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무엇인가, 란 질문을 던졌을 때 <어바웃 어 보이>의 윌 프리먼은 당연히 “모든 인간은 섬”이라고 말할 것이다. 영화 <인 디 에어>의 주인공도 그와 비슷한 대답을 내놓을 법한 남자다. “우리는 떼를 지어 사는 백조가 아닙니다. (혼자 살아가는) 상어죠.” 그에게는 잔소리를 퍼붓는 아내도, 징징거리는 아이도, 다달이 대출금을 갚아야 하는 집도 없다. 가벼운 인생을 찬양하는 그는 남들에게도 인생의 무게를 덜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삶이란 배낭에 넣고 다니는 짐 같은 겁니다. 특히 사람과의 관계가 가장 무거운 짐이죠. 짐을 다 버리고 나면 정말 상쾌하지 않을까요? 당신의 배낭에는 지금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그의 이름은 라이언 빙햄(조지 클루니), 사는 곳은 ‘공중’(up in the air)이다.
이 주인공, 마냥 좋아해도 되나
<인 디 에어>는 자유롭게 부유하던 이 남자가 어느 날 이상기류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빙햄의 직업은 ‘해고통보 전문가’다. 직원을 직접 해고시키기 싫어하는 거대 기업들이 그에게 일을 의뢰한다. 미국 전역을 돌며 해고를 통보하고 “상처받은 그들이 공포의 강 너머 희망이 보이는 곳까지” 아무런 사고를 치지 않고 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직업상 공항을 회사로비 삼고, 비행기와 호텔을 전전해야 하는 신세지만 남들이 여행에서 싫어할 것들에 안락함을 느끼는 빙햄에게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인생이다. 그러던 어느 날, 두명의 여자가 그의 비행에 동승한다. 한명은 댈러스에서 만난 알렉스(베라 파미가)다. 그녀 역시 빙햄과 마일리지를 놓고 경쟁할 만큼 공중의 삶을 즐긴다. 또 다른 한명은 후배 신입사원인 나탈리(안나 켄드릭)다. 비용이 많이 드는 파견근무 대신 인터넷 화상전화로 해고를 통보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제안한 그녀는 빙햄의 생활방식을 위기에 빠뜨린다. 빙햄은 여러 문제점을 지적하지만, 그의 상사는 당분간 나탈리와 함께 파견근무를 다닐 것을 명령한다. 결국 그녀는 빙햄의 깔끔한 캐리어 한쪽에 삐죽 나온 짐이 되어버린다.
<인 디 에어>는 지난 2007년 <주노>를 연출해 오스카 감독상 후보에 올랐던 제이슨 라이트먼 감독의 신작이다. <주노>를 비롯해 데뷔작인 <흡연, 감사합니다>를 눈여겨본 관객이라면 그의 영화가 한명의 인물로 시작해서 다시 그로 끝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주노>는 어느 날, 임신을 한 10대 소녀가 자신과 아이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짓는 이야기였다. <흡연, 감사합니다>의 주인공 닉 네일러는 미국의 담배산업을 옹호하는 담배연구학회의 홍보담당자였고, 영화는 그가 수많은 비난을 뚫고 자존심과 고집을 관철시키는 과정을 그렸다. 그처럼 선뜻 동조할 수 없는, 혹은 응원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제이슨 라이트먼의 주인공이다. 경제 불황이 곧 호황이고, 기업들의 감원계획에 깃발을 들고 나서는 빙햄 역시 쉽게 이입할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니다. 빙햄은 인터넷 화상전화보다 직접 사람을 대면해 해고시키는 자신의 방식이 품위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칼로 등을 찌르나 배를 찌르나 죽기는 마찬가지”이다.
미국사회 실업의 초상을 마주하다
직업적인 논란을 통해 사회적인 시선을 담았다는 점에서, <인 디 에어>는 <흡연, 감사합니다>와 가장 유사해 보인다. 두 영화는 대중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직업을 가진 남자가 누군가와 함께 여행길에 오른다는 점에서 흡사한 구조를 갖고 있다. 게다가 두 직업 모두 ‘달변’을 요구한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사실 주노도 만만치 않은 달변가였다). 예컨대 <흡연, 감사합니다>의 닉 네일러는 폐암으로 죽어가는 10대 소년 앞에서도 담배산업을 옹호할 수 있는 남자였다. “우리는 담배를 많이 팔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소년이 살아남아 계속 담배를 피워주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당신들(금연주의자들)은 이 소년이 빨리 죽기를 바라겠지요. 그래야 정부의 정책보조금이 더 많아질 테니까요.” 그런가 하면 라이언 빙햄이 해고를 당한 사람들에게 선사하는 희망의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당신이 꿈을 포기하는 대가로 이 회사에서는 얼마를 지급했나요? 언제 이 일을 관두고 좋아하는 일로 복귀할 생각이었습니까? 지금 당신에게 기회가 온 것입니다. 이건 부활이에요.” 뛰어난 능력을 부여하는 것 외에 그만의 공고한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섬세한 장면들도 인물의 매력을 더하는 부분이다. 빙햄은 노련한 킬러가 살인도구를 무장하듯 한치의 허튼 동작 없이 짐을 꾸릴 수 있는 베테랑 여행가다. 공항에서도 그는 탑승수속을 빨리 끝낼 수 있는 노하우를 자랑한다. 게다가 그는 주노처럼 재치와 유머를 가졌고, 무엇보다 잘생겼다. 이 멋진 저승사자를 창조하려 했을 때, 조지 클루니만한 배우도 없었을 것이다.
제이슨 라이트먼은 그의 발길이 닿는 곳에 여러 뇌관을 심어놓는다. 그의 말과 행동은 보편적인 관념들을 흔들어놓고, 현실의 이슈를 영화 속으로 끌어들인다. <인 디 에어>에 담긴 미국은 빙햄의 직업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경제 불황에 빠진 미국이다. 빙햄의 전언과 동시에 직장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망연자실한 표정과 심정은 영화에 꽤 묵직하게 담겨 있다. 제이슨 라이트먼은 극중의 해고자 배역을 실제 해고자들에게 맡겼다. “해고장면을 현실적으로 연출하고 싶었다. 실업난이 가장 심각했던 디트로이트와 세인트루이스에서 모집공고를 냈더니, 정말 많은 해고자가 몰렸더라. 반갑지만은 않은 상황이었지만, 정리해고 뉴스에 담긴 숫자에 각각의 얼굴과 표정을 대입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뿌듯했다.” 로저 에버트 등의 북미 평론가들도 <인 디 에어>가 지금의 미국사회를 묘사했다는 점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 해고자를 출연시킨 이유가 단지 현실 참여적인 목적인 건 아닌 듯 보인다. 제이슨 라이트먼은 공중에서 안락함을 느끼는 빙햄의 삶이 지금 현실의 삶에 대한 은유라고 말했다. “우리는 휴대폰과 문자메시지와 트위터로 더 넓게, 더 자주 소통하지만 정작 서로의 눈을 마주보는 일은 거의 없다. 너무 글로벌해서 정작 제대로 누울 곳이 없는 빙햄의 삶과 마찬가지다.” <인 디 에어>의 무게는 빙햄이 겪는 직업적인 풍경보다 그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진실한 관계를 고민하게 만드는 지점에 놓여 있다. 월터 컨의 원작 소설에는 없는 2명의 여성 캐릭터를 빙햄의 삶에 끼워넣은 이유이기도 하다. 알렉스와의 가벼운 관계를 즐기던 그는 점점 한 여자를 배낭에 넣고 사는 삶을 그려보기 시작한다. 여동생의 결혼식에 가는 것조차 귀찮아하던 그는 나탈리에게 오빠 혹은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해보면서 오랜만에 가족을 찾게 된다. 빙햄이 출장길에 만나는 해고자들도 사실 알렉스와 나탈리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들은 일단 해고의 부당성에 항의하지만, 결국 가족을 이야기한다. “당신 가족은 따뜻하게 잡니까? 주말에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서 외식을 하겠죠. 이제 우리 가족은 아무것도 못하게 됩니다. 내가 우리 애들에게 뭐라고 해야 합니까?” 빙햄의 인생철학과 대조되는 삶을 살고 있지만, 오히려 그들은 빙햄에게 어떤 위기의식을 느끼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만약 세상 어디에도 착륙할 곳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모두가 나의 착륙을 거부할 때, 유일하게 착륙허가신호를 유일하게 날려줄 곳은 어디일까. 빙햄의 공중인생에서 이번 출장은 귀찮음과 설렘, 걱정으로 점철된 여행으로 기억될 것이다.
감독의 인생이 변하니 영화도…
언뜻 한 독신 남자의 성장기로 보인다는 점에서, 우리는 빙햄의 또 다른 친구들을 꼽을 수 있다. 앞서 말한 <어바웃 어 보이>의 윌 프리먼을 비롯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유달,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의 롭 고든은 빙햄의 현재와 과거, 미래를 엿볼 수 있는 남자들이다. 그만큼 <인 디 에어>는 제이슨 라이트먼의 세 작품 중에서 가장 개성이 덜한 작품으로 보이기도 한다. 현실은 더욱 무겁게 담겼지만 전작만큼의 예리한 시선과 통쾌함을 경험하기는 어렵다. 감독 자신이 공중생활을 접고 착륙한 남자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처음 시나리오를 쓸 때는 풍자극을 생각했다. 하지만 6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내 삶도 변했다. 아내를 만났고, 딸이 생겼고, 영화감독이란 직함이 생겼고, 집도 갖게 됐다. 그런 와중에 내 가치관도 변한 것 같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개인의 선택이 갖는 가치에 대한 태도다. <인 디 에어>를 다른 ‘소년’들의 사랑 이야기와 구별할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빙햄은 그들처럼 “인생의 부조종사”를 찾아가는 것으로 자신의 성숙을 드러내지 않는다. 단지 이번 출장을 통해 그동안의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을 뿐이다. “<주노>는 소녀가 자신의 성장을 선택하는 이야기였다. <인 디 에어>는 혼자 살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나는 당신에게 해답을 주는 영화를 만들고 싶지 않다. 내 영화의 메시지는 마음을 열자는 거다.” 말하자면 <인 디 에어>는 관객이 자신의 배낭 속을 잠시 들여다보게 만드는 영화다. 당신의 배낭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무엇을 채워 넣든 비우든 그건 당신의 선택입니다. 그런데 혹시 채우고 싶어도 채울 게 없는 건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