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있음)
이 영화를 어떻게 말해야 할까. 아니 말해야 할 것이 있기나 한가. 일상-악마 출현-주인공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이 극히 단선적인 서사엔 플롯도 성격화도 거의 없고, 창작자의 카메라가 대상과 대면하는 순간 필연적으로 따르는 거리와 앵글, 그리고 지속의 시간에 대한 결단도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어떤 감각적 효과의 점증을 겨냥한 시각적 아이디어의 진열만 있다. <파라노말 액티비티>를 보고 나서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이 어떤 영화적 재능을 갖고 있는지 우리는 전혀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간단히 무시해도 될 것인가.
<파라노말 액티비티>는 <블레어 윗치>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지 10년 만에 등장해 비슷한 유형의 반향을 일으켰다. 할리우드는 어떤 양식이 대중적 지분을 지속적으로 가질 수 있다고 판단하면 그것을 반드시 영화 세상 안에 정착시킨다. 파라마운트는 이 영화의 속편을 만들겠다고 이미 발표했다. <클로버필드>(2008)의 성공담까지 가세해, 우리는 멀지 않은 장래에 유튜브 장르 혹은 홈비디오 호러라고 불릴 만한 영화들이 양산되는 것을 목격하게 될지도 모른다. 동의하든 반대하든 이 영화에 일정한 주목을 하는 것은 불가피해 보인다.
움직이지 않는 카메라, 무기력과 답답함을 겪게 하다
<파라노말 액티비티>를 보고 무섭다고 느낀 사람들은 대개 초자연적 존재, 악마를 등장시키지 않았는데도 무섭다는 것이 이 영화의 뛰어난 점이라고 말하고 있다. 정체불명의 소리, 발자국, 무형의 움직임, 혹은 빙의된 여주인공의 예측 불가능한 행동 등이 악마의 가시적 형상 없이도 보는 이의 호흡을 가쁘게 한다는 것이다. 로저 에버트를 비롯한 미국의 주류 평자들도 값비싼 특수효과와 피칠갑 없이도 공포감을 빚어내는 솜씨에 호의를 표했다.
그 공포의 정체에 대해 먼저 짚고 가는 것이 좋겠다. <파라노말 액티비티>와 <블레어 윗치>는 초저예산으로 만들어져 미국 내 극장수익이 1억달러를 훌쩍 넘었다는 상업적 성공신화뿐 아니라 페이크 다큐멘터리(모큐멘터리)/호러라는 양식상의 공통점이 있다. <클로버필드> 같은 괴수/재난영화도 넓은 의미의 호러에 포함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화제가 된 세편의 홈비디오 질감의 영화들이 모두 모큐멘터리/호러라는 양식을 채택하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얼핏 이 조합은 이상해 보인다. 호러야말로 실재하지 않는 악마/괴물의 현실감있는 재현에 승부를 거는 장르이다. 그것이 허구라는 점은 관객에게 인지된 일종의 약속이지만 호러의 현실감이 효과적일수록 그 약속은 더 깊이 잠재화한다. 말하자면 영화의 환영성에 가장 깊이 의존하는 장르 가운데 하나가 호러이다. 페이크 다큐멘터리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게임이다. 실제로 벌어진 사건을 담는다고 약속된 장르인 다큐멘터리처럼 찍고 그것에 ‘페이크’라는 표지를 달아놓을 때, 이 양자 사이엔 화해할 수 없는 거리가 만들어지고, 관객은 스스로 가짜임을 선언하는 환영을 그 공언된 거리를 통해 반성적으로 지켜보게 된다(예컨대 피터 잭슨의 <포가튼 실버>). 그렇다면 <파라노말 액티비티>가 정말 무섭다, 라고 느낄 때, 이 거리가 완전히 무효화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무효화된 것일까.
공포감의 근거를 먼저 영화 내부에서 찾아볼 필요가 있다. <파라노말 액티비티>에서 카메라는 주인공인 미카(가끔 케이티)의 신체에 물리적으로 완전히 고착되어 있다. 당연하게도 이 영화는 어쨌든 미카가 찍은 다큐멘터리이기 때문이다. 미카는 지금 동거녀 케이티를 어릴 때부터 쫓아다니는 악마를 포착하기 위해 비디오카메라를 샀고, 이 영화의 모든 장면은 그 카메라에 찍힌 것이다. 여기서 카메라의 능력은 주인공의 육체적 응시의 능력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다. 우리는 주인공이 본 것만 볼 수 있다. 여기엔 오직 하나의 광학적 시점만 존재한다. 카메라가 사건 내부에서 주인공의 육체에 고착되어 있으므로 스크린에 악마/괴물이 등장하는 순간, 주인공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블레어 윗치>와 <클로버필드>에서 악마/괴물은 그래서 흔적과 소리로만 혹은 원거리에서 관찰된 흐릿한 윤곽으로만 드러난다.
<파라노말 액티비티>의 새로운 아이디어 하나는 주인공의 응시가 중단되는 수면 시간에 감시카메라를 켜놓는 것이다. 또 하나의 광학적 시선이 첨가되는 셈이다. 그 시선을 통해 앞의 두 영화가 보지 못했던 괴물의 형상을 조금 더 가까이 볼 수 있게 된다. 문제는 수면 중 감시카메라는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다. 첨가된 그 시선 역시 사건 내부에 있으며 그 무기력으로 인해 악마/괴물은 그 두 시선의 권력으로 결코 장악되지 않는다. 시선의 이 전도된 권력 관계가 악마에 빙의된 케이티가 미카의 시체를 카메라를 향해 집어던지는 마지막 장면의 요점이다. 여기에 영웅이 있다면 생명을 바쳐 악마/괴물을 끝까지 촬영하려 한 시네마토그래퍼일 것이다. 바쟁이 “사자가 짐꾼들을 잡아먹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이상 사냥할 가치가 없다”고 비유적으로 말한 시네아스트의 생사를 건 시도를 그는 흉내내고 있다.
이 호러에 다큐멘터리 형식이 요구된 한 가지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괴물을 포착하기는커녕 그것으로부터 오히려 벗어나야 하고, 그것이 등장하는 순간 더이상 지속될 수 없는 시선, 더이상 지속될 수 없는 스크린. 그 시선의 무기력과 답답함은 공포와 멀리 있지 않다. 보통의 호러영화에서라면 카메라의 유동성에 힘입어 관객은 악마/괴물과 희생자의 시선을 번갈아 점유한다. 그러나 여기서 다큐멘터리스트의 육체에 종속된 카메라는 그 유동성을 제공하지 못한다. 하나의 인체에 고착된 시선의 무기력, 불가능한 유동성, 악마/괴물과의 대면이라는 종착지가 그 시선의 죽음과 스크린의 중단이라는 예기(豫期). 이런 것들이 이 모큐멘터리 호러의 공포감에 관계할 것이다.
<아바타>의 대안이라기보다 동지에 가깝네
현존하는 지상의 모든 물리적 거리를 무화하는 첨단 광학/통신 테크놀로지의 시대에, 육체적 시선의 변함없는 물리적 한계, 나아가 육체라는 감옥을 환기시킨다는 점이 이 모큐멘터리 호러에서 지지할 수 있는 유일한 요소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기엔 무언가 심각한 희생이 있다. 먼저 서사의 희생이 있다. <파라노말 액티비티>의 장면들은 오직 공포감의 점증 효과를 위해 진열되며 세계라는 사건과 인간 존재의 다층성을 탐색하는 서사 전략은 처음부터 포기된다. 또 다른 희생자는 진실이다. 정확히 말하면 ‘진짜’가 모큐멘터리(‘가짜 진짜’)라는 형용모순의 룰에 갇힌 다음, 그 모순에도 불구하고 가짜의 실감에 봉사할 때, 진실은 여기서 게임의 도구로 전락한다.
그 모순의 거리가 어떻게 사라졌는가라는 미뤄둔 질문에 답할 차례다. 이것은 한때 실험적으로 시도되었던 1인칭 시점의 영화(예컨대 로버트 몽고메리의 <호반의 여인>(1947))가 왜 오늘에 홈비디오 질감의 모큐멘터리 호러로 되살아났는가, 라는 의문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잠정적인 것이 되겠지만, 걸프전, 9.11 테러, 동남아 쓰나미, 이라크전쟁을 경유하면서 형성된 지각 체험에서 대답의 실마리를 얻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우리는 그 압도적인 재난과 죽음의 이미지를 위성중계, 혹은 우연히 찍힌 비디오카메라를 통해 거의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첫 인류가 되었다. 그 거친 이미지들은 물론 잘 촬영된 높은 해상도의 할리우드영화보다 훨씬 더 큰 충격, 실은 더 큰 시각적 쾌감을 선사했다. 세 모큐멘터리 호러들의 거친 입자와 불안정한 화면, 불균질하고 불연속적인 편집은 성찰적 거리를 만들기는커녕 오히려 전쟁/재난 이미지 체험을 전용하며 강력한 현재감을 빚어낸다.
그런 점에서 <파라노말 액티비티>와 두 모큐멘터리 호러들은 <아바타>의 대안이라기보다 동지에 가깝다. <아바타>는 컴퓨터 게임과 테마파크의 체험을 전용해 입체적 변형/동일시 감각의 한 정점을 만들었고, <파라노말 액티비티> 등은 실시간 전송의 전쟁/재난 이미지 체험을 전용해 임박한 죽음의 공포감을 빚어냈다. 양자는 더이상 대립적이라기보다 공히 감각적 동일시를 절대화하며 지각적 거리의 소멸을 지향한다. 그것이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후자는 독립적이고 창의적인 인디의 이름으로 등장했다. <파라노말 액티비티>의 정말 무서운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