <길>에서는 적은 예산으로도 한국적인 미를 고민하는 미장센과 색깔 등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 저력을 보여주었는데, <여행>에선 정교한 미장센보다는 인물들의 클로즈업 위주로 바뀌었다. 프로젝트 특성상 공간이 중요한 영화를 찍을 때, 오히려 공간보다 인물쪽에 집중한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나는 찰리 채플린의 무성영화부터 보고 자란 세대다. 지난 시절 고전영화들의 연출력들이 내 안에 쌓여 있고 기억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기억을 떨쳐내려 했다. 연출자적인 숏을 떨쳐내려 했다는 말이다. <여행>은 보여지도록 연출된 게 아니다. 인물들이 본 대로, 느낀 대로 카메라에 담으려고 했다. 이 영화의 성격상 그냥 인물들 안으로 들어가야 겠다고 생각했다. 주어진 상황에 충실하게, 이를테면 3편에서 변덕스런 제주도 여름비 때문에 은희가 당황하는 장면도 촬영 당시 실제로 비가 갑자기 오기 시작해 그대로 영화에 담았다. 밤신도 최소로 줄였고, 풍요로운 화면을 포기하면서까지 카메라의 움직임도 최소로 줄였다. 영화적 언어를 추구한다는 건 곧 돈이 많이 든다는 뜻이니까. 나는 완벽주의자가 아니라 최선주의자다. (웃음)
-첫 번째 디지털 작업을 한 소감이 어떤가.
=아시아영화아카데미(AFA: 부산국제영화제, 동서대학교와 한국영화아카데미가 공동주최하는 영화교육프로그램)에서도 디지털 작업은 간간이 해봤지만, 장편영화로는 처음 시도했다. 모두 잘 알고 있겠지만, 기동성이 뛰어나고 적은 예산으로도 찍을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다. 필름으로 찍는 영화의 깊이와 회화적 요소를 포기해야 한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이야기를 어떻게 찍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제목이 점점 더 함축적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정> <길> 이번엔 <여행>이다. 제목들을 통해 당신이 지속적으로 추구해왔던 영화적 가치들이 잘 드러나는 것 같기도 하다.
=쉽고 보편성있고 직접적인 제목을 좋아한다. <길>이나 <여행>의 경우에도 많이들 하는 말이지만 우리 모두는 나그네이고 여행자니까.
-차기작이 궁금하다.
=아직까지 확실하게 결정된 건 없다. 어떻게 되든 타협하지 않고 작업하려 한다. 물론 시간이 걸리겠지. 영화계가 예전보다 훨씬 더 철저하게 영리추구적으로 바뀌고 있으니까,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이미 흥행성을 따지는 것이 사실 이해가 잘 가질 않는다. 시나리오는 말 그대로 준비 단계이며, 영화를 실제 찍을 때 그것이 어떻게 바뀔지는 감독만이 알고 있다. 열린 자세로 연출할 때 영화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까지 예측하려면 감독을 믿는 마음과 지극히 예민한 예술적 감각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점이 아쉽지만… 창작자로서 작업할 수 있는 길이 또 있을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