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must see] <바비> 재난영화의 정치적 변주
2010-02-02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로버트 F. 케네디 암살을 그린 <바비>가 미국의 재난의 시절을 돌아보는 방식은

미국의 저명한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친동생으로 법무부 장관과 상원의원을 지냈고 형이 대통령이 되었던 그해로부터 정확히 8년 뒤에 민주당의 강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로 부상했던 로버트 F. 케네디가 이 영화의 제목이 가리키는 실존 인물이다. 하지만 역사 속의 그를 모른다 해도 영화팬인 우리는 그를 이미 다른 경로로 몇 차례 만나왔다. <대부2>에 등장하여 마이클 콜레오네(알 파치노)를 구석으로 몰아붙이며 맹공을 퍼붓던 검사가 그였고 대니 드비토가 연출한 <호파>에서는 지미 호파의 사나운 정치적 적수로 등장한 적도 있다. 그가 지지자들에게는 ‘바비’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그 날’을 살았던 인간들의 프레스코화

형인 존 F. 케네디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 역시 불운한 역사에 떠밀려 갑작스러운 총탄을 맞고 운명을 달리했다. 1968년 6월4일에서 5일로 넘어가던 그때,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앰배서더 호텔에서 캘리포니아주 민주당 예비선거의 승리를 자축하는 자정 연설을 하고 나서다. <바비>는 바로 이 일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제목이 그의 이름을 차용하고 있다고 해서 전적으로 그가 이 영화의 극중 한 인물은 아니다. ‘바비’는 여기서 한 시대의 거대한 상징적 물음표이자 블랙박스로 대변된다. 영화는 오히려 그런 그가 도착하여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앰배서더 호텔 투숙객의 하루를 전면적으로 보여준다. 1968년 6월4일, 그날은 앤디 워홀이 세발의 총탄을 맞고 쓰러진 다음날이었고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야구선수 돈 드라이스데일이 6연속 완봉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던 날이었으며 마틴 루터 킹이 암살당한 지 정확히 두달이 지난 뒤였다.

“저는 미합중국 소속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미국인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미국을 로마에 비유하여 이렇게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황무지를 만들어놓고 그것을 평화라 불렀다.’” 로버트 F. 케네디의 각종 정치 행적과 연설장면이 담긴 실제 기록화면이 영화의 초입에 짧게 등장한다. 그걸 지나고 나면 이제 영화는 본격적으로 극중 앰배서더 호텔의 정원으로 향한다. 새벽부터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서 있다. 화재 경보가 잘못 울려 정원으로 대피한 탓인데 그들은 마치 무대 인사를 하듯이 한번 모여들어 관객에게 얼굴을 보여준 다음 각자의 호텔방으로 돌아가 ‘바비’가 호텔에 도착하기 전까지 그 하루를 살아간다.

그들은 다종다양하다. 계층, 인종, 성별 등 각양각색이며 상황도 다 다르다. 호텔 주방 보조 직원으로 일하는 라틴계 이주민 청년 호세는 야구장의 표를 예매했지만 야근 때문에 가지 못하게 된다. 호텔의 지배인 존은 아내 몰래 젊고 아름다운 전화교환수와 사귀고 있는데 그가 파면시킨 주방책임자가 그 사실을 아내에게 고자질한다. 존의 아내는 미용사다. 결혼을 앞둔 한 아가씨가 손님으로 찾아와 사연을 말한다. 기혼자는 독일에 미혼자는 베트남에 가는 군복무 정책이 실은 그들의 때이른 결혼을 결정짓는 문제였다. 한편 전성기가 지난 여가수와 그녀의 남편(에밀리오 에스테베즈가 이 역할을 맡고 있다)이 있는가 하면, 상류층의 한 부부도 있다. 젊은 신출내기 선거운동원인 두 청년은 어쩌다 LSD를 먹은 뒤 하루를 날려버리지만 결국 그들이 들고 다니던 카메라에 그날의 중요한 현장이 담긴다.

영웅의 부재라는 이름의 재난

<바비>에는 사실 이렇게 소개한 것보다 더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당시 시대상의 쟁점들이 말해지는가 하면 그것과는 무관한 각자의 드라마만 있기도 하다. 감독 에밀리오 에스테베즈는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전부 정치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 다만 많은 인물 군 때문에 생긴 단점이 없지는 않은데, 그들을 묶어내지 못하고 유형별로 너무 얇게 펼치기만 했다는 인상은 지우기 어렵다. 캐스팅이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하지만(앤서니 홉킨스, 샤론 스톤, 린제이 로한 등) 각자의 역할이 잘게 나누어져 있다 보니 다소 주마간산 격으로 보인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미국 개봉 당시(2006년) <바비>는 2개관으로 시작하여 2주 만에 1667개관으로 상영관을 늘리며 관심의 폭을 키웠다. 한쪽에서는 로버트 F. 케네디의 홍보물이냐는 비아냥을 받기도 했지만 미국인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있어왔던 중요한 무언가를 이 영화가 건드렸다는 방증일 것이다.

<바비>는 무엇에 호소한 것일까. 그 설명은 감독 에밀리오 에스테베즈의 말에서 은연중에 찾아볼 수 있다. 지금과 같이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로 <바비>를 구성한 이유에 관하여 질문받았을 때 그는 문득 이렇게 답한다.“유년 시절에 가장 감명 깊게 보았던 영화가 어윈 앨런의 <포세이돈 어드벤처> <타워링> 같은 영화였다.” 물론 <바비>는 장르로서의 재난영화가 아니다. 에스테베즈가 <바비>를 재난영화로 여기고 만든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유의미하다. 이 영화는 재난의 시절에 관한 영화다. 영화에는 현실 속 상황에 대한 불안함이라는 인물들 사이의 공유된 정서가 팽배해 있다. 결국 그게 상징적 인물의 죽음이라는 사건으로 종지부를 찍는다. <바비>는 영웅형 주인공의 일대기를 그리거나 그의 전기 중 집약된 시간을 다루지 않는 대신 그 역사적 사건의 자리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주로 재난영화가 사건을 거대한 미지의 주인공으로 놓고 그 사건이 일으키는 전조나 결과의 찬조자로서 인물들을 다루는 방식에 <바비>는 은연중 가까이 가 있다. <바비>는 영웅의 죽음이라는 재난 자체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 그의 죽음이라는 재난에 함께 있게 될 사람들의 운명적 동참을 그릴 것인가의 문제에서 후자를 선택한다. 영화에는 곳곳에서 로버트 F. 케네디의 재연이 필요한 장면이 등장하지만 그의 역할을 하는 배우는 거의 어김없이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의 얼굴이 필요할 때면 영화는 과거 기록 화면으로 남아 있는 그를 보여준다. 영화 속 인물들이 바비를 쳐다볼 때, 그러니까 그들이 보는 시선을 따라 우리도 그를 볼 때 그건 늘 실제 기록 화면 속의 그다. 영화는 그렇게 하여 부러 그의 부재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부재함, 그게 이 영화가 가리키는 재난이며 <바비>는 그 재난의 현장을 함께 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2006년에 예기치 못했던 미래를 사는 우리에게

2006년 미국에서 개봉된 <바비>가 2010년 2월에 갑작스럽게 여기에서 개봉하게 된 사연에 대해서는 추측이 잘 되지 않는다. <바비>는 상업영화에 해당하지만 의도가 분명한 상업영화이며 시류를 고려하여 만들어진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당파성이 드러나는 것에 관하여 주저함이 없어 보인다. 그 유명한 강성 민주당 지지자 마틴 신의 출연은 일종의 선언에 가까워 보일 정도다. 2006년은 아직 부시의 시대가 아니었던가. 영화에서 흑인 조리장이 분노에 이글거리는 주방의 젊은 이주민 노동자 청년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도 너 같았던 적이 있어. 분노가 있었지. 킹 목사가 죽고 나서…. 너는 상상도 못할 분노였어. 백인들은 우리를 무시하는 게 아니야. 백인들은 그저 구석으로 몰리기 싫을 뿐이야. 그들도 바뀌겠지. 너는 그들이 자기들 스스로 바뀐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면 돼. 마치 그들이 생각해낸 것처럼. 그들은 위대한 노예해방자처럼 느낄 필요가 있어. 애초부터 베푼 건 그들인 것처럼 그렇게 하도록 놔두라고.” 이건 예견인가. 아니면 그의 말처럼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인가. 지금은 부시가 아니라 오바마의 시대다. 연출뿐 아니라 각본까지 썼던 에밀리오 에스테베즈도 미국에 첫 흑인 대통령이 정말 나올 것이라는 확신은 아직 없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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