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에게 엄격한 사람이에요.” 유지태와의 첫 만남을 앞두고 <올드보이> <남극일기>를 함께한 정정훈 촬영감독에게 살짝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이다. 현장에서 그가 본 유지태는, 자기 자신을 혹독하게 다잡는 사람이란다. 나태를 모르며, 감독이 만족하더라도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면 멈추지 않는 배우라고 했다. 하지만 이 말을 덥석 믿은 건 아니었다. 그건 벌써 5년도 더 된 얘기니까. 표지 촬영을 약속한 날, 유지태는 예정보다 30분 일찍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저녁 시간이라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그는 사이코 살인마 역을 맡은 차기작 <심야의 FM>을 위해 체중을 줄여야 한다며 저녁을 걸렀다. 인터뷰 내내 유지태는 “열정이 식지 않는 배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머리에 물을 붓는 촬영 컨셉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는 자신의 진정성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배우였다.
멜로영화 <비밀애>에서 유지태는 연이(윤진서)라는 여자를 사랑하는 쌍둥이 진우, 진호를 연기한다. 형 진우는 연이의 남편이고, 동생 진호는 형이 혼수상태에 빠진 사이 형수와 불륜을 맺는다. 한마디로 정통 로맨스와 치정 연기를 모두 소화해야 한다는 말인데, 이러한 설정이 도전정신 충만한 유지태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음은 물론이다. <어댑테이션> <수> <데드 링거> 등의 영화에서 쌍둥이의 습성을 관찰하고, 시나리오를 꼼꼼히 훑으며 감정선을 머릿속으로 미리 정리한 그는 “대사만 봐도 이건 진우고, 저건 진호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캐릭터와의 거리를 좁혀가기 시작했다.
얼굴부터 행동 패턴, 심지어 아픈 시기까지 비슷하다는 일란성 쌍둥이를 연기하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누가 진호고 누가 진우인지 연이가 알아차리면 안되는 설정이었기 때문에 모호하게 연기해야 했다. 그런데 배우가 모호하게 연기한다는 건 상당히 부담되는 일 아닌가. 분위기나 톤, 버릇 등에서 약간의 차별을 두어 연기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진우는 다소 보수적인 한국 남자로, 진호는 개방적이고 리버럴한 성격의 남자로 거듭났다. 유지태는 자신의 외면이 진호를, 내면이 진우를 닮았다는 말도 덧붙였다. 결국 <비밀애>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인간 유지태의 다종다양한 모습이다.
진호, 진우가 배우 유지태의 분신이라면 <비밀애>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선 연출가 유지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자전거 소년> <나도 모르게> 등 네편의 단편영화를 연출한 그는 <비밀애>의 베드신과 콘티 작업, 촬영장면에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냈다. 생각을 말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영화에 대한 고민이 깊다는 얘기다. 이러한 고민은 감독 유지태의 연출작에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현장마다 감독님들의 연출 방법을 보며 많이 배운다. <자전거 소년>을 연출할 때는 허진호 감독님의 방식을 차용해서 롱테이크의 영화가 나왔다. (<비밀애>의) 류훈 감독님에게는 사람을 대하는 특유의 나이스함을 배웠다.” <비밀애>의 교훈이 어떤 방식으로 반영되었는지는 현재 4고째 쓰고 있다는, <로나의 침묵>을 닮은 장편 시나리오가 완성된 뒤에나 알 수 있을 듯하다.
사실 유지태라는 이름 뒤에는 <봄날은 간다>와 <올드보이>라는 꼬리표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다시 말해 그가 지금까지 이 두 걸작 이상으로 만족스러운 작품을 만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제는 두 영화를 넘어서는 작품을 해보고 싶다. 이명세, 박광수, 이창동 감독 같은 중견감독님들과 함께”라는 생각을 밝히던 유지태는 그러나 “평가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배우로서 열정을 바쳤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산도르 마라이의 <열정>이란 소설에 이런 구절이 있다. ‘솔직하고 안 하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결국 전 생애로 대답한다는 거지.’ 내가 열정을 가지고 (영화에)임했는지는 10년 동안 그려왔던 인생, 앞으로 그려나갈 인생이 말해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유지태는 묵묵히 영화라는 길 위를 걷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