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재앙 이후,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상상하는 것이 어렵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다.
아이티 지진 뒤 100만 가구의 이재민이 발생하고, 환경 재해로 인한 지구온난화를 근심하는 사이 올해 겨울 북반구에 폭설 등 이상기후가 창궐한다. 그리고 미니 빙하기가 왔다는 예보가 터져나온다. 지구가 막바지에 이르렀는데도 자본의 공격적이고 ‘암울한 축적’은 멈출 줄 모른다. 4대강을 뒤집고, 원전 수출을 찬양한다. 생태 파괴가 모든 사람, 그 몸과 목의 가늘고 가는 핏줄과 힘줄들을 조이고 막고 끊어놓을 때까지, 이 음울한 자본의 광란은 지속될 것인가?
<아바타>와 극복할 수 없는 간극을 이루다
시대가 수상하고 기괴하며 위협적이어서 대안적 미래를 상상하고 계획하는 예술 작품이 절절히 필요하다. 케인스의 말대로 자본의 암울한 축적에 대항하는 예술, 아름다움, 우정, 와인이 요구된다. 한 존경할 만한 친구는 우리가 자본이 요구하는 바와 다른 방식으로 행복해져야 한다고 신년부터 주장하고 있는 중이다.
2009년 서울환경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재앙을 위한 레시피>는 일상적 차원에서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고 그린 에너지를 사용하는 레시피를 제공하는 착하고 도움이 되는 유용한 영화다. <아바타> 역시 이 대재앙의 시대에 판도라와 같은 유토피아 행성의 존재를 3D로 보여준다. SF의 미래 디스토피아에 우리가 고착된 순간 뛰쳐나온 패럴랙스 뷰(시차적 관점)인 것이다. “시차(패럴랙스)는 두 층위 사이에 어떠한 공통언어나 공유된 기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결코 고차원적인 종합을 향해 변증법적으로 ‘매개/지양’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율배반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지젝은 묻는다. 반면 입체 연출의 기술 영역에서 입체의 물리적인 양을 패럴랙스라고 부른다고 최양현은 <씨네21>에서 설명하고 있다. 거기에 정성일은 <아바타>와 같은 3D영화 논쟁에서의 핵심은 0점 지점을 한 숏들의 패럴랙스 미장센 디자인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렇게 두고 보면 기술 영역에서 사용하고 있는 패럴랙스라는 용어에 패러독스가 보이지 않아 좀 어리둥절하긴 하지만, 3D영화와 우리의 미래를 두고 보더라도 양자물리학의 시차와 정치적 시차, 패럴랙스를 한동안 끌어안고 사유해야 할 것 같다.
이 <아바타>와 극복할 수 없는 간극을 이루고 있는 영화가 현재 한국에서 비슷한 시기에 상영 중인 그러나 박스오피스의 간극은 크기만 한 <더 로드>다. <아바타>가 컬러와 입체로 질주하고 있다면 <더 로드>는 망한 세계에 관한 모노톤한 플랫 스크린이다.
코맥 매카시의 원작 소설 <더 로드>는 바이오스피어가 사라진 지구 위 생존의 양태를 담아냄으로써 가장 강력하게 환경문제를 제기하는 작품이라고 평가된다. 소설 <더 로드>를 현대의 성서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작가를 당대의 헤밍웨이로 비유하기도 한다. 굳이 반대 의사를 표명할 이유를 느끼지 않는다.
좀비 공포영화보다 무서울 수밖에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원작자로 알려진 코맥 매카시의 문학적 비전과 글쓰기 스타일은 독보적이다. 오프라 윈프리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이 평서문을 선호한다고 하면서 대문자, 마침표, 쉼표, 그리고 설명구를 위해 구두점의 콜론을 사용하지만 절대 세미콜론은 넣지 않는다고 말한다. 세미콜론은 마침표보다는 가볍고 쉼표보다 무거운 구두점이다. 경중의 사이, 사이공간은 쓰지 않겠다는 것인가? 예컨대 죽음과 탄생을 제외한 일상의 수많은 경계들은 다루지 않겠다는 말? 인물들의 대화에도 인용부호가 빠져 있다. 세미콜론이 없는 영화언어란 어떻게 만들 수 있는 걸까?
세미콜론, 대화의 인용부호가 배제된 그의 문학에서 영화로의 이동은 호주 웨스턴 <프로포지션>의 감독인 존 힐콧이 맡았고 아버지 역을 비고 모르텐슨이 맡았다.
이 작품은 소설과 영화의 우위를 비교한다거나 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말을 거는 방식으로 읽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더 로드>가 정면으로 대결하고 있는 설정 중 하나는 식인문제다. 인간의 육체, 살점 만이 유일한 자원이며 먹을거리가 되고 인간 사냥꾼이 횡행하는 사회.
식인행위 자체는 이제 이것이 원시부족사회의 신화가 아니라 오히려 근현대사의 잔혹한 장면으로 부각되었다. 하라 가쓰오의 다큐멘터리 <유키 유키테 신군, 천황의 벌거벗은 군대가 행군한다>(1987)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뉴기니 일본군 병사들이 병사들을 취한 점을 추적하고 있다. 미국 <PBS>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에선 1846년에서 47년 사이 시에라네바다에 폭설로 갇힌 도너 가족의 식인을 다루었다. 이것은 미 서구개척사의 충격적 사건이며 수치로 남아 있다.
<더 로드>에서 대재앙 이후 나무나 풀은 사라지고 동물도 보이지 않는다. 대지는 지진으로 시도 때도 없이 흔들린다. 비가 오고 겨울은 다가온다. 모든 생기와 활기가 사라진 자리. 여기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자원은 예의 인간의 몸이다. 그래서 인간이 먹이사슬의 최고점이자 최저점이 된다. 타자들이 친밀성을 잃고 적대적 타자로 거리를 배회하고 당신의 몸을 먹이로 취하고자 할 때 바로 이것이 <더 로드>의 아버지와 아들이 처해 있는 국면이다. 아버지와 아들 쌍은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강자쪽에 든다. 아이와 함께 남겨진 여자, 모자는 한 무리의 남자들에게 추격당해 도망치다가 잡혀 먹잇감이 된다. 이런 장면들은 좀비들이 수백만 등장하는 어떤 공포영화보다도 무섭다. 소수자가 물리적으로, 육체적으로 폭력을 감당하지 못할 사회의 도래에 대한 절대적 공포를 일견하게 하기 때문이다.
비고 모르텐슨은 <반지의 제왕>의 아라곤과는 전혀 다른 역을 수행한다. 창백하고 병들어 죽어가면서 아들을 지킨다. 하지만 일촉즉발 다음 상황을 예견하지 못하는 지구 최후의 생존자 중 한 사람을 연기한다. 또 이들이 길을 걷는 도중 만나게 되는, 시력을 상실해가는 한 노인은 로버트 듀발이 연기한다. 그도 한때 <지옥의 묵시록>에서 바그너의 발퀴레에 맞춰 포탄을 퍼붓는 전쟁광 킬고어 대령 역을 맡은 바 있어 아이러니는 증폭된다. 그는 말한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 많은 예고들이 있었다고.
어떤 식으로든, 이 재앙은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2012>나 <터미네이터> 같은 다른 재앙영화와 달리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말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가 그 원인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우리가 선택하지 않는 이상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정확히 예측된다는 전제다.
대재앙과 함께 태어나 인간 문명의 가까운 과거도 전혀 알지 못하는 아이(코디 스미스 맥피)의 등장이 흥미롭다. 자신을 낳고 자살을 선택한 어머니나 문명에 대한 어떠한 참조점도 없는 아이는 아버지와 길을 걸으며 마주치는 세상에서 모든 것을 익힌다. 아버지가 요행히 찾아낸 코카콜라를 처음으로 마셔보는 장면은 미묘하다. 우리가 아는 톡 쏘는 맛. 아이는 대번에 이 맛을 좋아한다. 아이가 길 위에서 보는 것이라곤 조각난 인간의 살점이나 흩뿌려진 피, 사냥당하는 사람들, 다음 먹이로 지하실에 갇혀 있는 마르고 무기력한 육체들이기 때문에 이 톡 쏘는 맛이 영화에 돌연히 삽입되는 순간은 이질적이다. 그러나 영화엔 이런 이질적 순간이 많지 않다. 번역이란 근본적으로 배신 행위이기 때문에 문학 원전에 대한 충실한 해석을 시도하는 영화란 시차적 관점을 만들어내지 못함으로써 좀 맹맹해진다. 그럼에도 난 이 리뷰를 쓰는 것이 매우 어렵다고 느낀다. 어머니는 자살하고 여자와 아이들은 사냥당하는 포스트 인간사회를 영화적으로 목격하는 것은 참혹하다. 작금 우리는 현실의 재앙과 영화 속 재앙들에 포위되어 있다. 사람 살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