맷 데이먼이라는 클리셰. 팬들이라면 맷 데이먼이 왜 클리셰냐 한 소리 하겠지만, 이거 보시라. 데이먼은 일탈이라곤 모르는 남자다. 우직한 남자다. 영원한 친구다. 강직한 연인이다. 무엇보다 맷 데이먼은 선량한 인간이다(<리플리>라는 예외가 있긴 하지만 그 영화는 잠시 잊어버리자). 그게 바로 문제였을 것이다. 맷 데이먼은 할리우드의 진정한 스타가 되기에는 너무 좋은 사람의 전형이었다. 친구 벤 애플렉이 약간 비뚤어진 캐릭터를 연기하고 제니퍼 로페즈와 사귀며 파파라치들에게 쫓기는 동안, 맷 데이먼은 주도면밀하고 명석하게 작가들의 작품을 선택하며 제 갈 길을 걸었다.
여기서 교훈이 하나 있다. 주도면밀하고 명석한 배우가 꼭 올바른 선택을 하는 건 아니라는 교훈 말이다. 할리우드에서는 너무 똑똑한 것도 종종 독이 된다. 맷 데이먼이 선택한 영화들은 줄줄이 흥행에 실패했다. <굿 윌 헌팅>의 오스카 남우주연상 후보는 사람들 기억에서 잊혀졌다. 블록버스터 출연에 머뭇거리던 벤 애플렉의 경력도 동시에 추락했다. 맷 데이먼은 암흑 같던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다. “이젠 다 틀렸군. 그렇게 생각한 때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완전히 다시 시작해야 했지요. 벤 애플렉도 똑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요즘 벤은 5년 혹은 10년 전과 지금의 자기 경력이 나아갈 방향은 완전히 다르다고 느끼고 있는 것 같아요. 그는 더이상 프랜차이즈 영화를 원하지 않죠. 사실 프랜차이즈가 정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은 그가 아니라 바로 저였습니다. 그러다 ‘본 시리즈’가 나왔고, 저를 구원했죠. (웃음)”
<본 아이덴티티> <본 슈프리머시> <본 얼티메이텀>은 맷 데이먼을 재발견했다.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결과다. 사실 <본 아이덴티티>가 맷 데이먼의 손에 떨어진 이유는 순전히 대부분의 할리우드 배우가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제정신이 있는 제작자라면 2001년의 맷 데이먼이 액션 영웅이자 정체성에 고뇌하는 스파이 역할에 가장 어울리는 배우라고 생각했을 리는 없다. 당시의 맷 데이먼은 <베가번스의 전설>과 <올 더 프리티 호스>의 전설적인 재앙으로 주가가 바닥을 친 상태였다. 그러나 우연이든 행운이든 맷 데이먼을 캐스팅함으로써 ‘본 시리즈’는 평범한 프랜차이즈가 아니라 21세기 액션영화의 스탠더드가 됐다. 할리우드 액션영화는 이제 ‘본 이전’과 ‘본 이후’로 나뉜다. 맷 데이먼이라는 배우의 평범하고 인간적인 매력이 007 스타일의 액션 블록버스터에 기겁할 만한 리얼리티를 쑤셔넣은 덕이 크다.
문제는 ‘본 이후’ 맷 데이먼의 경력이다. 폴 그린그래스는 본 시리즈로부터 완전히 손을 떼겠노라 선언했다. 맷 데이먼은 4편에도 참가하겠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폴 그린그래스는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고픈 감독입니다. 그없이 시리즈의 여정을 계속하는 건 힘들 겁니다. 그와 이야기를 해봐야겠지요. 제가 마지막으로 마음을 결정하기 전까지는요.” 대신 우리는 폴 그린그래스와 맷 데이먼이 또다시 협업한 이라크전 영화 <그린존>(3월25일 개봉)으로 ‘본 이후’의 맷 데이먼을 대략 추측할 수 있다. 맷 데이먼이 연기하는 말러는 대량살상무기 수색 임무를 맡아 이라크로 뛰어든 군인이다. 그는 좋은 군인이다. 바른 남자다. 그러나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이라크에는 애초에 대량살상무기 따위는 없었다. 보통의 군인이라면 그냥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닫고 귀국했을 거다. 말러는 다르다. 그는 CIA와 미국 정부와 시아파, 수니파 등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힌 이라크 전쟁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혈혈단신 음모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든다.
맷 데이먼은 <그린존> 촬영 전에 말러의 실제 모델인 군인 몬티 곤잘레스를 만났다. “처음 만났을 땐 네댓 시간 앉아서 이야기를 나눴어요. 나랑 동년배더군요. 같은 해 고등학교를 졸업했더라고요. 그 이후로는 굉장히 다른 길을 걸어오긴 했지만요. 몬티에게 물었죠. 왜 이 영화에 도움을 주는 거냐고요.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어요. ‘우리의 도덕적 권위를 되찾을 필요가 있으니까요’라고 말이에요.”물론 <그린존>의 말러와 현실의 몬티 곤잘레스를 실재하는 ‘본’이라고 말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실제의 몬티 곤잘레스가 명성과 돈을 좇는 취재원이었건 말건 간에 어쨌거나 본과 몬티, 말러는 거대한 시스템의 구성원인 동시에 시스템과의 전쟁을 선언하는 인물이다. 맷 데이먼은 모로코의 탕헤르를 헤집고 뛰어다니던 본처럼 먼지 뒤덮인 바그다드의 뒷골목을 뛰어다니며 자신과 폴 그린그래스가 창조해낸 ‘현실적 액션스타’의 자질을 다시 입증한다.
본 시리즈가 끝나더라도 맷 데이먼의 새로운 전성기는 계속될 듯하다. 그는 <그린존>을 만들자마자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우리가 꿈꾸는 기적: 인빅터스>에 뛰어들었고, 남아공 럭비선수 역할로 올해 오스카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그는 이스트우드와의 경이로운 작업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스트우드의 현장에는 난리법석도 없고, 조용히 서로를 노려보는 일도 없고, 점심을 먹으면서 먼저 촬영한 장면에 대해 곱씹는 일도 없어요. 그는 카메라를 설치하고, 한 테이크 만에 장면을 찍은 뒤 다음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정말 멋진 방식이에요. 배우로서는 또 한번의 촬영 기회가 오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딱 한번에 제대로 해내야 해요! 혹은, 적어도 한번에 해내려 노력해야 한다니까요!” 이스트우드도 (에고로 가득 찬 다른 할리우드 스타들과 달리) 군말 한마디 없이 그의 작업방식을 따랐던 맷 데이먼을 총애했던지 차기작인 초현실적 스릴러 <히어애프터>(Hereafter)에도 맷 데이먼을 기용했다. 게다가 맷 데이먼은 코언 형제가 존 웨인의 고전을 새롭게 각색하는 <진정한 용기>(True Grit)에 제프 브리지스와 출연하고, <본 얼티메이텀>의 각본을 쓴 조지 놀피와 함께 필립 K. 딕의 단편을 영화화하는 SF <어저스트먼트 뷰로>(The Adjustment Bureau)의 촬영을 끝마쳤으며, <유 캔 카운트 온 미>(2000)로 주목받은 케네스 로네건의 차기작 <마거릿렛>을 오랜 친구 벤 애플렉과 찍었다. 이 모든 영화들은 2010년에 개봉한다. 맷 데이먼의 소감은 다음과 같다.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살아 있는 게 행복한 시간입니다!”