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도시2>를 보는 건 힘들었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가슴은 답답해졌고 머리 속은 복잡해졌으며 장탄식이 절로 나왔다. 극장 바깥으로 나오니 몸이 퉁퉁 부은 듯 멍한 느낌이었다. 정말이지 <경계도시2>는 가수 루시드 폴의 말처럼 “한편의 공포영화”였고 사진작가 이시우의 말마따나 “고통스러운 영화”였으며 이영진 기자가 적은 대로 “당혹스럽”게 하는 다큐멘터리였다. 살인자가 등 뒤에서 다가가는데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영화 속 인물을 보는 것보다 5만배는 답답했고, 엄마 없는 소녀가 아버지를 찾아가는 길에서 여비를 뺏기고 동생을 잃어버린 마당에 깡패들을 만나는 장면을 보는 것보다 10만배는 심란했다(홍형숙 감독님, 강석필 프로듀서에게 “104분 동안 마이크 타이슨에게 얻어터진 느낌”이라고 말한 게 저예요).
이 영화는 되새기고 싶지 않았던 기억들을 대책없이 끄집어낸다. 송두율 교수가 37년 만에 고국 땅을 밟은 2003년 9월부터 독일로 떠난 2004년 8월의 한국, 망각 속에 묻어왔던 그때 이곳의 기억이 판도라 상자 속에서 일제히 튀어나와 머리 속을 휘저었다. 그 기억 안에는 송두율 교수를 짓밟고 몰아붙이고 난타했던 정당, 보수단체, 메이저 언론의 시끄러운 푸닥거리가 한축을 이뤘고,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좌충우돌갈팡질팡했던 ‘민주화 세력’의 혼란스러운 대응이 다른 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이 영화가 공포스럽고 고통스러우며 당혹스러웠던 진짜 이유는 그 안에서 내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경계도시2> 속 내 모습은 ‘송두율을 구속하라’고 외치는 할아버지들의 피켓 속에, 송두율 교수에게 ‘전술적 전향’을 권유하는 민주화 인사의 담배연기 안에 있었다. 주류 신문의 무시무시한 활자 속에도, 총선에서의 득실을 고민하는 사회단체 간부의 뇌까림 속에도, 도심을 스쳐가는 인파의 무심함 속에도 나는 존재했다. 눈은 스크린을 향해 있었으나 머리 속은 혼돈의 쓰나미만 넘실거렸다. 시사회장에 있던 다른 관객의 끊이지 않는 한숨소리는 그들도 스스로의 모습을 스크린 안에서 보고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이토록 보는 이를 힘들게 만드는데도 우리는 <경계도시2>를 여러분께 강력 추천한다. 그냥 한번 봐줄 만 하다는 게 아니라 꼭 봐줬으면 한다고 말하고 싶다. ‘경계인’이고자 했던 한 지식인의 기구한 운명과 감격적 고향 방문을 다루고자 했던 이 영화는 결과적으로 ‘경계 안 아니면 바깥’이라는 이분법에 사로잡힌 한국사회의 자화상으로 바뀌어버렸다. <경계도시2>는 송두율이라는 개인을 ‘놀이공’으로 전락시킨 우리 자신을 반성적으로 비추는 거울이자 몰래카메라다. 여기에선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 누구도 평안할 수 없지 않은가. 술 취해 필름이 끊겼던 지난 밤의 기억을 더듬는 심정으로(아, 그건 정말 두렵긴 하다) 이 영화를, 스스로를 마주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