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켓>을 다시 빌리려다가 그만두었다. 방부처리된 기억이 공기에 노출돼 부식될까 겁이 났다. 하라다 야스코의 <만가>를 읽었을 때도 그랬다. 15년 전에 읽었던 그 책을 다시 꺼내 읽는데, 그게 대충 해피엔드라는 걸 알고 당황했었다. 내 젊은 마음속에서 그렇게 명징했던 침울함이 한순간 미지근한 식욕처럼 변형돼버렸으니.
<티켓>을 생각하면 항상 11월의 공기 같은 황량한 분위기가 먼저 떠오른다. 낮고 길게 누워 있는 하늘에 짓눌리고, 빗속에 눅눅해진 고기 비린내. 하지만 그보다는 나의 비루한 이십대가 먼저다. 제대 뒤, 독산동 오래된 동시상영관의 젖혀진 모노륨 바닥, 나뒹구는 자판기 종이컵들, 신발의 접지면마다 끈적거리던 캬라멜, 내 자신, 전선줄을 갉아먹는 설치류 같다는 자의식, 텅 빈 속과 창피를 당해도 좋다는 굳은 의지, 헤르페스 성병 보균자 같던, 곰팡이만 자라는 것 같던 나이…. 이런 추잡한 후렴구의 열거는 개한테나 전해주고 싶다.
그때 <티켓>은 건전가요 가사를 꼭 닮은 친구와 함께 보았다. 친구도 <티켓>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혜영이 커피포트 들고 엉덩이 살랑거리면서 차 배달 나가는데, 남자들이 뒤에서 야유하니까 치마를 살짝 걷어올려 보여주잖아. 또 아주 대차게 나오는 장면도 많았지. 여관에서 남자애 뺨 때길 갈기고, 안소영하고도 싸웠잖아. 또 딴 건? … 화면에 비내렸지 뭐.
그는 연극 공연장에서 보던 이혜영을 영화에서 처음 보자 살짝 흥분했었다. 그러나 나에겐 다른 신이 남아 있었다. 관절 앓기 딱 좋게 꾸물꾸물한 날씨, 다방 문 닫고 지네들끼리 작파해 술판을 벌이던 신 말이다. 모래바닥에서 기어올라온 것 같은 김지미가 여급들에게 노래를 시키고, 안소영이 그저 바라만 보고 있지, 라고 어설프게 노래하면, 중간에 딱 끊고 들어가, “그래, 내가 그저 바라만 보다가 피본 년이다, 이년아”라고, 마음을 추스리지 못하는 갈라진 목소리로 핀잔을 준다. 전세영이 순진한 목청으로 ‘인생은 미완성’을 부를 때도 목메임이 잔뜩 묻어나오는 김지미의 찢어진 목소리가 지청구를 한다. 니가 무슨 인생을 안다고 미완성이라느니 마느니 지랄이야, 아마 이런 대사였을 거다. 그 장면은 철봉에 매달려 있는 것 같은 힘든 느낌도 주었지만, 이상하게 온화한 기분도 주었다. 이런 매캐하고 꿉꿉한 영화들은 윤락한 타임캡슐로서의 그때 나의 사고의 틀을 보여준다.
좋은 영화를 보지 않는 건 인생의 손실이라는 전혜린의 경구와 상관없이 난 원래 영화 보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영화를 볼 때마다 모든 신마다 나의 개인사가 겹쳐 길고긴 장탄식이 흘러나오고, 워낙 영화에 몰입할 수 없는 성정인데다, 10분마다 끝나는 시간을 확인하느라 수족이 고달프니, <티켓>처럼, 안락하다고 믿는 삶의 원형질들을 빠져 달아나게 만들고, 아주 가차없고, 퉁명스럽고, 또 꾸리꾸리한 영화를 보는 건 얼마나 찢어발길 듯 괴로운 일이었겠나. 지금도 <A.I.> 같은 공상을 주는 영화가 나의 표리에 가장 유익할 따름이다.
그때 나는 이십대 중반이었는데도, 읽고 보고 겪고 느낀 건 그렇게도 많았는데도, 지적인 면에선 제한된 기능만 보였다. 나는 언제나 비닐 백에 담겨진 삶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 백 속엔 1초마다 졸렬한 권태와, 감상과 감성 사이의 모호한 이음새와, 불필요한 자책이 구질구질하게 고여 있었다. 나는 같은 음부를 끝없이 재생하는 레코드처럼 무감동한 상태의 청년이었다. 나한테는 냄새가 났다. 강력한 탈취제를 온몸에 뿌려도 내 몸에서 풍기는 악취는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땐 내 자신은 그녀들의 티켓보다 먼저 몸을 팔 수 있었을 것이다. 내 자신, 끝나버린 잔치에 찻잔만을 치우는 사람이라도 해도 별 상관없을 것 같았고, 내 딸이 쇼걸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았으니. 영화 하나로 그렇게까지 극렬한 감정들을 불러모으고 나만의 잔치를 벌일 수 있었던 건, 모든 음조를 드러내고 소리내보고 싶던 나의 순수한 비속함 때문이다. 물론 비루하다는 건 여전히 나를 설명해주는 검소한 장식이다. 그게 나쁘진 않다. 어차피 인생은 이류호텔에서 보내는 하룻밤만 못한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