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특별기고] 영화언어에 능통한 감독을 발견하다
2010-03-04
글 : 토니 레인즈 (영화평론가)
토니 레인즈, <회오리바람>과의 세번의 운명적 만남을 회상하며

장건재 감독의 <회오리바람>이 거둔 괄목할 만한 성취에 대해 많은 객관적인 사실들을 나열할 수도 있지만, 이 글은 좀더 내 주관적인 관점에서 쓰려 한다. 지난 한해 동안 나는 이 영화와 세번의 작은(그러나 절대 비종교적인!) 현현의 순간을 겪었다. 그 순간들을 되돌아보면서 <회오리바람>과 나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

내가 이 영화를 처음 접한 것은 밴쿠버와 런던영화제에 상영할 영화를 선정하러 지난해 여름 서울에 들렀을 때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장편과 단편을 포함해 200편 이상의 영화가 기다리고 있었고, 서울 체류 기간 동안 더 많은 영화가 도착했다. 첫 번째 현현은 내가 <회오리바람>을 보기 시작한 그 순간에 왔다. 영화의 첫 번째 장면은, 하루 종일 영화를 보고 나서 지쳐 있는 가운데서도 나로 하여금 벌떡 일어나 앉아 집중해서 보도록 만들었다.

그렇다고 그 장면에 아주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장면은 어두운 주유소의 텅 빈 앞마당을 보여준다. 소년이 거기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석유를 넣고 떠난다. 그 순간까지 멈춰 있던 카메라는 반전된 트래킹숏으로 그의 앞쪽으로 돌아가 밤길을 따라 속도를 내며 달려가는 오토바이를 보여준다. 내 정신을 번쩍 들게 한 것은 영화언어에 대한 정확한 통제와 조율이었다. 이 장면은 정지되었다가 움직임으로 전환되는, 편집없이 치밀하게 계획되고 잘 실행된 장면이다. 더 훌륭한 것은 타이밍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다. 이 장면은 아름답다. 도시의 불빛을 반사하며 밝게 빛나는 주유소 정면에서 도로의 어두움으로 전환되는 순간은 숨이 막힌다. 짧게 말하자면, 이 장면은 단순한 일상적 움직임에 다소 표현주의적인 톤을 입혔다. 이 장면은 앞으로의 영화가 어떠할 것인가를 암시한다. 이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를 만든 이가 영화언어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밴쿠버와 로테르담에서 좋은 평가를 받다

두 번째 작은 현현의 순간은 이 영화가 용호상을 받은 밴쿠버에서였다. 이 상은 “감독의 초기작으로 현재까지 국제적인 명성을 얻지 않은 영화”에 상금을 수여한다. 홍상수 감독과 이창동 감독 모두 그들의 첫 번째 영화로 이 상을 수상한 바 있다. 나는 장건재의 수상에 대해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이른바 ‘아시아영화의 허브’라 자칭하는 부산영화제가 그 영화를 다룬 방식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했다.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도 <회오리바람>을 상영하고자 했으나 월드 프리미어 상영이어야 한다는 조건하에서였다. 장건재 감독은 이미 밴쿠버에서 상영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부산의 초청을 거절했다. 따라서 이 영화는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되지 않았다. 물론 PPP와 아시아 영화펀드를 통해 젊은 독립영화감독들을 지지해온 부산영화제의 여러 업적은 존경받을 만하다. 그러나 언제부터 부산영화제가 감독들을 이처럼 골탕먹이면서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영화의 질보다 자신의 ‘지위’를 앞세우는 그런 영화제가 되어버린 것인가? 무엇인가 크게 잘못되었다. 밴쿠버에서의 현현의 순간은 장건재 감독의 무척이나 명예스러운 행동이 보상받는 것을 지켜본 것이다.

세 번째 작은 현현의 순간은 아주 최근, 로테르담영화제의 상영에서 내가 장건재 감독을 관객에게 소개하도록 요청받은 2월 초였다. 영화제의 가장 큰 스크린에서 영화를 상영하게 되었다. 이 작은 독립영화가 그렇게 큰 스크린에서 과연 어떻게 보일 것인가 나는 은근히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이형빈의 촬영은 커다란 스크린을 채우는 도전에 끄떡없었다. 로테르담에서의 관객 반응은 밴쿠버에서만큼 뜨거웠다.

물론 <회오리바람>에 대한 나의 열정이 캐나다와 네덜란드의 관객, 비평가와 배급업자들에게도 통한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 이런 반응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것이었다. 영화의 이야기는 단순하고 보편적이다. 고등학교 상급생인 김태훈(서준영)과 박미정(이민지)은 겨울방학 동안 둘이서 몰래 바닷가로 하룻밤 여행을 갔다 온다. 그들이 서울에 돌아오자 태훈의 부모가 조금 걱정을 하는 데 반해, 미정의 아버지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폭력적이 된다. 그는 소년에게 둘 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라고 강요한다. 반항적인 태훈은 계속해서 그 약속을 깨려 하지만 미정은 부모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태훈의 진심어린 부탁과 값비싼 목걸이 선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관계는 금이 가기 시작한다.

고등학생 시절 몰래 연애를 하다 들켜 부모의 성화를 겪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이야기가 얼마나 잘 관찰된 진실어린 이야기인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가 이토록 평범하기에 장건재 감독은 무엇이 일어나는가보다 어떻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플래시백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에는 서스펜스가 없지만, 드라마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적인 상황을 보여주는 몇몇 장면에서 교묘하게 그 사실성을 고조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근본적으로 자연스럽고, 영화를 보는 또 다른 즐거움은 사회적, 심리적, 성적인 느낌의 정확성에서 온다. 여러 행동과 대화에는 일군의 사회학자와 심리학자들이 한동안 바쁘게 연구해도 충분할 만큼의 디테일이 있다.

자전적인 이야기를 영화적으로 재치있게

장건재는 영화의 이야기가 다소 자전적이라 한 바 있다. 이것은 왜 영화가 소년 김태훈에게 초점을 맞추는가를 설명해준다.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미정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그의 노력이 영화의 내러티브를 이끌어간다. 그와의 관계를 끝내려는 미정의 결정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그의 거부는 다른 사회적 상호작용들에서 그가 겪게 되는 어려움들과 맞물린다. 비디오 게임 가게에서 돈을 안 내려 한푼이라도 아끼려는 노력부터 그가 아르바이트로 배달하는 중국 음식의 국물이 흐른 것에 대한 비난을 회피하려는 노력. 오토바이를 타고 속력을 내다가 치게 된 사람의 병문안을 가야 하는 불편한 상황부터 그를 깨워서 학교로 끌고가 체벌을 가한 교사에게 화가 나면서도 복종해야 하는 상황까지. 영화는, 정도를 벗어나면서 여기저기서 깨지기만 하는 젊은이에 대한 이야기로 쉽게 관객에게 다가간다.

그러나 다른 많은 한국영화와 달리 이 영화는 여성의 관점을 존중한다. 여성 캐릭터들이 다소 주변적이고 영화는 상대적으로 적은 시간을 이들 캐릭터에 할애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믿지 못할 인간으로 그려지는 것은 아니다. 미정이 여자친구들에게로 돌아가 학교 공부에 집중하는 이유는 그녀가 성적 희롱이라고 느끼게 된 태훈의 행동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다. 양쪽 어머니들은 아버지들보다 훨씬 더 강한 캐릭터를 보여준다. 태훈에게 미정의 새 휴대전화 번호를 알려주지 않으려 하는 반 친구마저 생생하게 묘사된다. 그리고 전체 이야기의 시작이 된, 허락받지 않고 떠난 그들만의 겨울 여행은 미정의 기억으로 영화의 끝에 살아남는다. 학교 체육시간에 힘든 운동을 끝내고 앉아서 가쁘게 숨을 내쉬면서 미정은 그때를 기억한다. 이때 미정은 여전히 태훈이 준 목걸이를 하고 있다. 전체 플래시백 안의 이전 플래시백에서 겨울 여행 장면은 태훈의 기억으로만 나타나기에 이 장면은 특히 통렬하게 다가온다.

<회오리바람>을 특별한 영화로 만든 것은 궁극적으로 장건재의 영화언어다. 색의 통제, 숏들의 프레임과 페이스, 어디에서 언제 카메라를 움직일 것인가에 대한 정확한 결정, 비현실적 요소들을 다루는 섬세함과 예민함(미정이 체육관에 앉아 있을 때 미정의 머릿결을 흩어놓는 바닷바람처럼), 이 모두가 대단한 재능을 갖춘 감독의 부상을 증명해준다. 더 많은 증거를 원한다면, 영화에서 태훈이 서울의 도로를 따라 스쿠터를 타고 가는 두개의 몽타주를 비교해보라. 얼마나 완벽하게 첫 몽타부가 파괴적인 두 번째 몽타주로 이어지는지 확인해보라. 또 한 사람의 훌륭한 감독의 이름을 한국영화의 신전에 올리게 되어 더없이 기쁘다.

번역 이서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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