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이름은 최옥금. 생애 대부분을 정읍에서 보내시다가 마감은 대전의 어느 병원에서 하셨다. 일일연속극에 나오는, 주름 별로 없이 곱게 늙어서 식솔들에게 가끔 카리스마도 발휘하는 그런 할머님이 아니라, 애초 작은 체격이 0.7배 정도로 더 움츠러든, 속절없는 세월에 대한 푸념을 진한 전라도 사투리로 흘리흘리 읊었기에 그 온전한 청취가 힘들었던, 그냥 그런 촌로셨다.
초·중·고등학생 시절 수도권에 살던 우리는 방학 때나 정읍에 가곤 했는데, 깡마르고 한숨이 많았던 할아버지는 ‘소정공파’, ‘문숙공파’ 등등 고려 초기까지 족보를 소급해가며 별도 과외를 하셨고, 20년 전에도 신산스런 모습이셨던 할머니는 그런 할아버지와 온갖 지청구를 독하게 교환하면서도 집안 소사를 위해 기우뚱하니 움직이셨다. 좀더 정서적인 왕래는 두분이 기르다시피한 사촌 형들의 몫이었고 우리 삼남매는 그냥 그런 시골이 지루했다.
스무살 이후에는 그나마 시골에 들르는 간격이 넓어졌다. 부대에서 연대장 당번병을 하는 동안 윗사람 공경하는 마음의 5분의 4 정도가 무너졌는데, 직계 어른들까지 애꿎게도 그 영향을 받은 셈이다. 설날 윷놀이를 하던 장교들이 주방에 모여서 ‘정보장교는 왜 자꾸 두 윷이 나와 연대장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느냐’며 서로 훈계하고 대책을 상의하는 걸 듣는다든지, 연대장 딸의 간식용 군밤을 골방에서 밤새 까다가 21세기의 첫날을 맞게 되는 등의 일을 겪다보면 누구라도 기성 세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게 된다.
각설하고. 제대한 뒤에도 마찬가지. 누나는 결혼해서 미국에 갔고, 동생은 모로코 등지로 돌아다니며 제 젊음을 펼치고 있었다. “할아부지, 할무니~” 같이 외칠 동료 없이 시골집 대문을 두드리기 민망해진 나는, 이런저런 핑계로 남행을 미뤘고 부모님만 틈틈이 고향 땅에 문안인사를 다녀오곤 했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난생처음 포옹했던 추억
자발적으로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찾아뵌 건 첫 연애를 시작할 때쯤이다. 남들보다 늦게 이성교제를 시작했기에 모든 것이 서툴고 힘들었고, 그 마음고생에 비례해 날 닮은 모든 가련한(!) 인류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샘솟았었다. 그리하여 어느 가을, 즉흥적으로 열차표를 끊고 단행한 역사적 마실. 뜸하던 손자가 온다는 얘기를 들은 할아버지는 동구 밖에서부터 나를 기다렸고, 소식을 토스받은 할머니는 교회와 텃밭의 중간께에 짐짓 허리를 잡고 계셨다(오붓이 함께하는 법은 없으셨다). 그날 아마도 26년 만에 처음으로 두 양반을 팔 벌려 껴안았던 것 같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냥 그러고 싶어서. 이상하게 목이 메고 눈물은 주룩주룩. 일순 당황한 두분의 숨도 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뭐 그냥 나이 드셔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위계와 의무에서 나온 큰절이 아닌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 서로가 안쓰러워서 껴안는 마음. 여든하고도 중반을 넘겨 집성촌 전체의 큰 어른이셨던 할아버지로서는 좀 황망한 경험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마침 지나던 동네 어른이 할아버지께 예의를 차리지 않는다고 나를 꾸짖기도 했으니까. 그 때문에 내가 포옹을 멈추자 할아버지는 은근히 아쉬워하셨던 것 같다.
뭔가 벅찬 순간은 실은 그걸로 마지막이었다. 몇해 뒤 할머니가 뇌경색으로 쓰러지셨고 다음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마침 두 번째 연애가 끝났던 나는 할아버지의 장례식에 의탁해 정작 내 지난 연애나 애도하는 철부지였다.
그리고 다음 사랑. 각각 자취를 하던 우리는 설이나 추석이 다가오면 마트에서 함께 장을 보곤 했는데 그때마다 찹쌀 모나카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몸이 불편한 분들은 단 거 녹여 먹는 재미가 크다던데’, ‘사탕이나 초콜릿을 드리면 깨물어 드셔서 이가 상하신다는데’, ‘그럼 이게 딱이겠군’, ‘그게 딱이네’. 그렇게 챙겨놓은 모나카는 정작 위문품이 되지 못한 채 나 한입 너 한입 먹다보면 한 묶음 금방 동나게 마련이었다.
결국 달고 찰진 랑데부는 성사되지 못하고, 우리의 연애만 너 한대 나 한대 맞고 끝이 나버린 새해.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담담하고 답답했다. 늦기 전에 모나카를 들고 한번 찾아뵀다면 뭐가 달랐을까. 빈손으로 찾은 영안실에서 장례예배를 집전하던 낯선 목사님은 우리 조부모님의 금실이 대단했다며 근거없는 공치사를 해댔다. 나쁜 뜻으로 한 말씀은 아니겠지만 누군가를 보내며 그 인생 서사를 자기 편의에 맞춰 설교로 풀어낸다는 게 모욕적으로 느껴졌다. 그걸 갖고 투덜대기에는, 염을 하고 화장을 하고 유골을 묘에 모시는 동안 애도할 게 너무 많았다. 할머니의 고단한 일생, 내 유년 시절, 마침 끝난 연애, 가족끼리만 아는 몇 가지 사연, 엉엉 우는 모습을 처음 들킨 우리 아빠.
예전의 나와 그녀를 닮은 안성기와 이하나
서울 복귀 뒤 오랜만에 찾은 개봉작은 신연식 감독의 <페어러브>. 첫 연애를 참 늦게 시작한 안성기의 갈팡질팡이 예전 내 모습 같고, 방구석에서 오도카니 자신의 미래를 염려하는 이하나의 캐릭터는 그때 당신의 모습 같았다. 그러나 차츰 못난 두려움이 서로의 눈을 가리고 마음을 식히고… 삶에 몇번 없을 선물을 제때 제 목적지에 배송치 않은 채 쏙쏙 빼먹은 건 아닌가 후회되는 지금, 우두커니 침상에 누워있는 안성기의 모습이 먹먹하게 다가왔다. 페어러브, 그러니까 ‘공평한 사랑’이라 번역할 수 있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이 공평하지 않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따라서 ‘지금이 아니면 안돼’. 세상에, 이 평범한 사실을 우리 할머니와 김대중과 노무현과 장진영과 마이클 잭슨과 에릭 로메르와 에릭 시걸과 패트릭 스웨이지와 브리트니 머피와 길창덕 화백과 가수 이남이와 인디스페이스와 광화문 미디액트와 그리고 차마 말 못할 많은 아쉬운 삶들이 일단 ‘서거’한 뒤에야 깨달은 거다.
영화의 어느 단락, 당신의 삶은 결국 이쯤에서 착지할지 모른다는 선고를 기다리며 안성기의 상념들이 몽타주로 펼쳐진다. 이어서 그의 연인 이하나가 둘의 사랑이 시작되기 전의 시간으로 돌아가서 비몽사몽 속삭인다. ‘우리 이제 시작해요’가 아닌 ‘우리 다시 시작해요’. 시간순으로는 안 맞지만 어찌보면 짠한 역설. 모든 시작은 다시 시작하는 것이고 다시 시작한다는 건 어쨌든 처음으로 시작한다는 거니까. 그러게. 10년 전 군밤을 까느라 놓쳤던 밀레니엄이 누구에겐 이제야 시작되려나보다. 늦어도 한참 늦었지만, 어쩌나, 이제라도 골방을 나와 모나카를 챙겨야지, 모나카를 챙겼으면 티켓을 끊어야지. 티켓을 끊었으면 포옹을 해야지.
윤성호
2007년 <은하해방전선>이라는 장편영화를 만들며 나름 촉망받는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시선1318> <황금시대> 등등 주로 옴니버스영화의 연출자로만 기용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존재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